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조의 이상과 창백의 표정] 24

    1. 시심의 창조 발동

    by 수원본부장 손옥자
    2025-08-16 17:02:34

     

    [한가한 필자 호수에서]

    창조의 기교와 표정 만나기는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눈으로 보고 오는 것인지 아니면 구불구불한 길에서 오는지 그것도 아니면 직선의 고속도로 길에서 오는 것인지 도무지 오리무중이다. 그러나 이렇게 물으면 보일 것도 같고, 올 것도 같지만 사실은 그런 대답은 불가능의 안갯속에서 모호를 헤매는 일로 끝이 난다. 시인들 누구나 자기 시의 행로를 의문으로 설정한 경우가 누구나 있을 것이다.

     

    과연 어떻게, 또는 어느 순간에 시심의 발동이 시작하고 얼마 동안 의식의 중심 안에서 느닷없이 사라지는가를 헤아리기 위해 고심하고 곰곰이 않아 정좌를 해보았을 것이다. 만약 그런 고뇌의 길을 한 번도 갖지 않았다면 그 시인은 쓰는 일에만 머물고 말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를 알고 또는 정립하면서 진로를 설정하는 행로에는 어긋남이 없지만 무작정 길을 가는 나그네는 초라한 행로의 비틀거리는 주인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는 원래 고민의 산물일 뿐 아니라 때로는 환희의 풍선을 타고 즐거움과 행복을 선사하는 이중적인 표정을 관리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시는 소설과는 달리 의식으로 엮어가는 운명이 아니라는 사실은 시인의 이름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잘 알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무의식에서 충만함이 들어온, 경우도 있고 더러는 의식의 명확한 눈으로 바라보는 하이퍼의 섬세함도 구분되어야 하는 그런 알 길이 없는 단애의 벼랑에서 건져 올리는 시심도 있고 또는 평온하고 느긋한 행복 속에서 향기를 피우면서 나오기 때문에, 시는 예측 불허의 심연에서 확실히 만나는 아울러 정의하기 어려운 이름일 것이다. 어떻든 시는 순간보다 빠른 찰나를 가로지르는 섬광 같은 이름이라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토마스만은 예술가의 임무는 즉 생기(to animate)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 예술은 선에 가깝고 친절성에 뿌리가 있으며 화합을 위해 위할 뿐이다.라고 했다. 왜냐하면 시가 거창한 목표에 헌신하는 것도, 아니며 투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기력한 허무주의자의 독백도 아니다.

    생기와 발랄, 위해서 즐거움을 이어주는 때로 단순하기도 하고 더러는 복잡 미묘한 인간의 심성을 대변하는 임무에 헌신하는 일이 시인의 역할이다. 여기에는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삶의 이야기에 목적이 뚜렷하고 상상으로 떠나는 이상의 꿈이 첨가될 때 조미료의 맛깔스러움은 배가 될 것이다. 언제나 시인은 심심풀이가 아니라 꿈을 담아 대상에게 즐거움을 주는 언어의 마술사가 되어야 한다.

     

    2.그렇다면 몇 가지 조건이 수반된다.

     

    ()이란 보다자세히 보다. 보이다. 드러내다. “명시하다.”의 의미가 들어 있다.

    누가 일을 할 경우, 우선 정립되어야 할 것이 대상에 대한 목적의식이 선명할 때 결과는 더욱 명확한 답안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쓰는 것도 목적에 대한 정립이 확고할 때의 경우와 없을 때의 경우가 확연하다. 전자의 경우에는 언어의 조합일 뿐 이리저리 무엇을 시로 표현하려는 목적성에 대한 헷갈림이 나타나고 후자의 경우엔 비록 짧은 응축의 경결함의 언어에 의미의 숲을 이룩할 수 있게 된다.

