[어느 호수 필자] 아름다움에 대한 대명사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꽃을 말할 것이고 더러는 자연의 신선한 모습에 탄복을 발언하는 사람, 혹은 피어나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명백한 일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목록들이 첨가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중에 시- 시의 아름다움도 빠질 수 없는 이름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꽃의 아름다움은 직관의 시선에서 나오는 감성이라면 시는 지적 감수성의 깊이에서 나오는 느낌이기 때문에, 생각을 더 해야 하고 다시 분석하면서 얻어지는 지성적인 아름다움의 지칭- 시는 심리적인 반응이 길고 또 판단의 정상적인 가치 혹은 순수한 지성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의 인식은 정서적 감동과 조화의 길이 상관을 맺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는 지적 인식만을 앞세울 땐 자칫 어지러운 함정에 빠져 도그마의 편견을 갖게 된다면 그건 시가 아니라 딱딱한 돌을 만지는 설명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지성과 감성의 조화에는 시적 묘미의 깊은 맛을 부추길 수 있게 된다. 시는 조화의 미학이기 때문이다. 시는 일정한 거리만큼 떨어져서 바라보는 아름다움이다. 너무 가까이 가면 아름다움의 실체가 흐리게 되고 또 멀리 자리잡고 바라보면 분간하기 어려운 사물로 둔갑하기 때문에, 균형이 있는 정서를 대동하고 목 좋은 자리에서 감상하는 행복이 조건으로 갖춰져야 한다. 이를 감상자의 태도라 칭하면, 생산자인 시인은 고뇌와 아픔 그리고 탄식을 조합하여 아름다움을 생산하는 사람이 시인일 것이다. 김정석의 시에서는 요란함과 군더더기가 없으며 고요하고 금도를 지키는 정신의 고양을 대면하면 올곧은 정신이 숨 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고독의 깊이에서 그리움을 보내는 여린 정서가 보이기도 한다. 아울러 나이테나 세월의 깊이에서 오는 이별의 아쉬움이나 돌아보는 생의 소회 등이 어우러져 파노라마의 의식을 보여준다. 더불어 근엄한 시적 태도는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관조하는 시선에는 정감이 흐르고 있음을 보게 된다. 2. 감각 서정, 정서의 감성 때로는 시는 감각적이어야 하며 정서를 풀어내는 감수성이 시인의 재능과 일치하는 점을 가질 때 시의 묘미는 아름다움과 보조를 함께한다. 김정석의 시에는 그런 감칠맛이 들어있고 의미와 가락의 조화에는 시조가 갖는 정서의 증폭에 일조하는 느낌을 배가하게 된다. 시조의 태생적인 특성이 가락 위주였음은 누구나 알 것이지만 자유시와 경쟁 구도를 갖춘 이후에 시조의 자리는 의미와 가락을 함께 담으려는 데서 위축되거나 정체 혹은 현상 유지라는 점에서 답보에 머물고 있음이 현재의 시조일 것이다. 왜냐하면 시조와 자유시의 경계가 엄존할 때, 오로지 정형에만 특징을 붙잡아 두려는 데서 시조 시인의 노력 없음이 더 하다, 라는 느낌이지만 그러나 김정석의 시(詩)- 시조라는 구분의 말이 없으면 자유시와 다름이 없는 재미에 빠지게 된다. 자분자분 정을 주는 속살속살 비가 온다 산당화 살진 볼에 목덜미가 간지러워 배시시 왼고개 들며 알 듯하게 웃고 있다. 숨겼던 사연들을 당사실 올로 감춘 안으로 차오르는 고요의 살 핏줄에 들릴 듯 사랑의 밀러 봄 기별이 바쁘다. 『입춘 부근』 지극히 감각적이고 서정적이면서 의인법 혹은 동음 반복에서 나오는 가락은 여유가 있고 맛깔스러운, 뉘앙스를 전달한다. 언어를 비틀거나 완곡하게 조종하는 것이 아니며 유연하고 부드럽고 그러면서 반복적인 시어의 배치가 매듭 없는 마치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에 오르고 소요하는 인상을 준다. “자분자분”과 의성어 “속살속살”에서 나오는 여운은 의미의 중첩- 속살속살은 내면의 부드러움이면서 가는 빗소리- 왁자한 비가 아니라 소곤거리는 암시를 포개는 인상을 준다. 비가 내리는 날은 무겁고 우울한 기분이 점령하지만 김정석 시인의 비는 무겁고 칙칙함보다는, 귀엽고 산뜻한- “목덜미가 간지러워,”와 “배시시” 웃고 있다는 시어의 조합이 가벼우면서도 경박하지 않고 흩어진 것이 아니라 정리된 의미로 옷을 입어 밝음의 상태를 전달한다. 이는 시의 전체적인 표정이 밝아 봄의 정서가 살아나는 것뿐만 아니라 산당화가 사랑의 모습으로 전이되는 풍경이 따스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우수 지나』 『해당화』 등은 김정석의 서정적 이미지가 드러난 수작으로 시인의 재능과 원숙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3. 문법 희망 절망에서 희망 그리고 아픔에서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시의 본령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꿈과 사랑 그리고 희망의 미래를 말하는 손짓이고 예지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곤궁하고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는 불빛의 역할을 하는 일면 평화로울 때는 화려한 장식으로의 소임은 시가 갖는 본령이고 시의 역할에 주된 임무일 것이기 때문이다. 시의 특징을 Ambiguity에서 찾는 것도, 시가 천의 얼굴을 소유한 보살의 역할처럼 다양한 표정을 내장했을 때, 비로소 시의 기능은 희망의 문법을 완수하게 될 것이다. 떠날 수도, 주저앉아 쉴 곳도 없는 세상 촘촘한 눈빛 시린 볼모의 공간에도 봉곳이 예비한 가슴 신들의 꿈은 있다. 지상에 널브러진 오탁의 그림자도 한 켜를 걷고 보면 땅줄기의 물이 올라 신들의 영혼을 닮은 꽃으로 피어난다. 『해토머리』 중 매우 질서 정연한 과정으로 엮어진 시이다. 즉 1연에는 시련과 아픔이 따르는 “볼모의 공간” 2연은 “꿈”을 말하고 3연은 “땅줄기 물이 올라” 4연에서는 비로소 개화의 의미가 완성으로 이어지는 “꽃”에 최종 목적이 발현된다. 시련, 꿈, 희망, 꽃으로의 4단계 진전은 삶의 원리를 대입해도 정확한 일정이 된다. 시는 비유로 진실을 말하는 기교라면 김 시인의 시조에는 녹아있는 삶의 진수가 담겨있다. 이는 생을 통찰하는 그리고 명상에서 건져 올린 정서의 내공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오랫동안 훈련된, 그리고 시의 장인만이 이룰 수 있는 언어 기법인 것이다. 이럴 경우 시와 정신의 결합이 공고했을 때 비로소 시의 속살을 꽉 채우는 의미에 도달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시인의 정신을 나타내는 민감한 온도계와 같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시는 곧 시인의 삶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표정이기 때문에, 그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생각으로 오늘을 바라보고 내일을 생각하는가의 조차 파악되는 길이 담겨있게 된다. 가슴에 물을 담아 배를 하나 띄울란다. 구름 걷고 맨손으로 밤마다 별을 따는 봄 한날 살가운 저녁 조각달과 같은, 그런 가슴을 새로 닦아 이름 하나 새길 난다. 차운 밤 따스하게 황 촉 밝혀 뜨고 몸으로 몸을 태우는 목이 가는 여인, 그런 『가슴을 새로 닦아』 중 별과 달은 어둠에서 좌표의 길잡이가 될 뿐만 아니라 생의 궁극을 말하는 의미조차 내포한다. 그러나 달과 별은 어둠을 전제로 했을 때, 빛의 의미를 구가할 수 있고 희망에의 노래가 합창될 수 있기 때문에 『가슴을 새로 닦아』는 어둠을 생략하고 밝은 빛과 달을 전면에 포진 시키는 기법을 보이는 시가 된다. 2연에 “가슴을/ 새로 닦아/이름 하나 새길란다.”/를 위해 “황 촉”을 켜는 빛의 단계로 진입하기 때문에, 시적 균형이 안정감을 가지면서 의미의 확장을 이룩하는 기교가 환해 보인다. 4. 고독과 황혼의 여운 김정석의 시적 표정은 겉으로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고독과 이별이 교차하는 모습이 다소 쓸쓸함을 느낄 수 있다. 아무래도 나이의 깊이에서 오는 감수성이 용약(勇躍)하는 정서이기보다는 가라앉아 차분하고 쓸쓸함- 황혼의 풍경이 다가든다. 시는 시인과 정서의 일체화를 이루기 위해 사물을 앞세워 비유라는 도구를 사용하면서 자기로 돌아가는 설명을 상징으로 처리한다는 일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적절성의 비유에는 음식의 맛깔스러움을 더하는 역할과 같기에 곰삭은 지혜가 들어 있어야 한다면 김정석의 고독은 현실에 대한 반응이 꾸미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움과 같은 이치로 보는 것이다. 선홍빛 물든 잎에 얼굴을 대어본다. 잎맥을 타고 흐르며 어질게 늙는 소리 세월의 등성에 누워 감빛 놀만 담고 있다. 『두 겹 다리 위에서』 사물의 모습을 소리로 듣는 시인의 귀 밝음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보아야 할 것들이 소리로 다가오는 일은 체험과 세월의 깊이에서 알아차린 쓸쓸함이다. 뼈와 뼈가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귀에서 들리는 이명의 낯설음, 아울러 시야에 다가온 흐린 사물의 윤곽들이 시인은 소리와 직결되는 환청으로 들을 수 있을 때, 마치 멀리 떠나온 것 같은 소회에 잠길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더불어 달빛에서 소리를 듣는 일이나 꽃에서 아름다운 연인의 음성을 유추하는 일은 시인의 주된 상상의 깊이와 연결되는 작업이다. “잎에 얼굴을 대어볼 때.” 들리는 “어질게 늙은 소리” 앞에 어떻게 삶을 진행하는가의 숙제가 “어질게”에 모아든다. 즉 “어질게 늙음”과 “감빛 놀”이 아름답게 결합하는 방법을 찾는 도정에는 쓸쓸함과 고독이 다가올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하면 둘의 이미지 모두 종점 의식을 암시하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난 바다 물금 넘는 한 사내를 본다 영토를 잃어버린 알 섬 같은 사내를 하루가 전광을 거두는 구부정한 저녁나절 『가을 낙수』 중 수평선을 바라보는, 그리고 영토를 잃어 절망에 의상을 슬프게 걸친 사나이의 모습- 무인도의 비유에서 처절한 표정의 슬픔을 읽는다. 더구나 하루가 마감되는 황혼 무렵의 구부정한 저녁나절은 곧 시인 자신을 보여주는(showing) 풍경이 서러움을 배가 한다. 인간은 언젠가는 혼자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을 유추하면서 깊게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면 숙연한 정감이 눈물을 불러오게 된다면 김정석의 고독은 황혼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홀로 서 있는 모습이 오히려 은은하고 정 깊은 풍경화가 되는 것은 아닐지 고독은 자기 찾기이고 자기를 찾아가는 일은 삶의 모습을 어떻게 그림으로 아름답게 표출할 것 인가의 기교적인 일이 될 것이다. 생의 궁극이 곧 아름다움을 연출하는데, 목표가 있다면 젊음에서는 젊음의 미가 있고 시니어는 시니어의 표정이 있을 수 있다. 아무런 욕심 없이 그린 그림으로 김정석 시인이 그리는 생의 그림은 담담한 수묵화이면서 철학이 담긴 풍경에는 그 성품의 모습이 고독한 그림자를 이끌고 가는 황혼의 자화상에 여운이 너무 긴 것은 아닌지 5. 이별의 소리 회자정리의 이치는 인간만이 갖고 있는 정서는 아니다. 우주의 섭리라는 생로병사의 윤회를 굴리면서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다시 돌아오는 바퀴 속에서 존재라는 이름을 키우게 된다. 석가모니의 고뇌는 곧 그런 이치를 가장 순수하게 설명하기 위해 한 방편으로 정확한 이름표를 달고 있다. 만남에는 즐거움이 따르며 반면 이별에는 슬픔의 강물이 수런거리는 일은 억만년 인간의 역사가 축적한, 슬픔의 기록일 것이다. 이별 앞에서는 누구나 답안지를 찾을 수 없어 두런거리고 슬픔의 깊이에 빠지게 된다. 그처럼 김 시인의 이별에는 건너지 못하는 미련의 줄기가 뒤따르면서 가락으로 형성되면서 길을 찾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한 사나흘 질긴 비로 봄눈은 트겠지만 아파서 자라는 고독 먼 폐가를 돌아 나온 바람도 어깨 걸려 곡비(哭悲)처럼 울고 있다. 지우면 지울수록 꽃고무신 갈아 신고 출구가 막힌 회안 나선으로 감고 와서 추억의 물목에 앉아 눈뜬 자정을 지킨다. 『이별 이후』 이별의 구체적인 사유는 알 수가 없다. 누구인지 그리고 언제 이별의 사건이 시인을 슬픔의 강물을 띄었는지- 그러나 시는 리얼함을 나열하는 글이 아니고 상상의 생략 혹은 사실에 상상의 옷을 입힐 때, 더 넓은 상상의 반경을 소유할 수 있다면 시인의 이별은 “아파서 자라는 고독”과 “곡비처럼 울고 있다”에서 슬픔의 농도가 처절함을 느끼게 하지만 지적인 제어로 매우 고단함을 주게 하는 인상이며 더불어 “지우면 지울수록” 다가오는 기억들은 추억을 부추기는 이름이 되어 “눈뜬 자정을 지킨다.”에서 불면의 함정에서 어찌할 수 없는 각인의 이름 앞에 흐느끼는 여운이 길게 느껴진다. 그러나 드러나는 이름에서는 허무와 함께, 동행 모습이 보인다. 6. 에필로그(가슴의 풍경화) 시는 언어가 아니라 시인의 가슴을 열어 보이는 풍경화라는데 이의가 없다면 김정석 시인의 시에는 한국 시의 서정이 숲을 이루면서 시원하고 삽상한 바람을 미소로 건네준다. 이는 표현의 깊이를 간직한 셈이고 여기서 시의 숙성은 곧 체험과의 조화를 느끼게 한다. 아울러 대상을 바라보는 날카로움의 시선을 사랑으로 감싸는 동화에서 형식의 절제와 언어 탄력을 수용하는 미감과 내용의 무한성에는 여유로운 감상의 길이 보인다. 고독과 허무 의식 그리고 그리움의 표정을 나타내는 기법이 시적 기교의 무아경을 방문하는 소감처럼 객관적인 표현일 때, 더욱 친근감을 전달하고 있다는데 방점을 찍고 싶다. Allan Tate가 말한 “문학은 인간 경험의 완전한 지식이다.에 미감을 더한 소득이 따라오는 감동의 시인 김정석 시인이 그렇다. 라고 말하면서 나가려 한다. 참으로 대단한 시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느끼며 정서적 감성을 느끼며 오랜 체험의 체취를 맡으며 에필로그 한다. 2025.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필자 저서]
[천계단의 필자] 시를 쓰는 일이나 살아 가는, 일이나 구분에서는 다름이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시 또한 유기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에 생로병사의 과정이 인간의 생애와 유사하다는 점을 건론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의 표정은 삶의 표정과 같이 진지하고 때로는 땀을 흘리는 표정도 감지되고 더러는 생의 화려함을 대변하는 가락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때,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반응을 갖게 된다. 시가 독자에게 감동을 전달할 수 있음은 인간의 감정과 반응의 감수성과 유사성을 가질 때 인간은 시에 열정을 투사하면서 감동의 종점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감동이란 결국 인간의 정서와 시적인 정서가 함께 매칭되었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상징성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빛- 밝음이면서 의미요 가치의 개념으로 환산되는 상징에서 시의 가치는 인간의 가슴을 장악하는 가락을 만들 수 있게 되기에 시인은 빛을 만드는 자요 삶의 의미를 고양하는 점에서 頂點을 향한 노력이 투척 되어야 한다. 그러나 삶의 의미 그리고 생의 심사(深思)한 명상의 숲을 지났을 때, 비로소 의미와 빛을 알아 차리는 인간의 체온을 가져야 한다. 따스하면서도 때로는 이지(理智)의 냉엄한 잣대를 가지고 사물과 대상을 투시하는 눈을 가졌을 경우 시의 이미지를 조종하고 창조하는 사람의 체온을 가질 수 있고 또한 유지하는 정감의 소유자라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은 초감각 또는 범상한 의미를 위해 자신을 망각하면서 인간의 의미를 위해 의복을 제작하는 창조자라는 뜻이 곧 유기체를 창조하는 인간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정다감하고 따스한 김정옥의 온화함으로 연결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물을 대면하면서 살아가는 생명의 소리가 들리는 창조의 입구를 장악하고 있다. 이제 그의 시적 특성이 독자 앞에 어떤 소리로 다가오는가를 살피기로 한다. 2. 감수성의 표정 1) 자기만큼의 그릇 인간은 자기만큼 살고, 자기만큼 표현하고, 자기만큼의 한계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지나간다. 다시 말하면 자기라는 그릇을 가지고 그 그릇에 의미를 채우는 일이 고작일 뿐 과욕은 넘치게 되고 부족은 갈증을 유발하면서 일생을 살게 된다는 뜻이다. 결국에는 자기라는 몫을 모두 맛을 보고 사는가 아니면 부족에 안타까움을 갖느냐는 오로지 당사자의 능력으로 좌우된다는 점에서 존재가 형성된다. 때문에, 열성으로 자기를 계발하고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고 확장하는 일이 운명일지 모른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 델포이 신전의 명제를 당시 민중들에게 깨우침의 도구로 말한 것도, 결국에는 존재를 확인하고 살아가는 의지의 사람과 맹목의 인간에게는 다른 결과가 도출된다는 뜻을 강조한 말일 것이다. 그대여 하얀 달빛 되어 연못 위를 비추어 주세요 그러면 난 희망의 꿈을 실은 종이배 하나를 띄우겠습니다 예쁜 나의 꿈과 고운 사랑의 빛은 따스한 보금자리가 되어서 밤마다 별들이 또르르 내려와 놀고 새들의 노랫소리 떠나지 않는 아름다운 나의 작은 호수에 그대의 마음도 와주신다면 언제까지나 달을 품듯 별을 품듯 행복을 꼭 껴안을 수 있을 텐데 『작은 호수』 중 김정옥의 호수는 작은 호수가 자기 자신을 암시하고 표징(表徵) 하는 의미로 인식된다. 이왕이면 크고 큰 호수이지 “작은”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는 일은 아무래도 시인 자신의 상징성과 같은 일로 추측된다. 1연에 “그대”라는 미지칭으로 호소로 시작- 그대는 미지의 대상이고 합하기를 염원하는 상징이라면 작은 호수에 동일성을 이루는 일을 수행해 주기를 바라는 의지적인 심리가 백색의 감각적인 “달빛”과 같은 은은함을 더하는 무드로 흐르고 있다. 공간적인 이미지가 밤이고 작은 호수 그리고 달빛이라는 뉘앙스가 정적인 현상에서 기다림이 점철, 되었다. 2번째 연에는 희망을 실은 배는 이동의 이미지가 그리고 3연에는 보금자리에 꿈과 사랑의 아늑함을 부추기게 되고 4연에 별과 새가 어울리는 환상적인 호수에 소리의 울림이 노래로 진전하고 이 공간에 그대가 와준다면 에 소망이 애처롭다. 이런 조건이 이루어지면 시인은 달과 별들의 위호(衛護)를 받으면서 궁극의 지향점인 “행복”에 이를 것이라는 상상의 여백이 넓어진다. 이런 꿈은 곧 작은 호수의 소망이자 시인의 마음이 흐르고 있는 최종의 염원을 암시하고 있다. 작은 호수의 시인이고 여기서 행복과 따스함을 염원하는 여성의 이미지가 가득한 느낌을 준다. 적극적인 심성보다는 소극적이고 우람하기 보다는 작고 아담하면서 정다움을 느끼는 평화의 이미지가 앞장선다. 이런 총체적인 이미지가 김정옥 시인의 표정이고 인상인 듯싶다. 2) 사계의 표정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인생의 순환과 같이 서로 연계되어 인간의 생활과 밀접한 상관 하에서 진전의 바퀴를 돌린다. 이는 생로병사의 혹은 동서남북 등 우주적인 현상과 인간의 삶은 늘 연결 고리를 갖고 진행하기 때문에, 봄에서 삶을 준비하고 여름에서 꽃을 피우면서 씨앗으로 가을의 준비를 갖출 때, 이미 겨울은 삶의 뿌리를 땅속 깊이 의식을 감추고 계절을 보내게 된다. 이런 비유는 시에서도 높은 빈도로 시인의 심금을 울리게 된다. 기ㅁ정옥의 시에서 봄 의식은 태동의 의미가 생명으로의 길을 찾으려 한다. 『꿈꾸는 봄』 『기웃거리는 봄』 『봄비는 오는데』 『사계절의 연가』 『봄이어라』 『봄의 노래』 『봄비가 내리는 이유』 『슬그머니 오는 봄』 등 봄날의 이미지는 생동과 삶의 약동을 준비하는 계절로 들어간다. 갈증 난 초록의 군상들 긴 목 뺀 기다림으로 반기며 마시는 빗방울 풀기 없는 응달에도 귀하디귀한 감로주로 붉디붉은 꽃을 피우고 있다 이 비를 흠뻑 맞으며 정처 없이 훌쩍 떠나서 봄비의 향연을 즐기고 싶은데 ··· (중략) ··· 촉촉이 젖어 드는 비처럼 보고 싶은 이를 불러 본다 돌아올 길 없는 그리운 이름을 『봄비 오는데』 중 봄은 비로 의해 비로소 문을 열게 된다. 마치 굳은 패각(貝殼)의 땅- 맹위를 떨치던 겨울의 두꺼운 의상을 벗고 비에 젖으면 잠을 깨는 자연의 숨소리가 푸른 이름을 불러오는 진행이 계속하게 된다 때문에, 봄은 비의 전령이 있을 때, 문을 열어젖히는 생명의 약동이 준비를 넘어 세상의 입구에 이를 수 있는- 환희의 준비가 갖춰진다. “긴 목 뺀 기다림”은 곧 봄의 특징이고 준비라는 점에서 여느 계절과는 다른 이미지가 풍부해진다. 왜 그런가 하면 “붉디붉은 꽃을 피우고 싶다”의 소망이 자라는 계절- 여기에 비가 올 때 비로소 봄날은 화려한 시절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의 마음을 적극적이기보다는 다소 소극적인 이미지- “돌아올 길 없는 그리운 이름을” 만나는 열정이 “봄비의 향연을 즐기고 싶은데”라는 “싶은데”의 소극성 때문에 여성적인 뉘앙스를 대입하면 이해가 된다. 『분수대』 『여름 식탁』 『아직도 여름은』 『소나기 낙뢰』 『여름이 오는데』 등 여름의 시는 맛과 소리와 화려한 꽃들의 이미지가 어울려 분주한 시절이 구가 된다. 가장 왕성한 기운이 계절의 꽃을 피우고 절정의 높이가 녹음으로 덮이는 때를 여름이라 칭하면 인생의 화려한 꽃은 행복을 향한 이미지 구축이 된다. 하늘은 높고 불타는 태양이 나를 맞는 날 파도로 넘실대는 너울이 귓전에 올라앉은 달콤한 속삭임 너와 나의 만남이 아름다운 것은 행복이란 이름으로 살포시 다가와 고운 미소의 속삭임이 너무 좋아 따가운 모래알이 빚어낸 조약돌도 뭐가 그리 좋아 동그라미 그릴까? 아마 행복한 웃음꽃 하트를 그리겠지 『그 여름의 아름다운 날에』 중 모든 사물은 왕성한 시기를 견디는 성하(盛夏)의 계절은 주기적으로 다가든다. 그러나 새로움으로 가득한 변화일 뿐 전혀 이질적인 것은 아니다. 시인은 여름의 중심에서 행복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때문에, 여름날이 아름다움으로 마음을 채우고 생의 의미가 한층 빛나는 듯 개화의 중심에 선다. 시원한 분수는 하늘을 향하고 때로 소낙비와 낙뢰는 두려움을 키우는 듯 큰소리로 심장을 자극한다. 여름은 요란과 극성 그리고 화려한 이미지들이 저마다 특색을 갖추는 일이기 때문에 쉽게 지나간다. 김 시인은 파도에서 달콤한 속삭임을 감상하고 만남에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행복이란 이름 앞에 스스로 낮추는 겸손이 보인다. 가을은 조락의 이미지가 왕성해진다. 그러나 모든 준비를 갖추고 삶의 미래를 위해 저정 공간을 넓히는 이미지 앞에 전별을 준비한다. 정리의 마음이 앞서고 이별 같은 준비가 목록에 들어갈 때 바람은 스산한 노래를 부르는 계절- 가을 앞에 시심은 가락을 만든다. 반짝이는 별들 사이에 넌 달보다 더 환한 미소로 손짓하며 말을 걸어오는구나! 우리가 정다웠던 그 시절 생각난다. 손잡고 눈짓만 해도 가슴 설레던 순간들 영상으로 그 순간이 머릿속을 회오리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너의 모습 아득히 먼 곳에서 다시 자꾸만 멀어져 저기 별이 되어 반짝이나! 내 가슴 아린 추억이어라 『가을밤에 널 생각하며』 가을은 사념의 길이 넓어지는 때이다. 왜 그런가 하면 가을의 무드는 애상적이고 페이셔스함이 여린 감정을 조장하는 때가 되기 때문이다. 마치 시가 분위기를 타고 날아오르는 감수성의 계절이라는 듯 시인은 가락을 가을의 이미지에 실어 보내는 분주함에 추억이 넓어진다. “반짝이는 별” 혹은 “달”의 분위기가 “미소”로 시인의 정서를 자극하면서 부풀어 오르는 추억 앞에 “내 가슴 아린”의 정조가 바람 앞에 더욱 흔들리게 된다. 즉 가을의 정취는 사념의 길을 넓히고 삶의 애뜻함이 길을 만들게 된다. 『갈대의 노래』 『가을아』 『추상』 『이 가을에』 『낙엽』 『10월 마지막 날』 『애수』 등 따스함을 열망하는 의식이 시인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노래 가락이 마음의 길로 유장하게 흐른다. 겨울은 눈의 계절이다. 그것도 흰빛의 이름에 포근함을 꿈꾸는 시절의 낭만이 더욱 여유로워질 때이다. 아울러 마지막을 준비하는 겨울 입구에서는 예외가 아닐 것이다. 서럽도록 시린 향기 내 가슴에 꽃망울로 활짝 피어났다가 빛바랜 꽃잎처럼 시들어 갔었지 어젯밤 꿈속에서 토닥토닥 덮어준 목화솜 이불 그대가 놓고 간 수정보다 투명한 꽃밭 때문이었지 『첫눈 오는 날』 겨울을 바람이 불고 파도는 높이를 위해 너울을 높이면, 따스한 사람의 열기가 더욱 갈증나고 혹독한 냉기 앞에 스스로를 감추는 연습을 진행하는 때이지만 죽음이 덮인 것은 아니다. 오로지 준비의 때이고 삶의 내일을 생각하는 양이 많이 쌓이는 계절이 겨울의 엄혹한 특징이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김정옥 시인은 순수로 하얀 계절의 여유를 알아차리는 이미지가 보이고 또 삶의 여백에 쌓이는 미소가 곱다 계절은 변화 앞에 특징이 드러났고, 이는 시적 대상을 바라보는 투명한 정서의 가치로 돌릴 수 있는 부분이면서 봄, 여름 그리고 가을, 겨울 등 계절마다 변화의 이미지가 생동감으로 특색을 시화한 노고가 두드러진다. 미래로 문을 열기 위해 기다림의 씨앗은 언젠가의 날을 위해 숨을 고르는 겨울의 따스함- 희망과 내일을 대동하고 견디는 인종의 시간 앞에 펼쳐지는 겨울의 환타지가 조요한 화음을 횐 눈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겨울의 미감이 반짝인다. 산기슭 외로이 홀로 피어난 고운 모습 향기로워라, 산새들과 정답게 뛰놀던 들짐승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아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네. 『들국화 꽃』 중 들국화의 표정은 곧 시인의 모습을 오버랩하는 인상이다. “홀로 피어난”의 적당한 고독과 “고운 모습”에 간직한 향기의 승화와 서로 어울리는 열린 마음의 행방과 “묵묵히 자리를 지키려는” 의지의 표현미에서 시인의 모습이 겹치는 것으로 자화상을 삼는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곧 시인 자신을 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향기를 내뿜는 꽃은 자발(自發)성으로 꽃을 피우고 향기를 발산하는 일이 아닌- 스스로에 몫이기 때문이다. 시는 항상 자신으로 향하는 점에서 비유와 은유 등의 의상을 걸치고 있을 뿐 진실의 모습을 은근히 감추고 있을 때 독자는 이를 알아차리는 수고 또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독자들의 감흥을 받을 수 있는 시가 되기 때문이다. 3. 에필로그 시는 추상의 구름을 걷고 지상의 선명한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가락을 만들어야 한다면 김영옥의 시는 다양한 사물의 모습에 자신의 표정을 대입하여 가락을 만든다. 아울러 여성적인 섬세한 눈으로 포착한 정서는 그만의 영역에서 훌륭하게 조합하고 어울리는 하모니의 표정에 밝고 환한 이미지들이 수런 거린다. 사계절의 변화를 스크린 하는 것이 아니라 이면에 들어있는 계절의 다양한 표정들이 살아서 담소하는 정겨움이 유난함을 느끼게 한다. 차와 음식에 대한 깊이가 맛으로 다가올 때, 신선미 또한 유난한 정서로 시의 맛을 부추기는 여유가 있다. 더불어 순수한 표정에서의 그리움이 손짓처럼 다정하고 따스함으로 강이 흐르는 시의 품위가 다가오는 것 같다. 꽃을 사랑하고 속삭임에 귀를 열어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정말 정겹고 맛나고 맛깔이 난다. 가족을 중히 여기는 것이 미덕이 아니라 품성의 본질이라면 김영옥의 시에는 그런 속삭임이 정갈하고 순수하다. 이는 우정을 소중히 여기는 면에서도 시인의 시적 수원지는 매우 풍부하고 담백한 인상을 남기는 시인의 면모가 인상적이며 출중하다고 보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5.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필자 저서]
[대중문화평론가/금요저널주필/이승섭시인] 인간에겐 저마다의 표정이 있고 변증법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대화술, 문단법” 등 “플라톤은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사유 방법”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렇듯이 인간은 삶의 모습을 나타내며 개성과 삶의 압축된 모습을 보여주는 방법일 수도 있다. 시 또한 그런 도정(道程)을 문자로 표현하는 자기화의 방법에서 독특한 개성을 나타내는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시는 인생을 압축하면서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단면으로써 생의 전부를 보여주는 압축성- 단면으로 생의 전부를 보여주는 방법은 시의 재능을 요구하는 부분이라 할 것이다. 풀이나 꽃에서 허무 또는 기쁨을 발견할 수도 있고, 길가의 돌맹이에서 굳은 신념과 의지를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가 철학이 아니라는 점에서 설명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전달하는 특징 때문에 시적 장치를 갗추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 시의 위의(威儀)는 비유나 상징 또는 역설 등의 적절성에서 삶의 모습을 독자가 느낄 수 있을 때 감동의 허니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시적 감동은 목적이자 결과이기에 1. 생의 체험에서 독자에게 추체험의 길을 제시하고 2. 시적인 압축성에서 산문과는 다른 의미의 다양성-Ambigeyty에서 시의 특성이 나올 수 있다면, 시는 과학이 아니고 다만 시적인 여백을 가질 때 비로소 시만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다. 시는 시라야 한다. 그렇다면 시는 정작 무엇일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길을 만드는 것이 시일 뿐- 시는 정답을 갖지 않은 표정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삶의 모든 요소가 녹아들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논리 이전의 논리가 정치(情致)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는 과학 이전의 과학- 현상이지만 시는 의식과 무의식의 공간을 아우르는 삼라만상의 우주의 모두를 포괄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누리는 영예는 이러한 시를 쓸 때 비로소 지고(至高)한 자리를 점할 수 있게 된다. 김수자의 시는 다양하고 감각적인 표현 에스프리를 접하는 일인 듯하다. 시는 사물을 바라보는 감수성을 어떻게 포장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서 시인의 개성은 나타나기 때문이다. 찌릿 전기 통하는 연시 나무 하늘 높이 매단 전구에 불이 들어온다. 긴 줄도 없는데..... 훤하게 비춘다. 너무 높아 끌 수가 없어 밤낮 자유로이 놓아두니 새 떼들이 하냥 놀다 간다. <연시 나무> 중 시는 응축(凝縮)에서 탄력이 생기고 그 탄력은 생동감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상상력의 지평은 의미의 확장을 가져오면서 시의 맛을 높은 경지로 이끌어 올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는 지각의 자동화 현상이 아니라 사물을 낯설게 표현하는 기교이기 때문에 시의 위의를 높이는 작용을 한다. {나무}에서 대지의 젖줄에 입을 대고 “찌릿 전기 통하는 연시 나무” 비유의 시어가 나오는 것은 사물을 변용하여 상상의 지평을 넓히는 시적 장치에 의해 감각적인 신선미를 자극한다면 김수자의 “연시 나무”는 매우 신선한 듯하다. 60자 조금 넘게 불과한 어의 구조에서 붉은 연시 감의 전기가 통해서 불이 켜지는 “훤하게 비춘다”의 생각과 훤한 불빛 아래 “새 떼들이 놀다 간다.”의 의미에서 시인의 정신 구조를 파악할 수가 있다. {2. 시 의식의 파노라마} 1) 비움과 채움의 허무 자기를 비웠기 때문에 기다리고, 비움에서 미래는 숨을 쉬게 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한계를 알고 난 후에 허무라는 의복에 대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는 예수의 허무나 공자의 천상(川上)의 탄식 등은 본질에 눈을 돌리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색증시공의 지혜- 반아 –진리의 이름앞에서는 비움과 채움이나 없음이나 있음 등 현대 물리학의 문제가 쉽게 풀리는 것이다. 물론 지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감득하게 함으로써 감동과 순수 그 자체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챙기지 마라 원래 내 것이었던 것 하나도 없다. 가져가게 두어라. 집어갈 것 있으면 잘 산 것이고 줄 수 있을 때가 행복한 법인 것을 버릴 것 있으면 버려라 덜 버린 것 찾아 새 떼들 날아들면 그것도 행복인 것을 버린 것 그리워하지 말고 빈 마음이라 채워라 <빈 들녘> 중 비워 있음이나 채워있음은 다만 그대로의 현상일뿐이다. 교실은 비워 있기 때문에 채움이 있고 수레는 비웠음의 바퀴 때문에 무게를 감당할 수 있다고 노자는 말한다. “빈 들녘”이 허무라면 채움이 지난 뒤에 나오는 의미일 것이지만, 큰 개념에서는 결국 의미와 무의미가 교차하는 우주의 본질일 뿐이다. 이 교차의 왕래에서 인간은 다만 오고 가는 길을 바라보는 혹은 추체험으로 지나가는 존재- 이런 명상적인 현상을 느끼는 인간의 모습이 아름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것이 없음”에서 내 것을 주장하는 것은 허무한 일이고 이기(利己)의 처연(凄然)함이라면 시인은 줄 수 있을 때, 주는 것은 행복의 정점이 될 수 있음을 체득하고 있다. 이는 삶의 달관자의 의해 발성할 수 있는 음성이다. 결국 버린 것은 채우는 일이고 채우는 것을 줄 수 있을 때의 행복- 시혜(施惠)의 즐거움을 얻는 길을 주장- 비움의 가벼움이 아니라 오히려 채움이 되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다 벗어 버리고 다 털어냈다 남은 볏짚으로 부끄러운 데 대충 가리고 그냥 아무 감정 없는 척 살 생각이다. -중략- <겨울 논> 중 발가벗음은 우주 삼라만상의 본질이다. 그러나 가리고 위장함으로써 단순성이 복잡으로 변했고 과학이라는 이름에서 처절한 자기 위장에 슬픔을 쌓게 되었다면 “다 벗어 버리고 다 털어냈다” 의 가벼움은 자기와 만나는 진솔함이고 이런 진실에 다가가면 감동이 일렁이게 된다. 순수란 시의 본질이고 시가 순수의 이름일 때 감동의 누선(淚腺)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어른들이 색깔이 좋다. 혹은 무늬가 좋다느니의 찬탄으로 위장할 때 “임금님이 벌거 벗었네”의 우화는 그대로 아이의 마음이 바로 어린애의 눈과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시인이 되는 것= 김수자의 마음에는 순수의 강물이 흐르고 있음에서 “아무 감정 없는 척”- 무념무상의 모습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다. 물론 “없는 척”이 다소 걸리는 표현이지만. 2) 사는 법 길 찾기 살아있는 자는 길을 가는 방법이 선택되기 때문에 어떻게 목적지에 이를 것인가의 대한 자기만의 방법이 적용되면서 삶의 도정을 이어가게 된다. 어떤 사람은 명료하게 혹은 애매하게 등등 선택의 여지는 개성과 환경이 복합되어 한 사람 삶의 모습이 투영된다. 