    무작정 길을 걷는 나그네와 목표를 정하고 길을 가는 비유와 다름이 없다는 뜻에서 대부분의 시에 함정은 단순히 언어의 유희에 빠진 나그네들이 많다. 왜 시를 쓰는가. 그리고 무엇을 의미로 구축하는가의 대한 자문자답이 있고 난 후에 대상을 관찰하고 투시하고 난 뒤에 문자로 의식을 표현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이가 깊어지면 과거 지향형으로 바뀌고 앞에 있을 것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과거 추수의 길을 확대하는 경향이 다분하여진다. 그러나 지나치면 나태의 그물에 걸리는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개성의 문제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 고향에 돌아와 혼자 여기 서 있네.

     

    신중신 <귀향 시초>

     

    어린 시절 기억이 깊은 나이임에도 기억에서 여전히 흔적에 매몰된 시심이 아쉬움으로 나타난다. 넓고 컸던 골목이 기껏 스무 걸음 남짓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어 파릇파릇하게 고개를 쳐들었네. 의 현상으로 다가와 문을 두드린다.

    시의 중심은 혼자 여기 서 있네에 모아들고 지금은 목이 쉰 노래를 허공에 빛바랜 꿈의 파편으로 회상의 길목을 지키는 오늘의 모습이 처연해 보인다.

    깊음이 깊어지면 허무가 되고, 어느 것도, 구분하기 어려운 추상의 숲을, 소요하는 귀향의 꿈 노년의 신중신 시인은 소설가 겸 시인이며 거창에서 태어나 서라벌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개인적으로 현재 84세이니 어른으로 모시기는 하지만 시는 진솔함의 문법이라고 외친 그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3.신명과 혼

     

    하늘과 땅은 신이 만들었다고 하나 신령이라는 의미가 바로 신명, 또는 시인은 어떤 사람들인가를 자주 묻는다면 아주 쉽게 신명이 든 사람 혼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고 개인적으로 생각된다. 조금 더 풀이한다면 시인은 산문이나 소설가와는 달리 신들린 집중력을 가질 때, 시의 모습은 잠시 스치고 신기루처럼 왔다,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예를 든다면 무당들이 신이 절정에 올라와 있을 때는 맨발로 날카로운 작두에 올라 춤을 추고 굿판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신명이 아니고서는, 절대 해명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 언젠가 <그것이 알고 싶다>에 무당이 신이 오르고 있을 때, 전기를 통해 전류를 흐르게 하도 전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실험을 하였다는 T/V로 본 기억이 난다.

     

    과학으로도 증명을 할 수 없다는 것에,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 불가이다. 관습에 젖은 일반 평범한 사람들은 불가능이라 간단히 정리할 것이지만 그러나 타이타닉 호는 보이는 얼음에 충돌하여 비극을 맞은 것이다. 얼음덩어리는 70%가 물속에 있다.

    이를 관과 했기에 충돌의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시인의 의식은 바로 무의식의 깊이를 발굴하는 사람들이 시인일 것이다.

    물론 산문을 쓰는 사람들은 리얼리티 하게 그리지만, 보이는 것을, 얼마나 실감 나게 묘사하는 방법을 기술하는 작가와 시인은 이러한 점에서 크나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 논리인 것이다.

    인간은 태어난 이후 어떻게 와 무엇을 에 목적의식을 두면서 산다. 전자는 방법의 무게요 후자는 대상에 대한 구분법이 될 것이다.

    시를 쓰는 일도 이런 구분의 명확성이 곧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태를 벗어나는 첩경일 것이다.

     

    더러는 비비고 핥기도 하면서

    꼬리도 만들어 흔들어 보는 것이다

    세상 한번 편하게 살아보는 것이다

     

    최영욱 <달콤한 상상>

     

    어려운 것과 쉬운 것의 차이는 선택의 길뿐이다. 그러나 중심 잡기의 생은 기준점이 필요하고 여기서 개성은 더욱 필요의 항목이 될 것이다. 비유 개처럼 핥고, 고개 숙이고, 유순하게 사는 도처춘풍(到處春風)의 인생을 일러 개 같은 놈이라 칭하면 욕이 된다. 왜냐하면 자기가 없을 때 받는 통칭의 슬픔이며 슬픔이기 때문이다. 편하게 살아 명예를 얻으면 그 가치는 짧고, 중심 잡고 살아가면 명성이 따라오는 차이가 있다.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들의 지조는 당시는 고관대작의 삶이었지만 그 자손들은 숨기고 감추는 일이라면 어떻게 생은 필요에의 확실한 목록이다. “달콤의 망상은 쓰디쓴 아픔이 된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역설의 기교가 시인의 의도이다.