시는 시인의 정서를 고백하지만 그 방법은 시적 장치에 의해 위장하는 절차로 나타나기에 그 껍질을 벗기면 시인의 모습이 나타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이파리는 가시를 만들고 가슴 적셔 줄 물이 없어 차라리 몸이 타들어 가도 약한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강한 척 내심 그리운 것 많아 아닌 척 자존감 그 힘으로 산다. 선인장처럼 산다. 바보처럼 말이야. <가시 선인장> 중 가시 선인장에 접근의 용이성이 아닌 이유는 “가시”를 내보이는 것과 “물”이 없지만 갈증의 내색을 보이지 않고 강한 척하는 몸짓의 슬픔과 그리운 갈망이 많지만 그런 모습이 혹여 “자존감”을 상실한 모습으로 투영될까 조바심을 나타내고 있다. 결국 “가시 선인장처럼 산다”는 평가를 “바보처럼 말이야.” 와 등가를 이루는 대입은 스스로 불러들인 광장의 고독 같은 인상이다. “강한 척”의 행위는 자기 변호의 논리를 갖추어야 하는 부담이 따라나서는 서글픔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3) 사랑이란 그 미지수} 사랑이라는 말에는 이성간의 관계를 넘어 헌신의 아가페적인 넓이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종교는 사랑을 말하고 시는 순수의 진리를 말하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M.A moid는 말했다. 인간은 죽는다는 필연의 법칙을 지혜로 터득했기 때문에 죽음 앞에 더넓은 사랑의 이상을 설정하고 고지를 향해 자기를 희생하는 헌신은 인간이 지고함에 이르고자 하는 사랑의 목표일 것이다. 이성 간의 사랑이나 종교적인 사랑이나 사랑은 단순하다. 진리는 복잡을 단순으로 처리 하는 데서 나오는 이름이라면 사랑도 그 자체의 단순함에 벗어나서는 안되기에- 꾸밈은 이미 순수를 일탈한 사고이기 때문이다. 돌이키기 어려울 때 사랑이 다시 든 후에 그 때서 알면 안 되리라 세상일 힘들어 깊은 통증을 느끼기 전에 사랑이 모자라 슬픈 운명 되기 전에 힘껏 힘껏 사랑해야 하리라 가슴 밑바닥에 남모르게 숨긴 가는 인연의 끈 그마저 사라지기 전에 제대로 사랑해야 하리라 사랑 그 질긴 운명을 위하여 <질긴 사랑> 중 사랑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 비우면 비울수록 충만으로 가득해지는 이치에서 진실한 사랑은 문패를 달게 되는 것이다. 이기와 질투 혹은 자기 것을 고집하는 허위 앞에서 사랑은 이미 이름을 버리고 달아나기 때문에 인연의 소중함- 헌신의 의미를 내면으로 알게된다. 더구나 인연이라는 줄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사랑의 헌신이 주는 행복을 아는 일이 보다 고귀한 행위의 뜻일 것이다. 사랑은 이심전심- 동양에서는 원래 말이 아니고 마음의 전달이라면 서양은 사랑을 날마다 혹은 순간마다 확인하고 증명하는 점에서 신체 접촉이나 사랑한다는 말로 끓임 없이 증명하는 방법이고, 동양은 증명이 아니고 다만 눈으로 마음으로 – 이심전심이나 심상상인의 방법에 서 정적(靜的)이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알고 무슨 말을 해도 이해가 되고 맘속의 말도 다 들을 수 있는 것 가진 것 다 주다 못해 마음속까지 주고도 아깝지 않고 받을 계산도 하지도 않고 줄 것이 더 없는 것만 아쉬운 것 그런 것이 사랑이지 <사랑> 중 스탕달의 {연에론]에 생리적인 연애가 서구적인 방법이라면 동양은 플라토닉 러브에 가까운 거리에서 사랑이 잉태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니 서양은 접촉에서 시작하고 동양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은근미를 우선시 하기 때문이다. 이는 관념의 차이요. 생활의 축척된 방법에서 오는 것이지 어느 것이 우선한다는 발상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사랑은 오랜 관습과 시간이 경과한 뒤에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아가페적인 헌신에서 참된 사랑이 탄생되는 것이다. “가진 것 다 주고 주다 못해” 더 줄 것이 없어 애타는 마음은 순수요. 깨끗함이고 질박함이다. 사랑은 지위나 명예 혹은 자랑이 아닌 다만 주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자발성의 이름이기에 참된 사랑은 마음 속에서 끝없이 나오는 투명한 애너지의 이름이다. 김수자의 시는 사랑의 이름에 가장 헌신적이고 열정을 투척하고 있음은 일상에서 그런 체험의 가치를 아는 데서 나온 모습으로 보인다. [3. 에필로그<나가면서>] 시는 인간의 상상력이 변용을 거칠 때, 화려한 변신을 맞게 된다. “나를 나은 여자”가 어머니라는 정의나, 수소와 산소의 화학적인 결합물인 액체를 물이라고 설명하는 사전적 의미에는 삭막한 느낌이 오지만 그러나 시적인 어머니나 물에서는 기쁨과 자애를 느끼는 것이 시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는 삶의 윤활류요 생의 의미를 화려하게 꾸미는 역할이 시의 효능이다. 화학적인 변화에서는 전혀 다른 현상이 도래 하기 때문에 감동이 물길을 내는 이치처럼 시는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임무- 시인은 이런 임무에 헌신하는 사람인 것이다. 독자는 이 같은 감동의 물길을 따라가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나 더 큰 세계와 조우(遭遇)하는 것이다. 이같이 시인의 시에는 자기 표정과 허무의 의미가 자리하고 그 길을 따라 가면서 순수와 투명한 손짓에 감동을 맡기면 예술혼의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다. 비움에서 채움의 원리를 터득했고 이는 상징과 이미지의 손짓에 삽상하고 따스함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해지는 느낌이다. 삶의 문제를 천착(穿鑿)하는 시인의 노력은 항상 긴장과 신념의 불을 켜고 내일로 다리를 놓으려는 발상으로 땀을 흘린다. 이 같은 순리에 우선하면서 기다림의 눈빛이 선명하다. 사라을 숙고하는 김수자의 시는 헌신과 아가페적인 넓이에 자유정신이 숨쉬고 있어 따스하다. 아울러 인연의 소중함을 신념으로 앞세우고 자연의 이치를 시에 수용하며 섭리를 따르는 시인의 모습에 찬사를 보낸다. 이 모두를 하나로 결합하면 시는 변증법의 기법으로 안내의 길을 내는 인도자의 모습이 아름답고 고귀하다고 느끼면서 나가려 한다. 2023. 04. 19. 대중문화평론가/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시평집 [시의 숲에 빠지다] {최신작}.] [출판사 리뷰] [이천 설봉공원 벗꽃 축제에서]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1> 시는 과학이라는 논지도 있고 시는 과학이 아니라 먼 거리에 있는 애매성(曖昧性)원리가 작동한다는 논지도 있다. 시평을 하는 선배는 행과 연을 나열하는 의식의 표현이 아니라 의식을 정치(情致)하게 또는 정확한 논리적 구축을 가졌을 때, 비로소 시의 품위를 나타낼 수 있고, 시가 필요로 하는 여백의 함축미라 하는 선배도 있다. 즉 응축에서 많은 이미지를 내포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라는 것은 언어의 사용에 정확한 운용(運用)이 필요하며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이 확고하면서도 유연미를 갖추었을 때, 비로소 시는 감동의 절차를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시는 결코 액자 속의 사진과 같은 정물화적인 대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과 같은 감동을 주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시의 특성이 수용되어야 한다는 논지이다. 정치도 살아있는 생물이라 하듯이 살아있다는 것은 변화를 주도하고 그 변화 앞에 자신의 정체성을 지킬 줄 아는 방법이 그 나름대로 내재 되었기에 생명을 신비와 운용의 바람을 넣을 수 있으며 개성을 살리는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시는 살아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일정한 표정을 나타내고 또 표정을 관리하는 주체적인 개성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도정(道程)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시를 한가지로 정할 수 없음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한마디로 나타낼 수 없는 이치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인간에 의해 표현하는 인간이 표현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는 철학의 이미지를 내포하는 이치가 있고 인간을 탐구하고 나타내는 시의 자유가 도출되기 때문이다. 시에는 인간의 삶이 있고 애환이 시적으로 포장되기 때문이며 시를 아름답게 포장을 해야 하며 종이 등으로 포장하는 것과는 개념이 다르기에 어떻게 고착화 시키느냐의 따라 이치가 차이나기 때문이다. 이는 시적인 기교이면서 감동을 생산하는 이유가 있기에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다. 시에는 계절이 표현되고 대칭적 사랑이라는 논지가 필수이며 가족, 모성, 등 다양한 사물을 분해하고 정서를 만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2> 의식의 흔적 찾기 Personality는 다른 사람에게 독특한 특징으로 보이는 한 개체의 모든 인간적, 감정적, 의지적인 그리고 신체적인 특성의 통합된 체계를 말한다고 심리학에서는 지적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이런 특징적인 흐름이 일정한 지주(支柱)를 이루면서 삶을 형성하고 지속 되는 바 이를 개인적, 사적인 특색으로 지칭하게 된다는 점이다. Allport는 환경에 대한 독자적인 적응을 규정하는 심리 즉 한 개체의 내부에 속하는 생리체계의 역동적 체계라는 말로 정리를 했다. 여기에는 자아와 초자아를 구분 짓게 만드는 모태인 id와 ego와 suqer ego등 복잡한 의식 체계는 결국 한 개체의 정신적인 흐름으로 결정된다. 모든 의식은 personality를 이루는 요소로 작용한다. 또한 모든 시는 자아와 초자아 이드 등의 사이사이를 왕래하면서 삶의 감수성과 의식을 나타내는 생명의 소리에 특징이 특징이 포함되어 발언한다. 1) 사랑의 의식 많은 시에서 사랑은 가장 많은 소재로 작용했다면 사랑은 결국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공통의 관심사이거나 풀어낼 수 없는 문제와 해답 사이에 가로놓인 대상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김숙자의 시에서는 사랑이라는 암시- 비단 남녀의 관계에서 느끼는 감성이 아닌 타인과의 정감 또는 남편 아니면 자식과 주고 받는 정감의 모든일들이 사랑이라는 명칭에 포괄되는 인상이 너무도 짙다. 어여쁜 꽃잎 사이로 사르락 젖어드는 이슬같은 사랑 하나 영롱한 이슬 꿈같은 사랑을 노래하네 벙그러지는 꽃잎 사이로 아스라한 꽃잎 만들며 가장 고운 미소로 아름다운 미소 보낸다 청아한 하늘에 두둥실 구름도 너무도 예쁜 사랑에 더욱 눈부시게 비추고 끝없는 메아리 되어 들리는 사랑 노래 하나 영롱한 이슬에 힘입어 빛을 내는 사랑은 누군가를 위해 먼 길을 여행하며 피어나는 제일 아름다운 사랑의 꽃이구려 <사랑의 의식> 사랑에 비밀은 누구나 갖고 있는 열쇠가 아닐까? 비록 그 열쇠를 열고 내부로 들어가면 죽음으로 끝나는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사랑도 있을 것이며 춘향과 이도령의 행복한 결말로 마무리되는 사랑도 있을 것이다. 어느 사랑이든 사랑의 이름 앞에 설렘과 아픔 혹은 행복하고 기쁜 추억들이 간직되었기에 사랑은 보편성으로 이해되는 지근거리에의 이름일 것이다. 김시인은 사랑의 개념을 “꿈”과 “추억” 그리고 미소로 “보내는 행위”를 나타낸다. 여기서 찾아오고, 가져오는 이기적인 개념이 아니라 주는 것으로 또는 받음에서 느끼는 행복의 중심을 찾아가는 모습이라는 점이 특색이다. 그리고 사랑의 이름이 들리는 것을 하늘의 소리에 비유함으로써 “사랑 노래하나”는 전체를 하나로 통합하는 길, 행복에 접근하는 모습이 되면서 “누군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려는 헌신의 개념을 만나게 된다. 참된 사랑은 이기적이 아니라 보내는 혹은 바치는 헌신이 될 때, 비로소 참된 사랑의 이름에 다가갈 수 있기에 고귀한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 같다. 머릿속 각인된 목소리 당신이 준 사랑을 호흡하며 둘이 만든 사랑은 행복인가요 부드럽게 속삭이는 밀어는 가슴을 가만히 쓸어주는 다정함 포근함입니다. 둘만의 정원을 만들어준 임 눈을 뜨면 곁에서 은은한 향을 전해주는 그윽함에 사랑을 먹습니다. 나목도 아름답게 보이고 외로운 가로등도 정겨운 것은 행복해지는 사랑입니다. <하나의 사랑>중에서 정말 사랑은 둘이 만들기 때문에 빛= 행복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짝사랑도 있겠지만- 아울러 행복이라는 느낌을 생산할 수 있고, 다정함을 느끼는 에너지의 파동은 더 큰 사랑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둘만의 정원에서”에서 느끼면서 감상하는 향기에 취하는 절차가 수행되는 것이다. 이런 향기에 젖을 수 있음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밝아지고 영롱하다. 심지어 나목도 그렇고 외로움으로 다가오는 가로등조차 정으로 채워지는 의식은 바로 사랑이라는 정서에 감염되었기에 아름다움으로 눈이 떠지고 환상의 세계와 접촉하며 승화되는 것이다. 행복은 이런 무의식이 가져오는 세계- 사랑의 위대한 옷을 입은 자가 느끼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김시인의 사랑은 하나가 아닌 둘이 결합하는 우주의 원리를 인간에 결합하는 계산법인 것이다. 사랑하는 친구야 앞만 바라보고 열심히 달려온 우리들 우리 이제는 얼마나 산다고 아등바등 살아가는가 아픔도 많고 어려운 일들도 많았지만 이제 우리 모두 웃음으로 날려버릴 친구들의 가슴이 있지 않는가! <친구>중 인간이 살다보면 고독은 인간의 숙명인 것이다. 이럴 때 친구는 발을 맟출 수 있는 대상이면서 생의 의미를 공유하고 나누는 이름으로써, 친구는 가장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름이기에 우정은 더욱 귀중한 가치를 갖는 것이다. 사랑도 친구로 시작하고 삶도 친구로 정감을 나눌 때부터 세상은 따스하고 다정한 공간으로 화할 수 있기에 우정에 갈증을 갖는 이유가 된다. 추억을 만들고 세상의 종막이 올 때까지 발길을 함께 하려는 김 시인의 마음은 따스하기 때문에 더욱 따스한 그리움을 우정으로 포장하려는 의도에 머물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3> 에필로그 하면서 시인의 시적 무드는 안온하고 따스하다. 봄의 향기 짙은 꽃을 피우려는 발심에서 노력의 얼굴이 크로스 업 되고, 순수한 마음에서 꿈과 희망을 간직하려는 일면과 사랑의 마음이 시(詩) 전반을 장악하는 원천이 되는 듯하다. 상징의 숲에 들어 있는 요소들로 보이며 이동의 메신저이면서 사물과 사물을 연결하는 생명의 원천 의식을 뜻한다. 아울러 가족은 시인의 오늘의 표정을 확인하는 징표가 되면서 내일로 가는 에너지를 저장한 공간으로 다가온다. “동반자” “어머니” “바다” “봄비” 등 이 모든 의미를 포괄하는 이미지들은 곧 시인의 시에 간직된 밝은 표정에 들어 있는 미소와 같다. 아마도 남다른 시인의 특색을 보면서 더욱 기대가 되는 것 같이 생각을 하며 나가려한다. 2023. 04.18. 대중문화평론가/금요저널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시평집 2주 베스트
by 수원본부장 손옥자1>소요의 여행 사는일은 모두가 여행하는 길일 것이다. 그렇다고 뚜렷한 목적지가 있는 일상의 여행이 있는가 하면 미지의 공간으로 무작정 떠나는 여행도 있을 것이다. 전자에는 목적지의 방향이 설정되어 있지만 후자에는 확실한 장소가 없이 떠나는 어둠의 여행일지 모른다. 인간은 어짜피 살아가는 일이 여행인 것은 분명하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의 삶의 길을 떠나는 여행은 태어나서 마지막 공간에 이를 때까지 생의 길은 굴곡과 시련을 지나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는 끝 모를 방황이 여정(旅程)으로 설정된다. 이는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길이 아닐까? 시는 언제나 삶의 길에 대한 표현이 된다. 아름답게 노래하는 경우도 있고, 악착(齷齪)한 삶의 괴로움을 버티는 인내의 노래도 있지만, 더러는 기쁨과 행복에 대한 환희의 가락도 있다. 어느것을 선택하든 자기의 삶에 대한 한계를 갖고 표현에 집중하게 된다. 물론 시인마다 삶의 태도에는 일정한 규격화가 아니라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갖고 시화(詩化)의 길을 걷기 때문에 저마다 다른 표현의 맛을 구가하게 된다. 이를 시를 읽는 이유는 이런 맛깔스런 개성의 감상이기 때문에 저마다 다른 세계의 지향(志向)에 감동을 보내게 된다. 사실 도시에 사는 사람의 정서와 전원에서 사는 사람의 정서가 시로 나타내는 표현은 확실히 다른 듯하다. 왜 그런가 하니 환경의 영향이 시로 흡수되는 과정이 표현의 묘미에서는 다르게 나타난다는 뜻이다. 자연은 인간의 본질이고 이 자연을 어떻게 육화하여 표현하는가는 흡수되는 환경의 결과에 따른 시적 표정- 도시는 메마른 상상의 기저가 중심이 된다면, 전원에서는 생산된 시는 물기 있는 상상의 흡수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필자의 시는 어떤 시일까? 의문이다. 2> 은유의 길 건너기 시는 비유일 뿐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의 특성은 응축(凝縮)이라는 줄임의 미학일 때, 그 전개의 방식은 산문과는 확연히 달리 가지치기의 군말을 버리고 오로지 줄기만을 위한 표현의 미학은 곧 비유의 방도로 이미지 뼈를 어떻게 산뜻하게 건져 올리는가의 방법에 시인 재능이 귀속되는 것이다. 늘이고 펴는 일은 산문의 서술(敍述)기법이라면 시는 이런 방법과는 정 반대의 방향에서 함축(含蓄)의 여백을 갖는 일이 우선 시 된다. 동양화의 여백의 미학은 서양화의 논리의 구축과는 다르다. 왜 그런가 하면 서양화는 칠하고 다시 닷칠하고의 기교에 여백을 갖지 않는 채움의 정치(精緻)조력을 받아서 풍경을 그리는 화가의 정신 표현이라면, 시는 이와는 달리 여백과 함축을 방도(方途)로 독자에게 의미를 전달해주는 고급한 여유를 갖는 비유가 성립된다. 때문에 시는 여타 산문의 어떤 것보다 어렵고 지난(至難)한 기교를 갖는 첫째 방도가 비유의 도구를 앞장 세우는 일이다. 물론 시적 전개의 장치에는 리듬과 이미지, 비유 그리고 상징이나 인유 그리고 패러디 등 다양한 구조적인 내포(內包)가 있을 때 풍윤한 표현의 길이 넓어지는 것에서 고급화의 방도- 시인은 결국 자기 정신의 고급화를 지향하는 예술논의 중심에 자기 정신의 의도(意圖)를 세우는 일이 언어 기교로 나타는 바, 이는 언어운용의 응축이라는 절차가 가장 먼저 등장하게 된다. 언어 감각은 생동감 있고 온화한 내면의 기품이 담담한 것을 풀어내는 기교가 신선함을 주는 것을 당연한 것이라 본다. 겨울과 봄 사이 봄 눈 녹듯 메마른 둥지 헤치고 이곳 저곳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간지러움 긁으면 긁을수록 더욱 가려운, 아으, 미치고 환장할 가려움이여 <겨울과 봄 사이> 중 사실 겨울이란 삭막하고 모든 물상이 잠들어 조용한 이미지로 정리될 수 있다. 그러나 어둠의 겨울에서 점차 여명의 봄날로 다가들수록 “이곳 저곳”이 스멀 거리면서 살아나는 신비가 “간지러움”으로 생동감을 부추긴다. 이런 표현의 묘미는 결국 리얼한 표현의 여운을 대동하면서 시가 갖는 여백의 미학이 감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위 글의 비유의 신선함은 마무리에 “아으” 미치고 환장할 “가려움”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비 시적인 언어일지 모른다. 그러나 적절함을 기준자로 한다면 “아으” “미치고 환장할 가려움”은 그야말로 시의 화룡정점의 역할을 수행하는 시어가 된다. 독목(禿木)의 앙상한 나무들과 겨울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에서 스멀스멀 솟아 나오는 부스럼딱지같은 여기 저기의 “선연한 눈빛”의 생명체를 바라보는 모양- 시인의 가슴을- 시인의 가슴을 적시는 생명의 보임은 찬탄을 불러 온다. 다시 한번 예를 들어 본다. 앞산이 서운산이 각혈하는 어느 소리꾼의 득음인 양 긴 여운을 담아 오늘 아침 초대장을 보내 왔다 그리고 산을 안고 오는 각혈을 품으란다. 웅장한 소리꾼의 각혈을 그리란다. <가을 풍경> 가을의 깊이로 접어드는 풍광의 리얼함이 눈에 보이는 듯 “각혈”하는 소리꾼“의 비유가 강력하고 적절하며 상상의 여정을 초청하는 역활을 다하는 모습에서 아주 심오한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각혈은 소리꾼의 길고 멀고 닦은 세월의 흔적이며 수행의 결과물이 완성된다. 득음(得音)으로 이어지는 길이면서 소리꾼의 존재가 빛나는 이름으로 환치되는 상상이 마무리되는 뜻 일게다. 완성의 표정을 시인에게 그리라고 하는 초청장에서 과정의 깊이를 상상하면서 각혈을 시인이 직접 표현하라는 것은 독자에게 펼쳐지는 것이기에 시의 맛깔이 나는 듯하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의 함축의 묘미를 여백의 무궁한 깊이를 제공하여 재능을 보는 것 같아 심히 즐겁다. <2>의미의 전개와 플라톤의 변증법 모든 사물에는 의미가 있어 존재하는 실물과 접하는 길이 만들어진다. 소설의 이야기 전개는 구조를 통해 그리지만 시는 이미지로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으로 전해진다. 의미는 곧 소설의 구조와 상통하지만 시의 의미는 결코 앞장서서 깃발을 흔드는 직접적인 방법이 아니라 감추고 숙이면서 드러내는 은근미의 속살을 보여주는 이름이어야 한다. 우회하지만 결코 멀리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쉽게 또는 가까운 곳에서 비유의 의상(衣裳)을 걸치고 화려하게 혹은 고담(枯淡)한 정서의 깊이가 살아있는 것 같은 신선미가 전재되어야 한다. 시어의 선택에 어려움은 이런 조건들이 결코 정석이 없는 시인만의 뇌수(腦髓)에서 발원하는 맑음이어야 한다. 이는 미적 경험과 상상력이 결합하여 표현되는 과정에서 시인의 숨은 기교가 발휘되는 특성을 뜻한다. 결국 의미는 감동의 일차적인 관문이고 이 관문을 지나면서 삽상(颯爽)한 기운을 대동하는 데서 의미의 신선감은 감동의 누선(淚腺)을 자극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온몸으로 밤을 노래하는 너 홀연히 들어 날 아득한 세상 별 자리로 이끌며 새벽을 낳는가 왜 그리 호젓한 음악을 틀어 놓는가 무엇이 안타까워 무엇이 외로워 이슬 맞으며 노래를 부르는 너 함께 노래를 부르자꾸나 <한 밤의 귀뚜라미 노래>중 ‘온몸으로’의 이미지가 중요하다. 이 과정을 지나면 비로소 고진감래(苦盡甘來)의 교훈이 자기화가 되기 때문에 신기한 ‘새벽을 낳는가’라는 탄성이 나올 수 있는 여백이 담겨진다. 이는 시적인 안정감 즉 시인의 정서 균형이 평형을 유지하는 건강성으로 해석되는 부분이다. 예술의 미학에서 이른바 개념에 알맞게 이룩된 형태는 현실성으로서의 이상(理想)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된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일정한 사물에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시에는 비유로 시인의 마음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될 때, 자신 속에 또 다른 자신을 그림으로 그리는 역할이 수행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결국 이런 자기 표현의 그림이 비유와 상상의 결합으로 형태화되는 과정이 수립되는 결말이 감동으로 정리 된다는 뜻이다 <3> 갈증과 물의 변증법 시는 자연의 이치와 등가(等價)를 이룰 때, 합리성을 갖는바, 세상의 진리와 상통하게 되는 것이다. 합리라는 의미는 상식과 같고 이 상식은 인간이 정한 오랜 도덕적 기준이다. 물론 이 기준은 불변성이 아니라 가변성의 진리이다. 언제나 변할 수 있고 또 변화할 수 있는 여지를 갑고 있는 기준이라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 자체가 절대의 논리에 갇힌 존재가 아니고 때에 따라 변하는 일이 당연지사라는 뜻이다. 그러나 갈증에는 물이 필요하고 목마름을 채우면 이내 또다른 공간의 욕망이 발동될 때, 새로운 경지가 나타나고 이로부터 인간의 역사는 또 다른 영역의 변화가 진행형이 된다. 그렇다면 갈증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 것인가? 살아있기 때문에 요구가 일어나고 갈증은 물의 부족을 요구하는 생리적인 현상이지만 존재 자체의 표현이라는 뜻이다. 왜 그런가 하면 생체는 순환의 기운이 있고 이런 요구에 부족 현상이 발생하면 갈증의 농도가 도(度)를 높이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어둠이 태풍처럼 몰려와 거대한 몸 짓으로 위협하지만 지극히 작은 촟불 하나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빛의 그림자일 뿐 헛것에 넋 나가 탕진한 젊음이다. 어떻게 살아갈 할 것인가는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를 화두처럼 붙잡고 습한 음지 굼뱅이처럼 붙잡고 새어 나오는 신음소리 숨죽여 견뎌온 어둠의 시간들 닿지 못할 먼- 별 꿈꾸며 뜬눈으로 밤새는 목마른 동물이다. <어둠의 빛> 중 어둠은 빛을 낳는 모태로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인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면 ‘지극히 작은 촞불 하나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어둠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운명은 어둠이 포장되었기 때문에 빛을 향하는 행동이 다음 단계의 진전을 예약하는 것이다.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뚫고 벗어나려는 의지의 물살을 일으킬 때, 비로소 새로운 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둠의 상징인 동굴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와 별을 꿈꾸는 ‘목마른 동물’ 로 갈증의 늪을 벗어나는 길이 보인다. 고난의 상징인 얼음장의 아래로는 소리로 환생하는 흐름에서 절망을 탈출하는 시인의 마음이 밝아지는 듯하다. 이는 곧 춘봄을 암사하는 것 같다. <4>산뜻한 자연의 시 에필로그 시라는 것은 시인의 정서가 감수성의 표정이라 하겠다. 어떤 정서가 주류를 이루는가는 그의 삶이 뒷받침될 때, 시의 표정으로 말하게 된다. 시는 순수의 정서가 온화하고 질박(質朴)하다. 이는 시인의 마음이 시어로 포착되는 심성의 이유도 있지만 청량한 자연의 요소가 바탕을 이루면서 더불어 시인의 마음을 이끌고 있는 풍광이 한몫 거드는 요소도 부인할 수 없겠다. 생동하는 은유의 숲속을 거니는 신선미와 어둠에서 빛을 추구하는 생명 약동이 의미를 생산하고, 물의 요소가 많은 것도 자연의 도움으로 일어서는 시심의 흥취(興趣)라는 생각인 듯하다 특히 풍경을 만들면서 여기에 소리의 개입이라는 시를 찾고 사는 독특한 득의(得意)로움 같아서 기분 좋은 마음으로 에필로그 한다. 2023. 04. 13. 대중문화평론가/금요저널주필/이승섭시인 [그대들은 시의 맛을 아는가?] [이승섭 대중문화평론가의 베스트셀러 모음 ] [이천 설봉공원]
by 수원본부장 손옥자[안성 고삼 호수 필자 이승섭평론가의 관조시간] 시는 다가오는 것인지 아니면 찾아가는 것인가? 이 물음에는 쉽게 답안을 마련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이라는 사람의 특성과 표현된 시의 특성은 연결 고리가 맺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운명을 예언하는 사람은 일반적인 사람과는 다른 개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쪽 방면에서는 독특한 지위를 부여받게 된다. 이처럼 시인은 남다른 예지와 감수성이 시적인 열정과 복합될 때 범부(凡夫)와는 다른 감정의 촉수와 예지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시인이 아닌가 한다. 즉 사물을 대하면 일반인이 느끼지 못하는 감흥을 불러올 수 있는 예민한 감성이 있을 때 사물을 살아나게 하는 노래를 만든다. 여기서 시가 시인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과정이 다가오는 것과 찾아가는 접점(接點)을 가질 때 비로소 한 편의 시는 탄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에 대한 열정 혹은 열망을 유난히 가질 수 있을 때, 시인의 업적은 시의 숫자와 비례하게 된다. 물론 시의 성격은 시인의 개성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 개성의 시는 곧 독자에 의해 선택이 되는 것이지만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생명으로써 세상의 파문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는 산문과는 다르다. 우주를 감득(感得)하거나 세상을 예언하는 기능조차 포함되어 있을 때 시의 에너지는 폭발력을 가질 수 있으며 또 재미를 넘는 감동의 물살이 일렁이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평화로우면 장식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위기에서 예언의 역할을 한 선대 시인들의 예에서 보듯이 시인은 시대를 살고 시대 앞에 몸을 던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한용운 선생이 그렇고 이육사가 그렇고 윤동주 선생이 그렇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가 중 시인은 있어도 소설가가 없는 이유는 그런 설명을 보충하는 예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시는 정신의 순수한 응축이라 할 것이다. 그럼 이길선 시인의 정신적, 정서적 여정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2. 의식의 표정과 언어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숙명이며 삼라만상 우주의 진리이다. 왜냐하면 선택을 할 수도 없는 것이며 조종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고 정해진 질서에서 받아드리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곧 삶의 일이 전개되며 변화하고 또는 추락하는 일들이 반복 되면서 일생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살아가는 일은 종국에는 자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 하거나 아니면 타의에 의해 실려 변화를 감수하는 슬픔 기쁨 등을 안고 길을 가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든 생의 문제는 고달프고 또 서러운 일이 인생을 살면서 늘 교차를 만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3. 의식의 전개도 시인에게 오늘은 거칠고 황량한 삶의 현장을 경험하는 공간이다. 신산한 고통이 따라붙고 아픔에 신음하는 일이나, 할 수 있는 일이나 없는 일을 구분하는 일들이 줄지어 다가오는 데서 삶의 여유가 차임을 당하는 공간 자기를 곧추세우면서 삶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매우 지난(至難)한 일이기 때문에 시인은 같은 아수라의 공간을 미감(美感)으로 바꾸는 기교를 통해서 상상력의 여행을 떠나려 하는 것이다. 모든 역경과 고난은 결국 역설적으로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창을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인의 개성을 획득하는 자유 정신의 표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거친 숨 몰아쉬며 하늘을 향한 긴 코에서 내뿜는 독기 심호흡과 함께 벗어던진 몸체는 시뻘건 노기가 들끓고 있다. <난로> 중 시는 표현 대상과 시인의 의식과 하나로 일체화를 꿈꾸는 작업이기에 전혀 다른 속성을 만드는 작업이 바로 화학적 결합의 일체화이다. 이는 시적 장치인 비유나 역설, 아이러니, 직유, 은유, 등의 장치를 가동하여 시인의 재능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사실 이런 논지를 앞세우면 ‘난로’는 곧 시적 화자인 시인으로 환치하는 것이다. 난로의 노기(怒氣)는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기 때문에 ‘거친 숨’ ‘독기’ ‘시뻘건 노기’는 곧 현실에 대한 거부의 몸짓이고 그런 의미를 내장한 시인의 마음이 투영된 시가 된다. 지금 정지된 아라비아 숫자 전설의 손짓이 안개처럼 흐르는 동그란 거울을 닦고 있다. 그 싱싱한 빛을 위해 닦고 있다. <갈대> 중 정지된 개념 위에 거울을 닦는 열성으로 자아를 들여다보기 위해 나르시스의 모습이 보인다. 이 슬픔은 곧 자기애에 대한 성찰이면서 고민이 된다. 이는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인지능력이 있기에 자기 찾기의 방황이 될 수 있다. 이길선 시인은 이러한 물음표에 이은 대답은 오리무중이고 헤매는 갈증은 더욱 차오르는 느낌이지만 안개가 가린 방황 앞에서도 ‘그 싱싱한 빛을 닦기 위해 닦고 있다’ 는 신념이 표백될 때, 현실은 바로 닦음에서 빛을 추구하는 행동에 희망을 심는 듯하다. 어린 시절 벌어진 알밤 터지는 소리와 할머니 동화는 몇 소절이나 부풀어 올라 소소히 꿈으로 여물었는데 고향 땅 멀리서 생각의 노를 저으면 슬픔인 듯 기쁨인 듯 뻐꾸기 울음소리가 마음을 휘젓고 있다. <고향 그리움> 중 4. 추억 속으로 한스 마이어호프는 시간적 조망(眺望)은 영원한 현재(erernal now)로 축소되었다고 말했다. 더구나 서정시의 시제는 언제나 현재를 벗어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의 정의가 응축(凝縮)이라는 특성에서 설명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 현재, 미래는 시에서 항상 자리를 잡아 때로는 모호성(ambiguity) 속에 처리된다. 과거는 추억의 장면을 유기적인 맥락에서 오늘과 연결이 되지만 여기로 돌아가려 할 때는 애잔함을 부추기는 정신 줄기의 성격을 갖고 있기에 다소 소극적인 성품의 시인은 고향이나 육친에서의 정감을 그리워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묵었던 세월의 때가 밀리고 그 안에서 굴렁쇠 굴러가는 소리가 가벼이 소달구지 실려온다 <창가> 중 3편의 시에 담은 정서는 어린 날의 추억이 파노라마로 전개되는 것이다. 이길선 시인은 어른이 된 오늘에 관심의 집중이 어린 날로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의문이지만 이는 체험의 단편 혹은 분리화란 말로 설명이 가능하겠다. 체험을 다양성의 결핍이거나 사고의 집중에서 오는 현상이기 때문에 어린 날의 기억에 선명화의 길을 넓히는 것이다. 이는 순진하거나 순수를 지속하고 싶은 갈망일 것 같다. 이는 시인의 마음에 샘물 같은 작용을 하고 있다. 퍼내도 퍼내도 감로수의 기억으로 풀려오는 추억은 생에 이름에 윤이 나는 활력소의 역할을 하게 되는 이유가 내장된 것은 아닐까 한다. 5. 에필로그 정갈하고 깨끗한 시를 만나면 누구나 행복해질 것이다. 더구나 순수와 순진무구한 표정의 사람을 보면 행복에 감염되는 감동의 아름다움이 된다. 장미 향을 맡으면 장미의 얼굴이 되고, 푸른 하늘을 담으면 푸른 그리움이 얼굴이 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고 시인들의 심리이기에 시를 읽고 좋아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시인의 시는 투명하고 소박하고 정신의 줄기인 것이다. 