     

    4.일체화(ldentity)

     

    시의 가장 중요한 목록은 대상과 시인의 의도가 하나로 통합하는 길을 만드는 일이다. 표현하려는 사물 대상을 어떻게 의도에 충실하게 하나로 묶을 것인가의 여지는 시적인 기교를 넘어 재능으로 귀환한다.

    언어의 기교이지만 이는 정신의 기교를 뜻하고 목적성의 하나 되기라는 점에서 일체화는 동일성의 원리가 된다. 이를 위해서 시는 기교와 정신적인 면을, 필요로 한다. 언어, 리듬, 이미지, 상징, 시제, 비유의 모두를 일러 토운(tone)에 충실할 때, 시의 맛깔은 살아나기 때문이다.

    내 신발은 젖었지만, 그림자는 젖지 않았다.

    그림자가 내게 자유를 명령했다.

    몸살이 시작된다.

    아직 이른 봄, 꽃나무처럼

     

    최종월 <그림자가, 명령했다>

     

    주인공인 나는 또 하나의 그림자를 끌고 다니면서 산다. 이 녀석을 떼어버리기 위해 온갖 음모를 꾸며도 벼랑에서 밀어도, 어둠에 갇혀도 다시 살아나는 숙명의 존재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이 그림자를 무심히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존재의 형상으로 깨닫고 바라볼 때에 새로운 자각의 길이 존재 문제로 부각된다. 여기서 무심히 사는 사람과 시인의 통찰이 주는 삶의 무게는 완전히 길을 달리한다. 시인에게 필요한 사물 이면의 관찰기는 곧 시의 신선함을 부추기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5.신념(信念)

     

    시와 신념은 불가분의 개성으로 무엇에 해당될 것이다. 시를 싣는 모든 잡지에서 공통적인 현상은 음풍농월의 그저 그 풍경의 연출이 대부분이다. 이런 이유에는 여러 가지의 문제가 있을 것이지만 자기 선전의 광고문을 작성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는 시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문제와 직결될 것이다. 감상의 덪, 이미지 사용의 장식성, 관념이나 의도의 지나침, 모순이나 충돌이 내포된, 지나치게 종교적인 강조는 안 좋은 시의 표본이라는 지적은 학자들이 강조하는 요점이다. 미상불 시의 신념은 자기중심을 세우는 일이라 시의 표정에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를 관찰하는 요인이 된다.

    눈물 씨앗 뿌려도

    아직도 통일의 꽃

    굳은 땅속에서 몸부림치며

    싹을 틔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맹숙영 <그러나, 아직도>

     

    한때 민중 타령의 개구리 떼의 놀음이 문단의 중심을 장악한 것이, 80년대를 풍미했다. 그 이후 통일의 문제는 유행 목처럼 아우성이다. 목적의식이 공고하지 못한 유행의 결론이 아닌가 보는 것이다. “아직도에서 분단의 아픔은 진행형이고 언제 꽃으로 피어날 것인가는 요원하다. 필자는 일찍이 북한 무학은 선전 선동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체제의 선전 도구일 때 광고 문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이다. 그러나 우리 문학은 상업성에 혹은 노랑 매스컴에 휘둘리는 지경이 아픔이 엄존한다.

    요컨대 문학성의 가치에 방점을 찍을 때, 참된 가치의 문학으로 꽃이 피어질 것이다. 시의 제목처럼 아직도는 유행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본질로 눈을 돌려야 할 책무가 있는 것이다. 통일을 위한 염원은 진정한 우리 민족의 꿈이라는 갈증이 인상적이며 가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2025. 08.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저작권자 © 금요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전
다음
▲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