때 묻음이 없는 공간에서 그의 시심은 가슴을 적시는 산골 물소리 같은 청량감에 젖을 때 우리 시 문학이 더욱 공존하고 넓이와 깊이에 도달하는 풍경화를 만나는 것이 시인의 시적 특색인 모양이다. 1 편의 시에 숙연하고 정갈할 수 있는 것은 시에 함축된 의미의 탄력에서 가능하다면 시의 가치는 더 없는 지고의 이름이 될 것이다. 이길선의 시가 추억의 기억을 깨울 수 있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긍정 정신 줄기가 토해놓는 이미지에서 언어 탄력을 생성하는 이유이자 원인이 되지 않을까 하면서 마무리를 하련다 2023. 04. 11. 대중문화평론가/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시평집 [시의 숲에 빠지다] {최신작}.] [대중문화평론가 이승섭의 저서] [이천 설봉공원 벗꽃 사색(2023.04.04)]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인간에겐 저마다의 표정이 있고 변증법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대화술, 문단법” 등 “플라톤은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사유 방법”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렇듯이 인간은 삶의 모습을 나타내며 개성과 삶의 압축된 모습을 보여주는 방법일 수도 있다. 시 또한 그런 도정(道程)을 문자로 표현하는 자기화의 방법에서 독특한 개성을 나타내는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시는 인생을 압축하면서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단면으로써 생의 전부를 보여주는 압축성- 단면으로 생의 전부를 보여주는 방법은 시의 재능을 요구하는 부분이라 할 것이다. 풀이나 꽃에서 허무 또는 기쁨을 발견할 수도 있고, 길가의 돌맹이에서 굳은 신념과 의지를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가 철학이 아니라는 점에서 설명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전달하는 특징 때문에 시적 장치를 갗추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 시의 위의(威儀)는 비유나 상징 또는 역설 등의 적절성에서 삶의 모습을 독자가 느낄 수 있을 때 감동의 허니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시적 감동은 목적이자 결과이기에 1. 생의 체험에서 독자에게 추체험의 길을 제시하고 2. 시적인 압축성에서 산문과는 다른 의미의 다양성-Ambigeyty에서 시의 특성이 나올 수 있다면, 시는 과학이 아니고 다만 시적인 여백을 가질 때 비로소 시만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다. 시는 시라야 한다. 그렇다면 시는 정작 무엇일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길을 만드는 것이 시일 뿐- 시는 정답을 갖지 않은 표정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삶의 모든 요소가 녹아들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논리 이전의 논리가 정치(情致)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는 과학 이전의 과학- 현상이지만 시는 의식과 무의식의 공간을 아우르는 삼라만상의 우주의 모두를 포괄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누리는 영예는 이러한 시를 쓸 때 비로소 지고(至高)한 자리를 점할 수 있게 된다. 김수자의 시는 다양하고 감각적인 표현 에스프리를 접하는 일인 듯하다. 시는 사물을 바라보는 감수성을 어떻게 포장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서 시인의 개성은 나타나기 때문이다. 찌릿 전기 통하는 연시 나무 하늘 높이 매단 전구에 불이 들어온다. 긴 줄도 없는데..... 훤하게 비춘다. 너무 높아 끌 수가 없어 밤낮 자유로이 놓아두니 새 떼들이 하냥 놀다 간다. <연시 나무> 중 시는 응축(凝縮)에서 탄력이 생기고 그 탄력은 생동감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상상력의 지평은 의미의 확장을 가져오면서 시의 맛을 높은 경지로 이끌어 올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는 지각의 자동화 현상이 아니라 사물을 낯설게 표현하는 기교이기 때문에 시의 위의를 높이는 작용을 한다. {나무}에서 대지의 젖줄에 입을 대고 “찌릿 전기 통하는 연시 나무” 비유의 시어가 나오는 것은 사물을 변용하여 상상의 지평을 넓히는 시적 장치에 의해 감각적인 신선미를 자극한다면 김수자의 “연시 나무”는 매우 신선한 듯하다. 60자 조금 넘게 불과한 어의 구조에서 붉은 연시 감의 전기가 통해서 불이 켜지는 “훤하게 비춘다”의 생각과 훤한 불빛 아래 “새 떼들이 놀다 간다.”의 의미에서 시인의 정신 구조를 파악할 수가 있다. {2. 시 의식의 파노라마} 1) 비움과 채움의 허무 자기를 비웠기 때문에 기다리고, 비움에서 미래는 숨을 쉬게 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한계를 알고 난 후에 허무라는 의복에 대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는 예수의 허무나 공자의 천상(川上)의 탄식 등은 본질에 눈을 돌리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색증시공의 지혜- 반아 –진리의 이름앞에서는 비움과 채움이나 없음이나 있음 등 현대 물리학의 문제가 쉽게 풀리는 것이다. 물론 지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감득하게 함으로써 감동과 순수 그 자체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챙기지 마라 원래 내 것이었던 것 하나도 없다. 가져가게 두어라. 집어갈 것 있으면 잘 산 것이고 줄 수 있을 때가 행복한 법인 것을 버릴 것 있으면 버려라 덜 버린 것 찾아 새 떼들 날아들면 그것도 행복인 것을 버린 것 그리워하지 말고 빈 마음이라 채워라 <빈 들녘> 중 비워 있음이나 채워있음은 다만 그대로의 현상일뿐이다. 교실은 비워 있기 때문에 채움이 있고 수레는 비웠음의 바퀴 때문에 무게를 감당할 수 있다고 노자는 말한다. “빈 들녘”이 허무라면 채움이 지난 뒤에 나오는 의미일 것이지만, 큰 개념에서는 결국 의미와 무의미가 교차하는 우주의 본질일 뿐이다. 이 교차의 왕래에서 인간은 다만 오고 가는 길을 바라보는 혹은 추체험으로 지나가는 존재- 이런 명상적인 현상을 느끼는 인간의 모습이 아름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것이 없음”에서 내 것을 주장하는 것은 허무한 일이고 이기(利己)의 처연(凄然)함이라면 시인은 줄 수 있을 때, 주는 것은 행복의 정점이 될 수 있음을 체득하고 있다. 이는 삶의 달관자의 의해 발성할 수 있는 음성이다. 결국 버린 것은 채우는 일이고 채우는 것을 줄 수 있을 때의 행복- 시혜(施惠)의 즐거움을 얻는 길을 주장- 비움의 가벼움이 아니라 오히려 채움이 되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다 벗어 버리고 다 털어냈다 남은 볏짚으로 부끄러운 데 대충 가리고 그냥 아무 감정 없는 척 살 생각이다. -중략- <겨울 논> 중 발가벗음은 우주 삼라만상의 본질이다. 그러나 가리고 위장함으로써 단순성이 복잡으로 변했고 과학이라는 이름에서 처절한 자기 위장에 슬픔을 쌓게 되었다면 “다 벗어 버리고 다 털어냈다” 의 가벼움은 자기와 만나는 진솔함이고 이런 진실에 다가가면 감동이 일렁이게 된다. 순수란 시의 본질이고 시가 순수의 이름일 때 감동의 누선(淚腺)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어른들이 색깔이 좋다. 혹은 무늬가 좋다느니의 찬탄으로 위장할 때 “임금님이 벌거 벗었네”의 우화는 그대로 아이의 마음이 바로 어린애의 눈과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시인이 되는 것= 김수자의 마음에는 순수의 강물이 흐르고 있음에서 “아무 감정 없는 척”- 무념무상의 모습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다. 물론 “없는 척”이 다소 걸리는 표현이지만. 2) 사는 법 길 찾기 살아있는 자는 길을 가는 방법이 선택되기 때문에 어떻게 목적지에 이를 것인가의 대한 자기만의 방법이 적용되면서 삶의 도정을 이어가게 된다. 어떤 사람은 명료하게 혹은 애매하게 등등 선택의 여지는 개성과 환경이 복합되어 한 사람 삶의 모습이 투영된다. 시는 시인의 정서를 고백하지만 그 방법은 시적 장치에 의해 위장하는 절차로 나타나기에 그 껍질을 벗기면 시인의 모습이 나타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이파리는 가시를 만들고 가슴 적셔 줄 물이 없어 차라리 몸이 타들어 가도 약한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강한 척 내심 그리운 것 많아 아닌 척 자존감 그 힘으로 산다. 선인장처럼 산다. 바보처럼 말이야. <가시 선인장> 중 가시 선인장에 접근의 용이성이 아닌 이유는 “가시”를 내보이는 것과 “물”이 없지만 갈증의 내색을 보이지 않고 강한 척하는 몸짓의 슬픔과 그리운 갈망이 많지만 그런 모습이 혹여 “자존감”을 상실한 모습으로 투영될까 조바심을 나타내고 있다. 결국 “가시 선인장처럼 산다”는 평가를 “바보처럼 말이야.” 와 등가를 이루는 대입은 스스로 불러들인 광장의 고독 같은 인상이다. “강한 척”의 행위는 자기 변호의 논리를 갖추어야 하는 부담이 따라나서는 서글픔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3) 사랑이란 그 미지수} 사랑이라는 말에는 이성간의 관계를 넘어 헌신의 아가페적인 넓이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종교는 사랑을 말하고 시는 순수의 진리를 말하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M.A moid는 말했다. 인간은 죽는다는 필연의 법칙을 지혜로 터득했기 때문에 죽음 앞에 더넓은 사랑의 이상을 설정하고 고지를 향해 자기를 희생하는 헌신은 인간이 지고함에 이르고자 하는 사랑의 목표일 것이다. 이성 간의 사랑이나 종교적인 사랑이나 사랑은 단순하다. 진리는 복잡을 단순으로 처리 하는 데서 나오는 이름이라면 사랑도 그 자체의 단순함에 벗어나서는 안되기에- 꾸밈은 이미 순수를 일탈한 사고이기 때문이다. 돌이키기 어려울 때 사랑이 다시 든 후에 그 때서 알면 안 되리라 세상일 힘들어 깊은 통증을 느끼기 전에 사랑이 모자라 슬픈 운명 되기 전에 힘껏 힘껏 사랑해야 하리라 가슴 밑바닥에 남모르게 숨긴 가는 인연의 끈 그마저 사라지기 전에 제대로 사랑해야 하리라 사랑 그 질긴 운명을 위하여 <질긴 사랑> 중 사랑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 비우면 비울수록 충만으로 가득해지는 이치에서 진실한 사랑은 문패를 달게 되는 것이다. 이기와 질투 혹은 자기 것을 고집하는 허위 앞에서 사랑은 이미 이름을 버리고 달아나기 때문에 인연의 소중함- 헌신의 의미를 내면으로 알게된다. 더구나 인연이라는 줄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사랑의 헌신이 주는 행복을 아는 일이 보다 고귀한 행위의 뜻일 것이다. 사랑은 이심전심- 동양에서는 원래 말이 아니고 마음의 전달이라면 서양은 사랑을 날마다 혹은 순간마다 확인하고 증명하는 점에서 신체 접촉이나 사랑한다는 말로 끓임 없이 증명하는 방법이고, 동양은 증명이 아니고 다만 눈으로 마음으로 – 이심전심이나 심상상인의 방법에 서 정적(靜的)이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알고 무슨 말을 해도 이해가 되고 맘속의 말도 다 들을 수 있는 것 가진 것 다 주다 못해 마음속까지 주고도 아깝지 않고 받을 계산도 하지도 않고 줄 것이 더 없는 것만 아쉬운 것 그런 것이 사랑이지 <사랑> 중 스탕달의 {연에론]에 생리적인 연애가 서구적인 방법이라면 동양은 플라토닉 러브에 가까운 거리에서 사랑이 잉태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니 서양은 접촉에서 시작하고 동양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은근미를 우선시 하기 때문이다. 이는 관념의 차이요. 생활의 축척된 방법에서 오는 것이지 어느 것이 우선한다는 발상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사랑은 오랜 관습과 시간이 경과한 뒤에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아가페적인 헌신에서 참된 사랑이 탄생되는 것이다. “가진 것 다 주고 주다 못해” 더 줄 것이 없어 애타는 마음은 순수요. 깨끗함이고 질박함이다. 사랑은 지위나 명예 혹은 자랑이 아닌 다만 주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자발성의 이름이기에 참된 사랑은 마음 속에서 끝없이 나오는 투명한 애너지의 이름이다. 김수자의 시는 사랑의 이름에 가장 헌신적이고 열정을 투척하고 있음은 일상에서 그런 체험의 가치를 아는 데서 나온 모습으로 보인다. [3. 에필로그<나가면서>] 시는 인간의 상상력이 변용을 거칠 때, 화려한 변신을 맞게 된다. “나를 나은 여자”가 어머니라는 정의나, 수소와 산소의 화학적인 결합물인 액체를 물이라고 설명하는 사전적 의미에는 삭막한 느낌이 오지만 그러나 시적인 어머니나 물에서는 기쁨과 자애를 느끼는 것이 시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는 삶의 윤활류요 생의 의미를 화려하게 꾸미는 역할이 시의 효능이다. 화학적인 변화에서는 전혀 다른 현상이 도래 하기 때문에 감동이 물길을 내는 이치처럼 시는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임무- 시인은 이런 임무에 헌신하는 사람인 것이다. 독자는 이 같은 감동의 물길을 따라가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나 더 큰 세계와 조우(遭遇)하는 것이다. 이같이 시인의 시에는 자기 표정과 허무의 의미가 자리하고 그 길을 따라 가면서 순수와 투명한 손짓에 감동을 맡기면 예술혼의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다. 비움에서 채움의 원리를 터득했고 이는 상징과 이미지의 손짓에 삽상하고 따스함을 느낄 수 있어 행복해지는 느낌이다. 삶의 문제를 천착(穿鑿)하는 시인의 노력은 항상 긴장과 신념의 불을 켜고 내일로 다리를 놓으려는 발상으로 땀을 흘린다. 이 같은 순리에 우선하면서 기다림의 눈빛이 선명하다. 사라을 숙고하는 김수자의 시는 헌신과 아가페적인 넓이에 자유정신이 숨쉬고 있어 따스하다. 아울러 인연의 소중함을 신념으로 앞세우고 자연의 이치를 시에 수용하며 섭리를 따르는 시인의 모습에 찬사를 보낸다. 이 모두를 하나로 결합하면 시는 변증법의 기법으로 안내의 길을 내는 인도자의 모습이 아름답고 고귀하다고 느끼면서 나가려 한다. 2023. 03. 20. 대중문화평론가/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통영시 전경] [치유의 숲] [이승섭시평집]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필자는 시를 쓰면서 구조와 논리에 방점을 깊이 생각하며 순서의 의해 합리적 판단으로 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이다. 물론 때에 따라 중 논으로 가는 수도 있지만 시의 종착에 맞추어 쓴다는 것이 옳은 말이 아닐까 한다. 예술이 미감(美感)을 자극하는 것은 무엇일까? 늘 고민하며 글을 쓰지만 아직도 어떻게 작품을 그려야만 잘 쓰는지에 대해선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글을 그리는 것은 모든 잡념을 버리고 오로지 글 쓰는 시간이 되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베스트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허나 글 쓰는 시간만큼은 나의 정제 되지 않은 자아를 정립하게 되고 편안을 알게 되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니 아무튼 글은 나의 소중한 친구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예술을 대부분 수용미학(受容美學)적인 견지에서 독자의 가슴을 어떻게 점령할 것인가는 계량적인 숫자로 판별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감동이 도착한 목적지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아닐까 싶다. “수용미학은 독일 콘스탄츠대학교 H.R. 교수의 취임강의 도전으로서 구체화 되었다고 나와 있다. 즉 독자와의 소통강화 독자 중심의 문화연구의 예술성이라고도 한고 있다.” 예술이 감동을 주는 이유에는 심리적인 이유와 분위기에 휩싸이는 이유 중 어느 것인가는 상태에 따라 다른 길을 걸을 것이지만 궁극에는 감동은 같다는 것 일게다. 전자는 논리적 합리로 이해될 때의 경우일 것이다. 후자라면 논리라기보다는 관습 혹은 아름다운 경치에 젖을 때, 찾아오는 심리 상태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럽지만 풀어본다. 고혹(蠱惑)적인 이성(異性)의 모습을 만났다고 가정해보면 순식간에 점령당하는 기분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논리의 틈은 아무런 설명을 못하고 오로지 분위기라는 기분에 압도당하는 점에서 설명이 어려워진다. 또한, 얼굴 모양의 대비라거나 이쪽과 저쪽의 균형미를 이론적으로 대비할 겨를이 없지만 당도한 매혹(魅惑)에서는 아무런 설명조차 불가하다는 분위기를 맛볼 정서의 특성일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엔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설명은 뒤쫓아 오면서 합리를 주장하는 학자들의 습관이라면 대부분 학문은 추상의 길을 헤매는 이유가 숨어 있을 것이기에 -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이유가 있지만, 그 나름 자체로 설명하는 것은 없다고 한다. 이것이 존재의 설명을 더하는 분분(粉粉)함이라면 이 또한 애매한 사실이라고 하니 배움은 끝도 없는가 보다. 예술의 포착 대상은 여기서 일종의 개성을 나타내는 해석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모든 결과는 해석의 길에 당도 하려는 것이 인간 역사의 일환이라고 본다. 그러나 전자의 합리는 예술 해석에서 필요한 목록일 것이기 때문 - 대부분의 예술은 순간에 포착하는 느낌과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결 논을 내리는 두 가지 방법의 하나를 택해야 하지만 대체로 논리적인 합리에서 지적인 감동이 찾아오는 것이다. 음악은 귀로 듣는 순간의 매혹이라면 詩는 눈으로 익혀 왜 그런가의 이성적인 구조에서 감동이 도출된다. 여기서 질서와 배열에 따른 구조는 필시 관습적인 가미를 제외 하더라도 항상 엄정한 이론의 길을 밟아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詩를 쓰면서 구조와 논리에 방점이 어디인가를 보아야 하 기에 논리의 옷을 입혀야 한다. 관습과 합리적인 이유가 내정될 때, 안심하고 시의 종착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가령 어린아이들의 행동은 어른의 경우와 달리 돌출적이지만 성장하여 관습의 질서를 익히다 보면 거기엔 일정한 루트가 존재함을 생각하고 행동거지를 나타내기에 시의 경우도 이런 이치에 가깝다고 느끼는 이유 때문에 현실의 문제와 표현의 거리가 너무 멀면 다시 고치고 뜯어 개작을 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논리의 구조에는 의미의 합리성이 고개를 내밀고 만족한 방점을 찍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신의 흐름은 분석 대상인지 아닌지는 확증(確證)적으로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정답이라고 찾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프로이드가 정신분석확설을 발표 했을 때 사교(邪敎) 혹은 독신(瀆神)이라는 이름으로 비난을 받았다는 것도 되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詩, 공간에 대한 견해 이론인 고전물리학의 뉴턴과 현대물리학의 아인슈타인이 공존할 수 없는 물리학적 학술은 인간의 기준에서 언제라도 뒤바뀌는 점을 여지로 남겨야겠다. 그렇다면 詩의 논리는 과학적인 더하기의 정치(精致)함을 요구 하는가 아닌가는 때에 따라 생각의 길이 다른 것이다. 詩는 과학이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지만 하나 더하기 하나를 둘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결합은 감정의 결합과 유사하기 때문에 모호성(ambiguity)의 이유를 완전히 제거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모순이지만, 관습적인 질서를 벗어 날 때는 비이성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기울어질 경우 詩의 상식은 파괴 된다고 본다. 물론 이상(李箱)의 詩를 비이성이라 딱지를 붙일 수는 없지만 애매하고 사리에서 접근하기는 어려운 것도 정확하다고 본다. 이른바 난해한 詩라 변명 해본다. 詩는 이성을 깨우는 것이 아니고 감정의 순화와 미적, 감수성을 동원하는 정서의 문제이면서 결국 이성에 접근하여 보다 밝고 깨끗한 인간의 길을 만들 수 있을 때, 정서의 전부인 詩의 임무는 확실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된다. 詩는 상식의 임무가 아닐지라도 상식의 범주에 순수와 깨끗함, 그리고 순화(淳化)의 마음을 오로지 목표로 하여 길을 정하는 목적이 옳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을 해보며 의 그림을 끝내야겠다. 2023. 03. 1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금요저널 주필/이승섭 시인 [고해의 고해(苦海의 告解) - 이아린作] [한국의 정서1 - 문홍규作] [이승섭시평집]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1. 말하는 시 사람이란 말로서 생활과 축적된 문화의 옥탑을 쌓아 올리는 것이라 하겠다. 허나 시인은 말이 아니라 침묵으로 사물을 불러와 의식의 형상화를 축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의 이미지를 조탁(彫琢)하면서 새로운 사물 에로의 끈질긴 갈구에서 이미지의 구성은 탄생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인은 일상의 범인과는 달리 언어의 영혼을 투영하면서 사물을 살아나게 하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야 하며, 말하는 법이 달라야 하고, 생각하는 길이 달라야 한다. 이런 조건들이 충족된다 해도 시는 항상 신기루의 몸짓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잠을 이루지 못하며 고된 생각, 인고의 나날을 끝없이 견디는 아픔, 혹은 생의 환희에 작약(雀躍)하는 기쁨 등은 모두 시혼(詩魂)을 이루는 요소들이면서 이러한 요소들이 모여 모여 한편의 시를 향하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인의 기도는 신에게 올리는 기도에 필적한 만큼 깊이와 넓이에서 접신을 만나야 그릴 수 있는 시라 하겠다. 허나 갈구하는 마음 혹은 절대의 진정성을 향한 순수의 마음은 동일한 궤적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단순한 언어로 조립하는 건축물이 아니라 이미지의 성을 만들고 당당한 성주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임무는 정열과 신념의 나무를 내면에서 키울 줄 아는 선하고 상상력을 갖춘 사람이었을 때 비로소 시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출발에 앞서 설레는 의욕이 앞서고, 이미지 축조의 땀이 보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처음 가는 길에 망설임과 헤매는 것을 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를 향한 순수한 열정은 오히려 내일을 열어가는 기대치로 인식될 때, 작은 흠결은 희망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더욱 정진하고 섬세한 정서가 남다름을 직시하게 된다. 왜냐하면 시의 이미지 사냥에 남다름을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꽃은 저만큼 지는데 이유 모른 채 애태우더니 잎 지는데 잎은 지는데 이유 모른 채 가슴 아파라 작년은 그렇게 가더니 올해 또한 잎처럼 져버려 내후년 또 내후년 꽃피고 지면 알 수 있으려나 허나 생을 다 살아야만 알 수 있으려나 꽃 필적 사랑이 들더니 잎 질 때 사랑 떠나가 꽃피던 그해 너무 아련하여 잎 지던 그해 너무 야속해 <꽃잎은 지는데> 중 꽃이 피면 사랑의 감정이 일렁이고, 잎이 지면 사랑의 감정이 사라지는 아쉬움이 간명하게 시화 되었으며, 감수성과 그리움과 아쉬움의 애증이 매우 여린 것 같고 섬세하다. 사물에 시심을 의탁하는 것은 시인의 내면 정서가 작용하면서 매우 감각적인 효과음을 내는 현악기와 같이 민감성을 들어내는 듯하다. 꽃이 지면 ‘가슴 아파라’의 예민성은 시심을 불러오는 영감(靈感)의 촉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개인적 자산은 시인으로서의 먼 길을 예약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시는 인간의 정서를 포착하여 일체화를 이루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숲속을 달려가는 한 자락의 바람이나 향기에 실려 가는 꽃의 향기를 느낄 수 있고, 또한 얻을 수 있다면 시와 만나고 어울릴 수 있는 자동문의 열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노력과 열정은 모든 어려움과 애로 사항을 커버하고 구체적인 정서의 흐름을 만나는 지름길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2. 그리움 만나기 인간에게 그리움은 또 다른 나를 찾아 나서는 방편이면서 대상과 하나로 결합하려는 발상을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대상이 인간이거나 아니면 어떤 행동의 구체적인 목표로 설정될 때, 거기에는 거리감이 있기 때문에 이를 정신의 갈증 현상으로 지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거리의 짧음과 긴 파장에 의해 긴밀도의 농도는 얼마나 간절한가의 여부 즉 열정으로 전환한다. 열정은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와 안으로 작용하는 두 가지 중에 대체로 후자일 경우 미지(未知)에 대한 거리를 좁히려는 발상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까움이 짙어질수록 그리움의 농도는 행동으로 나타날 여지를 갖지만 항상 정적인 태도로 작용한 인상으로 남는 듯하다. 들키지 않도록 해야지 그리우면 스쳐 지나간 여운조차 숨기려 해도 감추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속 내를 비추지 말아야 한다. <짝사랑> 중 오직 사랑이라는 제목에서 정서를 안으로 감추고 사랑의 깊이를 간직하려는 발심인 듯하다. 물론 짝사랑이라는 일방적 의미에서는 동일한 것이다. 겉으로 동일하지 않고 진심을 표출하려 하지만 그런 행위까지에는 상당한 거리와 여백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들키지 않도록 해야지’에서 발각의 경우 놀랄일은 아닐지라도 곱게 간직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상대에게 굳이 알리지 않으려는 생각인 듯하다. 아울러 ‘거울에도 속 내를 비추지 말아야 한다.’라는 서술에서 작심의 농도는 매우 강하나 그러나 감추는 일은 항상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리움의 마음은 향기와 같이 무언가 표정으로 드러나는 속성을 감출 길이 없기 때문이다. 유종필은 내면의 향기를 겉으로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감추면서 애가 타는 심성이다. 이러한 내성적인 정서는 오랫동안 지속되는 성품에서 보이는 특성이 아닐까 한다. 이름으로 남는다는 것은 아주 작은 것조차 아름답기만 하네 우리 언젠가는 소소한 것으로 만나 다음 어느 날에 둘이라도 하나처럼 이름 짓고 싶네 곁 바람, 겸 잎 같이 짝지어 가슴 속 몸짓으로 하나이고 싶네 끝없는 그리움이 추억 보듬는 날 첫눈의 눈발도 맨 가슴에 날아드는 기억뿐일지라도- <그리움은 끝이 없어> 중 아름다움은 마음에서 발동ㅎ는 정서의 일종이지만 기억을 윤나게 하는 인자(因子)를 가지고 있어 항상 내면에 숨어 있고, 언젠가는 나타날 순간을 포착하려 하는 것이다. 이는 시인의 심성이 그렇게 작용하기 때문에 의식의 얇은 층을 뚫고 나타나는 순간 마치 봄날의 개화처럼 아름다움의 연상을 펼칠 수 있는 놀람 앞에 서 있는 듯하다. 그리움은 연속작용이면서 이 연속성은 항상 아름다움을 채색하는 좋은 기억과 손을 잡으려 하는 모습이다. ‘소소한 것으로 만나’와 같이 작은 것- 여기서 발생하는 인연의 소중함이 점차 커지는 의식을 확장하기 때문에 작은 그리움들이 추억으로 쌓이면서, 아름다움의 옷을 입게 된다. 결국 유종필의 그리움은 ‘겹 바람’ 혹은‘겹잎’처럼 둘이 ‘하나이고 싶네’의 소망을 달성하려는 정서로 앞축 되어진다. 왜냐하면 ‘추억’이라는 시어가 ‘기억뿐일지라도’의 상상으로 배회하는 그리움- 멀리 있는 미지(未知)를 향하는 호소가 아닐까 한다. 3. 동화(同化)와 변화 이미지 아이덴티티는 대상과 하나로 결합하는 일체화를 뜻한다. 시를 쓰는 것은 본질적으로 대상 즉 사물과 시심을 결합하는 데서 미감(美感)을 획득하는 일니다. 때문에 아이덴티티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언어 장치를 필요로 하고 여기서 시인의 재능은 확실한 담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물 자체의 본질로 향하기 위함에서 시어의 모순이 발생하지만 이는 시적 허용이라는 말로 정리가 될 수 있다. 그리움이나 사랑에서는 대상과 하나의 결합이 동화의 이름이 되고 시에서도 그런 집념이 초점을 맞추게 되면 시는 완성의 문패 즉 성주가 되는 것이다. 녹음의 임자 여름 지고 따라나선 푸름이 변색하여 요염해지거든 가을이 오니 유혹에 넋을 잃고 찬 서리 날리는 어느 날 쯤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나, 하염없이 높이만, 높이만 오르나 너 닯은 마음이라 나 또한 치솟기만 하네. <하늘> 중 하늘과 시인이 하나로 결합을 이루면 푸름이라는 물이 든다. 이런 일체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짙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열망이 결합하는 것은 시인의 마음속에 간직된 순수와 투명한 정서가 열려진 마음을 필요로 한다. 여름의 푸름과 녹음, 그리고 하늘의 이미지가 오버랩 되면 두 개의 사물은 전혀 새로운 발상으로 변모가 된다. 이런 시의 변화는 화학적인 결합이고 변모이기 때문에 신선함과 언어의 탄력을 동시에 수용하면서 시의 성공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높이만’의 반복이 주는 뉘앙스에서 치솟는 마음의 상태는 정화된 아름다움을 전달할 수 있는 임무를 수행하고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4. 자아(ego) 찾기 나를 찾는 것은 철학의 시작이며 철학의 종점이러고들 한다. 즉 나를 아는 일은 곧 시의 입구이며 철학도 결국에는 시의 가슴에 안기는 절차가 아닐까? 시란 그런 넓이와 깊이가 있기 때문에 철학도 시의 표정을 수용하는 상관관계를 갖는 것이다. 결국 종국에는 사는 것, 그것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물음은 철학이지만 시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시인은 방랑의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지 관리를 포착하여 의미의 성을 구축하려는 노력과 열정이 있기에- 내 속에 내가 없다 내가 없는 속에서 존재하는 나는 이미 몰가치의 상념만 존재하고, 은행나무 곁을 지나는데 잎은 지고 가로수 본연의 충실함으로 길가를 노랗게 물들여 놓았는데 ....중략.....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내 속에 내가 출타하고 기약 없는 세월은 흘러갈 일이고 그렇게 또 흘러가겠지 그때쯤이면 나에게 돌아와 무엇이라 말할 것인지 궁금하구나 자아여..... <내 안에 없는 자아> 중 만약 내가 여행을 떠난다면 어디로 갔을까? 찾아 나서도 어디로 가야 할 방향이 없을 때, 망연함과 절망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절망은 항상 희망의 이름을 부르는 길을 만들기 때문에 나를 찾는 여정은 계속할 수밖에 없다. 자아가 없는 내 인생은 이미 인생이 아니라 허울을 뒤집어 쓴 마네킹과 같다면 여기서 개성의 기대는 불가능한 것이다. 시는 참된 인생이 무엇이고 참된 삶의 길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일이고, 감동 받는 호소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지난한 난관이 있더라도 내가 무엇이고 내가 어디로 가는 방향의 가늠은 삶의 가치에 직결되기 때문에 알아야 할 영원한 숙제로 남는 것이다. 자아 즉 내 안에서 나를 찾는다는 일은 절망이다, 그러나 거울 속에서 나를 찾는 일 또한 공허의 이름일지라도 나를 향하는 그림자 찾기는 필연으로 엮어진다. 왜냐하면 내 그림자를 떼어 버릴 수 없는 운명이기에- 이 슬픈 여정은 생의 이름으로 진행형일 때, 삶의 이유는 분명해진다. 유종필은 자기(ego) 찾기의 숙제를 달성하기 위해 물음을 던지는 일- 그렇게 시는 이어져 가는 듯하다. 시는 그런 여정을 포착하는 이름일 뿐이기에 길을 묻는 여정은 곧 시로 가는 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산다는 것 달콤한 꿈속에 놓인 불안한 몽환처럼 알 수 없음이라 <인생의 여정?>중 인생의 맛 삶의 맛을 분류한다면 아마도 희노애락의 오욕에 칠정(七情)에 따라 인생에 대한 희비는 생성할 것이다. 그러나 쓴맛과 단맛의 구분은 가장 평범한 구분이라면 결국 생에 대한 각자의 구분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단맛이 타인에게는 쓴맛으로 다가올 수 있는 구미(口味)의 문제는 개인차로 한정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불안한 몽환처럼/알 수 없음’이라는 말로 정리가 될 것 같다. 개개인은 하나의 완전한 우주라 보기 때문에 비교로 우열을 가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귀한 삶이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고 어디서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오로지 개개인 자신들의 문제이기 때문에 찾는 것도 아니면 버리는 것조차 개인의 문제로 터널을 건널 때, 욕망이라는 자기 확장의 방법만이 있는 것이다. 원래가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겠는가? 마음 한 구석 식지 못할 열정 남아 자꾸 먼 산 엿보네 머리 깃털 날리면 길을 가다가도 하늘을 보며 ‘날자꾸나, 날아보자꾸나, 하며 하늘만 우러러보지요. 하늘만 우러러봅니다. 오늘도 <메말라 가는 자아> 중 누구나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이 자리한다. 그러나 날 수 없는 제약의 그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다만 날개짓이 고작인 슬픔의 일상은 누구나 갖고 있는 욕망의 현실 앞에서 고뇌의 모습을 연출한다. 이러한 현상을 돌파하고 자기 자신을 확립하는 것은 의지와 신념 그리고 지혜라는 도구를 통해 남보다 다른 개성의 성주가 될 수 있다. 이는 나이라는 켜가 아니라 열정의 에너지를 얼마나 충전하고 먼길을 갈 수 있을 것인가의 여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유종필은 이런 현상을 일찍 터득하고 인생에 삶에 서 있는 듯하다. 그도 이상이 슬픈 고백처럼 현실의 장벽을 돌파하고 창공의 주인이 되고 싶은 열망을 피력한다. 그러나 하늘은 누구나 오르고 싶은 공간이지만 쉽게 도달의 열쇠를 가질 수는 없다. 하여 ‘하늘만 우러러본다’라는 체념의 언덕에 주저앉아 높이만을 동경하는 모습이다. 이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성찰의 조숙한 인상이 대답을 마련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5. 나를 대면하기 시인은 세속을 버려야 하고 묵언의 진리를 이미지로 만들 수 있는 경지를 방문해야 할 듯하다. 다시 말하면 말의 운용지가 아니라 글을 재료로 인생이나 우주를 담아야 하는 창조자의 임무가 주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무명시인』 『시의 배고픔』 등은 스스로의 위치와 처지를 알고 시에 대한 소회를 대변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인 것 같다. 비오는 날의 신호등은 홀로 서서 봐주는 이도 없는데 연신 몸짓 간절하여 아무도 없는 밤 장대비가 오는 그런 날에는 내 모습 같아 처량하여 애달프기만 하네 <무명시인> 중 무명의 설음은 어느 분야에서나 인간은 같다. 춥고 외롭고 그리고 무관심의 냉정함이 서럽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것은 무명의 대부분의 삶이다. 평범한 시인이 쓰는 간절함의 애달픈 시어가 필자 또한 겪었기에 느끼는 바가 너무 크다. 싹이 나올 무렵의 신산한 고통을 혼자 견디고 나서 그런 연후에 비로소 자존의 문패를 달 수 있는 것이다. 처절함과 외로움을 견디는 시간이 없다면, 웃자란 식물의 운명을 감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초기의 고통을 어떻게 견디는가의 여부는 결국 성장의 동력을 키우는 계기가 될 것이기에- 춥고 때로는 참담한 경지를 벗어날 때 건강한 존재로 일어설 수 있다는 진리와 이치를 알아야 할 것이다. 6. 에필로그 새는 창공을 날고 싶어 한다. 그러나 비상을 하기 위해서는 땅에서 걷는 법을 알아야 하고 땅의 이치를 알고 하늘의 이치를 대입하면 두 공간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 되었기 때문에 하나의 이치가 둘의 이치를 포괄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삼라만상 우주의 이치가 아닌가? 시인은 모두를 위한 노래의 가락을 인간에게 바쳐야 할 이유- 오늘은 내일을 향하는 징검다리이면서 결코 생략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닌 꿈을 위한 노력이 배가 되어야 한다.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미래를 염원하는 기도를 해야 하며 오늘에 겸손할 줄 아는 일은 시의 건강을 위한 몫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설계의 이미지 구축을 와료 했다면 이다음은 건축의 마무리를 확실히 하는 발성이 기대되는 소이(所以)가 위의 논지를 재촉이 된다는 것을 말하며 더는 숙제가 될 것 같아 설계도의 마무리 해줄 것을 기대하며 나가려 한다. 2023. 03. 09.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설숙영 작가의 내마음의정원(In the Garden), (30x42x7cm), 실크도판, 융복합(금박), 2021년] [이승섭 시평집]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시인의 꿈은 1편의 시를 위해 정성과 혼심을 다해 경주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 작은 소망은 항상 가혹한 시련을 겪어야 하고 대가(代價)를 지불해야 얻을 수 있는 영예의 공간이다. 그러나 이 공간의 주인이기를 바란다면 몇 개의 조건을 합치시켜야 한다. 첫째는 공감의 영역이 넓을수록 호감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공감이란 보편적인 공통점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둘째는 시의 완성도 즉 시적 조건에 합치하는 요소들이 많이 들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서정적 언어의 선전이 아니라 평범하면서도 누구에게나 공통의 이해를 넓히는 작품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의미의 내포- 결국 의미가 마지막에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의미 없는 시는 공허함만 부추길 수 있음도 명심할 일이다. 전 세계 많은 인구가 자리하듯 시 또한 많은 표정들로 세상을 부유(浮游)하는 것이기에 개성을 갖춘 표정을 만나기란 매우 희소(稀少)하기에 개성은 시인 자신만의 표정이 아니라 시인이 만든 유일한 자기 분신일 수 있기 때문에 누구의 작품이라는 명패를 패용함과 동시에 무한의 책임을 갖는 것이다. 시는 시인의 운명과 동일한 여건으로 살아가는 이름일 수 있음을 의미함이다. 유기연 시인의 시에는 여러 가지의 표정이 묻어난다. 식물 정서, 사랑정서, 환경 정서 등이 가장 많은 빈도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삶의 애환과 정신의 지향 사랑에 대한 애착 등이 표출하는 것으로 유추가 된다. 시는 낯설게 표현하는 점에서 의도적인 표현이 있을 수 있지만 시의 표현은 종국에는 정신적인 흔적을 예외로 하는 것이 아니기에 관념적인 표현이 다소 있겠지만 시인의 의식을 점령하는 세 가지의 축이 시집을 채우는 말들의 향연이다. 이러한 정서는 아무래도 전원의 정서가 지배적인 현상을 유지하면서 다감한 성격, 혹은 그런 성품에서 나오는 사랑 또는 정서적인 흐름이 도시의 복잡한 정서를 외면하고 살고 싶은 사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이제 그 흔적들을 만나 보기로 하자. 『2. 정서의 표정들』 1> 식물 정서 시인은 누구나 개성의 따라 일정한 취향을 갖는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의 정서가 어디로 관심과 집중을 하는 가의 여부에 따라 문자로 표현하는 길은 그런 쪽으로 언어를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심리적인 현상이 지배하는 길에 따라 예술의 형성은 탄생의 길을 마련한다. 대체로 식물 정서를 좋아하는 사람의 특성은 다이나믹한 것보다는 정적(靜的)이고 사색적인 특성을 가질 수 있다. 바다를 좋아하기보다는 강을 좋아하고 높은 산보다는 작은 산의 정취에 마음이 더 쏠리는 일은 유 시인의 시 제작의 정신 문으로 정신의 문으로 들어 가보자 텃밭 끝자락에 실하게 여문 호박 하나 살며시 집에 옮겨 놓으니 텃밭이 따라왔다. 혹여 허기를 채워주었던 비우며 살았던 세월이 미소 지으며 굶주림 세월 견디었던 부모님 가뭄과 폭염을 견딘 커다란 호박 온 집안에 가득하다. <과거의 상념> 사실 호박 하나가 일상에서 줄줄이 풀려지는 이야기는 과거의 길을 넓게도 채색 되는 듯하다. 가난한 시절 허기를 채워주던 “호박 하나가” 서글픈 지난날들의 파노라마로 일어나는 길에 부모님의 가난을 슬픔의 물살로 살아나는 애환의 갈증- 가난과 갈증의 아픔으로 누선(淚腺)을 자극하면서 현실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회상하는 시가 애잔함을 느끼게 한다. 호박이 지난 추억을 상기시키면서 부모님의 가난과 아늑하고 포근한 농촌의 모습이 그림처럼 다가드는 듯하다 이런 풍경과 추억은 시인의 마음에 매달렸던 동화된 마음과 사랑의 감성이 식물 정서와 지배적인 양(量)으로 시적인 허기를 채우는가를 증명하는 예로서 감흥이 솟아 나는 듯하다 하냥 걷는 길에 만상의 태고의 신비에 산길도 꽃으로 돋아 이리도 고왔는가? 뉘, 있기에 그리운 길을 같이 걷고 싶다 –중략- <산속 길에서> 시의 구조란 길-꽃-그리움으로 이어지는 짧은 단형의 시이다. 산속 길을 걷는 목적의 좌표가 시인은 태고의 신비를 만나 산길도 꽃으로 펼쳐진 길을 유영하며 산길을 걷는다. 아무튼 꽃은 지상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것이다. 물론 미지칭으로의 꽃이기 때문에 그 꽃은 시인의 마음을 대변하는 상징을 표하면서 “고왔는가”의 새삼 발견에서 역시 꽃은 그리움이라는 먼 대상으로 향하는 마음이 진솔하게 표백되는 듯하다 시인은 고달픈 인생의 비유로 나타나기도 하고 사랑을 말하는 메신저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마지막 잎새 하나 욕심없이 내어준 노을 진 들녘에 찬비마저 내리고 아픈 잔등 쓰다듬다 한기 견디며 삶의 골짜기에 철새처럼 머문다 까마득히 저 산등성이로 차마 닿을 수 없는 달빛시린 헛된 꿈도 가고 내 삶의 이랑에 고인 욕망도 쓸고 간다. 세월이- <삶의 뜰> 다소 관념적인 시이지만 겨울 독목(禿木) 한기 젖은 모습을 바라보며 비극적인 무의식을 나타내는 듯하다 그러나 독목이 있으므로서 봄을 예비하는 안온함이 자리하는 느낌이다. 이런 순환의 법칙은 곧 우주의 운행 원리와 상통을 하며 인간이 살아가는 궤도와 다름이 없을 때, 비유가 생동감으로 일어난다 마지막 잎새하나 바람이 스치면 엄혹(嚴酷)한 시련의 줄기가 칭칭 얽히는 일상을 넘어 “삶의 뜰”은 봄을 기다리는 희망의 자리가 보인다. 식물 정서는 특히 여심을 나타내는 향기와 유연함을 이미지로 작용하여 시인의 시에 특성으로 자리하는 듯하다. 어머니 손때 묻은 항아리 그 안에 수련 있어, 고단한 삶을 이고 청초한 빛 쓸어낸 그 안 수려한 어머니의 자태가 있다. 물그림자 뜬 자리 물 배추 펴놓고 가을 햇살이 와서 사랑으로 아픈데 창문사이로 넘나드는 바람, 어머니 분냄새 처럼 함초롬 향기 듣는다 <수련>(차분하고 고운 상태) 어머니와 수련의 향기가 동가(同價)를 이루면서 작고 아담한 또는 사랑의 향기로 돋아 오르는 연상이 그림으로 그려진다. 바람과 어머니의 내음과 가을 햇살 그리고 향기가 함초롬이 돋아나는 이미지의 결합엔 시심이 누리는 연상작용이 복합적인 것 같다. 이는 조용한 어머니를 그리기 위해서는 수련의 향기와 자태에서 사랑의 이름은 더욱 애달픈 상을 남긴다. 시인의 시는 이렇게 식물에서 느끼는 자태- 아름다움과 향으로 오르는 천상으로의 이미지는 고귀함을 자극하는 기교가 되지 않을까? + 2> 부모 가랑잎에 하얀 서리 내리면 깊은 골짜기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그 바람 시름을 보듬어 소쩍새처럼 소쩍새처럼 못내 서러워 운다 –중략- <아버지>에서 잘은 모르겠으나 아버지는 가난의 굴레를 짊어지고 형극(荊棘)의 나날에서 끌려가는 형상- 가족을 책임진 신음을 생각하는 딸의 모습이 너무도 가련하다. 이는 “소쩍새처럼”의 반복이 주는 뉘앙스가 고난의 아픔이 연상 된다. 더구나 “서러워 운다.”의 내포는 풀어낼 수 없는 고통과 참혹성을 나타내는 비유일 것 같다 누구나 과거는 무겁고 회상하는 삶의 그늘이 무게와는 달리 친근하고 애착이 가는 그런 경향이 다분하다. 왜 그런가 하면 나의 소중한 추억이기에 비록 가난이나 아픔조차도 다시 만나고 싶은 그런 기분이 발동된다는 점에서 시름이나 서러움일지라도 동화되기를 염원하는 뜻이 된다. 아울러 부재한 부모에 대한 회상은 더욱 무게가 가중되는 것도 사실이다. 유기연 시인은 이런 정서를 시화(詩化)하는 점에서 다감한 성정으로 생각된다. 나를 찾으면 이미 나는 내가 아니고 더 큰 나로 변한다고 한다. 나는 우주의 중심이고 우주는 나를 위해 운행한다는 생각으로 바꾸면 나를 찾는 일은 곧 우주의 원리를 찾는 일과 같을 것 같다. 나를 아는 일이야말로 철학의 시작이고 종점이기에 시련을 감내하면서도 나의 의미는 삶의 가치로 나타나는 것일 것이다. 알몸으로 거울 앞에 섰다. 부끄러움에 전신을 감추었다. 되비친 것이 사랑이면 사랑으로 열매를 맺고 ...중략... 나는 무엇으로 거울 앞에 풍경을 피울 것인가 마지막 아름다운 고백이 되비치기를 기도하며 거울을 닦는다. <거울> 중- 나르시스의 이름은 자기에게 대한 탐닉(耽溺)을 의미한다 거울은 자기를 반사하는 모습이지만 정작 그것이 자기라는 확신을 갖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반대편에 영상으로 나타난 자기의 분신일 뿐이다. 그 분신 속에는 보이는 마음이 없기에 오로지 형태만으로는 완전한 자기의 의미는 아닐 것이기에- 그러나 자기와 반대편에 서 있는 거울 속에 자기를 부정할 수 없다. 왜 그런가 하면 형태조차 부정하는 곳에 의미는 찾을 단서를 확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이나 되비친 거울 속에 자기를 애착하는 관심의 농도가 강할수록 아름다운 풍경으로 되비칠 것을 염원하는 생각이 일상을 벗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3> 사랑의 진원 사랑의 종점은 배우자를 만나면 자연스레 도착한다. 그러나 그 길에 이르기 위해서는 방황과 설렘이 교차하는 수많은 길을 가야 하기에 그렇게 간다, 하더라도 사랑의 안온함을 누리기엔 지불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고개를 넘으면 다시 고개가 나타나는 사랑의 행로는 오로지 현재라는 지점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누리는 마음의 평화일 것이기 때문이다. 유 시인은 오로지 사랑을 위한 의미가 시에 모든 것을 투척하는 표정이라는 점, 아마도 남편을 향한 노래로 한정 되어 있는 듯하다. 어떤 것이라도 태워 버릴 것 같은 사랑을 만나고 싶습니다. 두눈이 먼다해도 사랑의 빛으로 길을 밝혀주는 그런 사랑을 만나고 싶습니다. 허전한 날 어떤 것이라도 태워 버릴 것 같은 뜨거운 사랑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 어떤 것이라도> 중 이 세상에 누구보다 나를 가장 잘 아는 한사람이 있습니다. <한사람> 중 저녁 노을에 기대어 있노라면 살포시 다가오는 얼굴 하나 차마 보고 싶다 말할 수 없어 수줍은 마음 하늘 가득 붉게 물들고 다정한 마음이 먼저 마중을 나간다. <그리움> 중 유 시인의 사랑은 빛나는 사랑을 원하는 길을 가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인 수사의 사랑을 하는 것 같다. 조용한 공간에서 만나는 정서를 보여주며 순수하고 담백한 뜻을 가질 때 사랑은 고귀한 가치의 개념으로 정리 된다면 유 시인은 안온한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조용한 시인- 그런 시심을 안으로 감추고 부끄럽게 표출하는 시인이 아닌가 한다. 3. 에필로그 유 시인의 시는 담담하고 서늘한 가을 바람을 맞이하는 인상이 짙다. 이는 시인의 감수성에서 나오는 시심이 조용하고 아늑함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이는 식물 정서에서 오는 정감이 부드럽고 정적인 인상을 남기는 점에서 푸르른 식물 같다. 부모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따뜻한 정이 안으로 남기는 점에서 포근하게 다가온다. 이는 여심에서 보이는 감성이 유동하면서 객관적인 현실을 보여주는 효과- 이러한 즐거움은 언어의 효과적인 비유와 장치를 만나는 반가움이다. 시는 사랑의 노래로 집약되는 듯- 하지만 물론 사랑의 요체는 한 삶을 향하는 절절함이 산뜻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시의 행로는 오직 사랑을 향한 정성과 시로서 표현하는 인상이 전부이지만 언어의 조화에서 삶의 높이로의 지향점, 부모님의 애절한 마음과 사랑을 위한 현실의 가치를 아름다움으로 포장하는 순수의 시인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아름다운 마음을 놓고 나가련다. 2023. 03. 06. 대중문화평론가/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이승섭 시평집] [이승섭 칼럼집] [치유의숲]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인간사는 세사의 모든 물상에 이름을 붙이고 거기에 영혼을 붙어 넣으면서 기도의 물목(物目)으로 삼아 또 다른 상상의 영역을 탐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상상은 또 다른 길을 만들면서 사고의 복잡성을 부추기어 문화의 중심으로 채색하는 것이다. 또한 이름이란 부를 때 비로소 생명을 얻게 되고 그 속에 무엇인가 영혼이 있음을 신념으로 공고화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1이라는 이름을 굳이 1이라 고집하는 이유는 인습이라는 장벽 때문에 고칠 수 없는 이유를 내장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이름이 관습의 의상을 걸치고 거기에 안주할 때, 상상의 길은 차단 당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시인은 이런 기준의 질서를 거부할 때, 신명을 불러올 수 있고 이 신명의 불꽃위에 시인만의 성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시적허용은 산문에서는 허용되지 않지만 시는 관습적인 것이나 기존의 사슬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영역을맞이할 때, 선도적인 시인의 임무가 발휘되고 여기서 시의 길은 또 다른 변화의 장면을 목도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이상(李箱)의 [오감도]에는 띄어쓰기, 맞춤법 등이 기존의 질서에서 역으로 상상을 자극할 때, 새로운 출현의 시를 높이 상찬하는 이유가 설명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시인은 언어 혁명의 기질을 가져야 하고 의식의 변화를 과감하게 자극하는 질서의 파괴에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성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개성 있는 시인의 이름이 되지 않을까? 똑같은 혹은 아류의 시는 아무런 개성도 갖지 못한 무의미의 의상을 걸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시인의 의식은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매의 눈을 기저야 하며, 먹이를 찾는 사자의 배고픈 방황이 있어야 한다. 기존의 시와 똑같으면 이유가 변화에서 신선함이 탄생 되기 때문이다. 첫 시집을 상재한 노길순의 시는 그만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시인인 듯하다. 봄 향기 가득한 봄바람처럼 상쾌하며 안정감이 있는 인상으로 언어 조합의 묘미를 상기시키면서 그만의 영역을 노리는 탐색이 전제될 때, 다가오는 기운은 삽상을 자극 시킨다. 이제 노길순의 정신 추구를 운위하는 길로 만나러 들어 가보자. 2. 【Dream[꿈], 제조기 1> 자신의 영역 길 찾기 예술은 본질이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의 다양성을 기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백적 형태로 기교를 표현하고, 선과 색채로는 미술 작가의 사상이나 신념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문학은 문자를 통해서 결국에는 자기를 그리는 작업이라 보기 때문에 지속한다는 뜻이다. 물론 표현된 결과물은 저마다 개성의 차이에 따라 톡특한 양상을 갖는다. 삶이란 결국 자기를 찾아 나서는 여정이고 이 여정을 어떤 뜻으로 받아 드리고 또 삶의 중심을 어떻게 잡는가는 시인의 표현 목적과 의도로 표상될 뿐이다. 이길순의 시에 첫 번째 목록에서 자기를 위한 탐구의 길이 보이는 것은 그가 어떻게 시의 진로를 이끌고 나갈 것인가를 암시하는 의미에 가깝다. 왜 그런가 하면 “나”는 곧 전체 속에서 어떤 위치에 이를 끌고 나갈 것인가는 목적에 맞추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보이질 않는다. 내가 창가에 서 있는 나 거울에 보이는 분명 서있는데 무더운 염천이 몰고 오듯 그저 땀을 흘린다. 잠시 짧은 흔들림이 머리카락 움직이고 이리저리 내 곁에 있는 나 이제 떠나 주기를 한번 두번 기다림에 지쳤건만 오늘도 나를 자꾸 기다린다. <내가> 중 나를 알면 가장 위대한 인간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정의할 것이다. 모든 성인들은 “너”라는 대상에 질문을 던지면서 혹은 직간접으로 지적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자기 삶의 중추를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에 철학의 중심을 두었다면 노길순은 거울 앞에 서 있는 자기를 “안보인다며” 면서 스스로에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겅ㄹ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무표정의 대면에서 시인은 스스로 찾아 나서는 노력이 집중된다. “그저 땀을 흘린다.” “나를” 강조하면서 비로소 머리카락이 “움직인다” 의 탐구에 대한 대답을 듣고 있음이다. 더불어 “기다림이 지쳤는데”에서 지속적인 삶의 탐험이 스스로의 동력을 얻어가는 단계로 들어간다. 인생은 오로지 자기가 살아가면서 해답을 얻는 길이 있을 뿐이지 타인이 해답을 던져주지 않는다. 때문에 신열을 감내하면서 길을 가는 나그네의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 자기를 버릴 때, 기를 얻게 되는 역설적인 방법도 있지만 노길순은 직접 자기와 대면- 거울에서 나르시스의 방황을 해쳐 가는 용기가 가상하다.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오늘도 나를 기다린다는” 자기애(自己愛)의 길을 넓히는 발상이 두드러진다. 어느새 벌써 과거가 나를 비웃는다. 나는 아직 존재하는 숨쉬는 인간 돌아보니 벌써 과거가 비웃는다. 땅에 붙어버린 발이 언젠가 가장 멋지게 함께할 저 끝 오늘도 나는 내일을 이끌고 무거움이 힘겨운 줄 모르고 앞으로 전진 또 전진 <살아가는 일> 중 인간은 세상에 현존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탄생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일뿐 실제로는 미지의 공간에서 다시 미지의 공간으로 길을 만드는 존재일 뿐이다. 하루 하루 살아가기 때문에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라는 구분이 생의 이름으로 다가든다. 노길순은 자아를 확립하는 방도로 과거를 투명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톡특한 듯하다. 왜냐하면 살아있다는 증거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숨쉬고 있다는” 면을 강조하고 다음 수순으로 진행하는 미래지향이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 중간의 현재를 인식하는 점이 이채롭다. 흔히 혼란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특징인데 이런 유약함을 거부하고 자기만의 톡특한 개성의 의상을 입고 “땅에 붙어버린 발” 이라는 현실을 의식하고 가장 멋지고 오늘과 내일을 끌고 출발하는 보폭- “무거움이 있을지라도 전진” 앞으로 독촉하는 시심이 희망의 날개를 달고 전진하는 발상이 희망의 발걸음이다. 시인은 독자에게 말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자를 대상으로 어떤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감동의 목록으로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메시지는 항상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닐지라도 호소하는 반복성에서는 독자도 수용미학적인 마음으로 파도를 일으키면서 질서 있는 형식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사실 한 작품의 내면에 수용된 의식의 갈래는 ambiguity(모호함)이라는 시적 형식 속에 내면의 질서를 살려야 한다. 이는 유기체인 생명에는 다양한 요소의 결합이 통일될 때 황홀한 감성의 바다를 독자에게 전달 수 있다면 여기서 시의 성공은 담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시적 반응은 다양성 속에서 통일된 의식이 명확해야 하고 균제(均齊)의 형식이 가지런 했을 때, 비로소 미의 모범 원리로서 형식적인 통일감이 주어진다, 노길순의 시는 우회적인 기교가 아니라 직접 호소하는 방법으로 자기를 들어내는 진솔함이 특징일 것 같다. 홀로 잠든 내 곁에 살며시 별이 왔다. 깊은 밤 숨소리조차도 사랑스럽다. 모른척 힘들지 말라고 침대 모서리를 잡는다. 어느새 작은 새처럼 내 안에 안긴다. 사랑해 난 괜찬아 손발이 차가운데 ..... 내일은 좀 더 큰 행성으로 가자 아니 난 괜찮아 너만 있음 되니까 밤새 나를 밝혀주며 지켜주다 잠이 깨면 사라질까 드려워 가만히 문을 닫고 홀로 뜰로 나간다. <내 사랑> 중 사랑이라는 말은 매우 보편적인 어의이다. 그러나 이 보편성 속에서 본인의 마음에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을 때, 비로소 사물을 바라보는 대상에도 전이된 사랑의 온기가 느껴지는 이치는 자발성의 이치로 인식된다. 시인 스스로의 마음에서 사랑의 마음이 들어 있기때문에 바라보는 모든 물상에 사랑의 기운이 퍼지는 감정이입(感情移入)의 이치와 같다는 뜻이다. 깊은 밤, 별과 속삭이는 마음에는 동화의 세계가 순수로 포장된 노길순의 시심이 또 다른 에너지의 공급처이기도 한 것 같다. 왜냐하면 사랑의 에너지원이 [깊은 사랑] [장미꽃 사랑] [어리석은 사랑] 등 가족에서도 오고 자연에서도 오며 다양한 사랑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친밀도가 시인의 즐거움과 행복으로 이어지는 귀결이 된다는 점에서 일일이 일거 하지 않아도 희망의 사랑이 진원지일 것은 분명한 것 같다. 3. 에필로그 자아의 문법 구축 예술이란 현실을 직시하고 그 바탕 위에서 상상의 길을 만들어 미감(美感)으로 처리하는 노래인 것이다. 그 노래들에는 진실, 사랑, 배려, 등이 담겨 있을 때, 감동의 길이 보편성으로 전달되면서 독자에게 힘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일이 되는 것이다. 정작 시 자체에는 아무런 힘도 없는 것 같지만 시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진솔성과 아름다움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에너지의 중심이라는 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감동은 그처럼 강한 태풍도 될 수가 있고 또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의 결합에서 꿈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꿈을 전달하는 시인의 힘은 여기서 정점을 마련하는 능력자이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 희망을 부추기는 꿈의 제조자는 곧 시인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런 꿈을 부추기는 기능을 하는 시인인 것 같다. 이같이 전체적으로 자기발견의 성실성과 자기를 떠나서는 어떤 것도 이룩할 수 없는 이유가 내장 되었기 때문에 자기애의 확신성과 신뢰 찾기는 미래의 문을 향하는 옳은 길이라 하겠다. 또한 사랑의 중심이 어디에서 발원하는가를 아는 일은 현명하고 아름다운 시인이다. 이는 사물의 내면을 통찰하는 촉수에서 시심의 길이 열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신뢰를 줄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요소를 통합하고 분리하면서 다시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신뢰를 보내는 시가 바로 정신문법인 것이다. 앞으로 절차탁마로 정진하여 보다 더 차원이 높은 시를 그릴 수 있음을 기대하면서 내 책임에서 벗어나련다. 2023.03. 0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1.(2)달빛등대로] [이승섭 칼럼집] [이승섭시평집]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1. 나를 만나기] 글의 작품을 완성한다는 것은 대부분 아름다운 마음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정서를 순화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정서의 상승을 부추기는 순수한 에고의 풍경화를 만나는 일이기에 작가는 사물을 보고 상상의 나래를 심안(心眼)으로 떠오르는 세계를 위해 헌신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 비유로 나타나는 작가의 얼굴에는 천진하고 순수한 마음의 그림이 전개되기 때문에 한 사람의 작가가 그리는 세계내(世界內)에서 독특한 추수(追隨)적인 경험을 만나기 일은 마음과 독자의 마음이 일치하여야만 효과에서 만나는 공간 글의 가치는 즉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이 되는 것이다. 작가가 토해내는 언어의 그림은 단순한 언어의 조합이 아니라 세계를 아름답게 치장하는 일면 그로 인해 변화되는 공간 창조의 힘이라는 것은 독자들의 마음의 심금을 울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글의 가치는 고귀하고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인간의 곁을 떠나지 않는 글의 가치는 고귀하고 힘이 넘치며 인간의 정서를 끌고 가고 있기에 감득하는 작가라면 정서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이다. 사실 감수성과 정서가 없다면 작가가 될 수 없고 감각적, 언어의 조화를 연출한다는 점에서 작가가 되는 길은 그리 쉽지 않은 것이다. 작가라는 타이틀을 패용하고 글을 쓸 때는 사물과 결합의 조건을 제시하여야 하며 그로 인해 촉매제 역할도 주도적으로 구사하여야 이미지의 결합을 주도하는 운용적인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비록 평범하고 날마다 접하는 재료가 있을지라도 어떻게 요리하는가의 따라 그 결과는 호불호의 결말이 판연하기 때문이다. 소설, 칼럼, 수필, 등은 다소 연결 지어지는 문맥이 그리 어렵지 않지만 시(詩)라는 존재는 궁극적으로 언어의 창조, 응축, 언어의 이미지를 그리는 그림이다. 여기에는 감각이 들어 있어야 하고 언어의 긴축에 탄력이 수용되어야 한다. 시인은 시라는 대상을 의인화의 방법으로 바라볼 때 높고, 깊이를 심각하게 발성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시는 곧 자신의 얼굴이고 분신(分身)이고 떠날 수 없는 절대의 대상화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인은 시를 향해 온갖 언어를 동원하여 경외(敬畏)와 동경의 표정을 짓더라도 시는 항상 냉엄한 모습으로 사라지는 애달픈 시와 시인의 관계가 설정된다. 서양 철학자 비트겐쉬타인은 {파리잡는 항아리}라는 개념으로 인간의 존재를 말했다. 우리식으로 설명한다면 물고기를 잡기 위해 위쪽은 막히고 맨 아래쪽이 작게 열린 둥근 유리그릇에 된장을 넣고 물에 넣으면 아래로 들어온 물고기는 결코 밖으로 나올 수 없다. 이를 세계 내 존재- 인간은 테어났지만 지구라는 둥근 그릇 속에서 결코 벗어나는 방법이 죽음 이외엔 없다. 잠시 나갔다 들어온 허락도 없고 또 그런 여유도 없는 “속”에서 밖을 동경하면서 미지를 그리는 존재가 인간의 운명이 된다. 우주가 돌지만 도는 일로 살아야 하는 운명적 존재- 내려야 할 정거정에 옷깃을 여미며 작별해야 할 순명(順命)의 길이 곧 삶의 의미 라면 한계라는 경계는 슬픈 일정의 길이 된다. 『도랑 사구 안의 작은 우주』도 도랑 사구 안에서 드러나는 생의 다양한 모습들- 자기를 알면 철학의 완성자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나”라는 그림자를 이끌고 터벅일지라도 결코 나를 만나는 일은 거울 속의 나의 형편 때문에 결국은 실망으로 점철 된다. 이것이 철학의 종점이고 시작이라면 시는 이런 의미를 노래하는 탐구자로 이어지는 것이다. [3. 삶의 곡예] 사는 일은 시의 중심 의무이자 최종 종착지를 찾아가는 일이다. 왜냐하면 결코 버려서는 안 되는 명제이고 벗어날 수 없는 숙제의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고해(苦海)라 비유했듯 고통의 바다를 유영하는 일은 고달프고, 슬프고, 참람(僭濫)한 진행이 있을뿐, 찰나(刹那)이고 행복은 잠시의 그림자와 같은 일이 사는 일이 모두일 것이다. 돈으로 해결하는 일도 아니고, 높은 감투로 정리할 일도 아닌 오로지 스스로 힘에 의해서 헤쳐나가는 길이 다가오는 일에 대처하는 삶의 진수일 것이다. [4. 치장의 이미지화] 시라는 것은 장식의 풍경이 되기도 하며 교훈과 훈육의 역할을 한다. 하여 시는 꾸미기 이미지의 기교를 살려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리고 시는 향기가 있고 상승의 기류를 타고 다시 지상으로 내려올 때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다. 아울러 시적인 넓이는 철학적인 암시를 상징으로 상상의 나래를 펄럭이는 기쁨 또한 예외는 아니다. 또는 시를 치장하고 이미지화 시킨다 해도 가식적이거나 자기 마음의 정서가 없다면 독자의 감동받을 수가 없기에 항상 정열과 열성을 다해 신념을 갖고 응축과 다변화의 길을 열어야 하며 세상을 밝히는 시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인이 온 세상을 깨우치게 하는 에너지를 갖고 있기에 언어를 재료로 삼아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일에서 원인을 찾아 치장해야 하며 이미지화를 그리는 것이 시인 것이다. [5. 에필로그] 시는 정서의 다양화 감각을 통해 만나는 체험이며 때론 이미지가 사상 논을 가질 뿐 아니라 철학의 가치를 남기는 인생의 해석자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시는 단순한 문자의 조립이 아니라 시어 속에 강한 신념의 에너지를 가질 때 감동을 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인은 언제나 세상의 희망의 불을 태우는 인도자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작고 낮게 보일지라도 언제인가를 위한 씨앗을 놓아야 하며 여기서 다양한 생의 해석이 시적 장치를 동원하는 기교가 필요하고 치장을 어떻게 구상하느냐의 체험을 상상과 창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시인의 영역을 넓혀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감수성은 시인의 영원한 동반자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시는 사물과 대상의 이미지를 유연한 표정으로 바꾸는 정서현상이지만 때로는 딱딱하고 굳어진 것을 용해하는 정서의 촉매를 가져야 할뿐만 아니라 항상 새로운 에너지를 보급하는 통로를 확보하여야 한다. 어찌보면 시인은 새로운 표현을 찾아야 하는 방랑의 여정을 갇추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사물 관찰법과 표현의 기교를 숙고하는 일이 선행 되어야 할 것이다. 기실 육체적으로 나이가 들면 같은 용어를 되풀이 하는 것도 굳어진 의식 탓으로 돌릴 수 있기에 글을 쓸 때마다 조심스럽다. 그렇기에 감수성과 정서의 감각적인 이미지관리를 예지적인 고뇌를 언어로 포착하여 풍경화 같은 숲은 만들어야 하는 시가 가장 아름다운 시이며 독자들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나가려 한다. 2023.02.22.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빛과 풍경의 애너지] [추억의 굴레] [이승섭칼럼집]
by 수원본부장 손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