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시평

[상상의 결합과 서정의 조화]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 이승섭시인] 시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이미 시는 이미 달아나 혼비백산(魂飛魄散)한다.  그렇다고 시가 무엇인지 묻지 않으면 다시 시는 미궁의 깊이에서 서성이는 이름으로 나를 불러낸다. 시는 늘 살아있고 생명의 호흡을 날마다 호소하지만 사람은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따라 시의 표정은 각기 달라지며 감성과 정서가 많은 시인에게 가면 다른 표정과 언어로 태어나곤 한다. 그렇다면 시는 불변의 진리를 말하는 스피커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서 가장 진솔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자락 펼칠 때, 세상을 향하여 진리에 대한 표정을 관리한다.    그렇다고 시는 진리만을 강조하는 교훈이 아니라 인간의 애환에 대한 조언을 멈출 것을, 암시하지도 않는다. 때로는 삶의 전면에서 용감한 투사의 호기를 부리기도 하고 더러는 아픔을 위로하는 진정성의 말에 가슴을 치기도 한다. 결국 시는 삶의 곁에 있을 때, 시의 역할과 유용한 임무를 다한다.           한 사람에 시인의 시집은 앞에서 말함과 같이 인간이 만드는 표정의 전부를 시적으로 나타내는 기교이고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독자 감수성의 정도에 따라 시의 등급은 길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시적 작품이 탄생에서 명품은 없다. 오로지 스스로가 만드는 여부에 따른 이름이 명품일 뿐이다.                왜 그런가 하니 누가 명칭을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명품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길이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2번째 시집을 출간한 홍금선 시인은 여린 감수성과 순수한 정서의 숲이 지고지순하다.  그의 시를 보면 싱그럽고 집약성의 언어가 맛깔스럽다. 자유시와 정형시를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자유스러운 정서의 나열이 시가 될 수도 있고 정형의 일정한 형식에 내용을 담는 방법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시라는 범주 안에서는 굳이 구분의 칸막이가 필요치 않다는 말이다.  문제는 독자가 읽어 감동, 받을 수 있다면 어떤 것이든 시의 맛은 화려한 감동이기 때문이다.               2. 숲의 향기는 어디서 오는가                  1) 정서의 특질        시의 구성은 시인의 정서가 이미지로 형상화할 때, 이미지의 구축에는 설계로의 얼개가 만들어지고 여기서 시인의 의도가 진로를 찾아가는 것이다. 이때 한 편의 시는 시인 자신의 표정이고 사상을 나타내는 시인 정신에 집약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시는 곧 응축이라는 언어의 절약과 그 탄력으로 튕겨 오르는 리듬의 연주가 되는 것이다. 이것저것 섞어서 만드는 잡다한 것이 아니라 정제되고 질서 있는 풍경화 혹은 치밀한 구도 속에 언어의 탄력이 튕겨 이미지의 숲을 만들어야 한다면 홍금선의 시는 그런 욕구에 적절히 부응하는 시가 숲을 푸르게 하고 있다.        가볍게 주섬주섬 온기로 녹이는 마음 빈, 공간 그득히 반질반질 후원하게    `   돌아보며 빙그레 닦아 보는 너                                 <마음> 중        원래 시의 특질을 토운(tone)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시적 장치와 특징을 모두 담아서 말하는 총체적인 의미를 말한다.  왜냐하면 단편적인 특징이 아니라 종합적으로 어조, 소리, 음조, 신호 등으로 해석되지만 시에서는 부드럽다거나 아니면 딱딱하냐, 혹은 냉정한가 또는 직선적인가 등을 의미하면서 한 가지 방향으로 지칭하지 않는다. I. A Richards는 의미와 감정, 의도와 더불어 시의 총체적인 의미라 했고, 르네 웨렉과 윔셑은 “내적 형식”이라는 말로 구분했으니, 한 가지로 특징을 요약하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시의 총체적인 것을 말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는 시의 “목소리” 즉 화자의 목소리를 의미할 때 곧 화자의 어떤 특성이 나타나는가의 문제를 지칭하는 것이라 달리도 말한다. “마음”을 나타내는 방법은 산문적인 장광설도 있고 또 단순하면서 명쾌한 선적(禪寂)인 고요한 방법이 있다면 홍금선의 정서는 후자에서 그의 시적 특성이 집약된다. 시의 중심 언어는 “마음”이다 “가볍게”와 “주섬주섬”을 모아 “빈, 공간을 그득히” 더불어 “반질반질”과 “훠언하게”의 결합에서 어둠이 없고, 밝고 환한 경치가 눈앞에 펼쳐진다.  “빙그레”의 표정에서 시인의 정신이 있어 밝고 투명하고 구김살 없는 정서의 유로(流路)가 아름다움을 남긴다. <마음> 시는 도합 40글자로 되어 있지만 구성된 이미지는 여러 개의 갈래로 파생되는 기교는 시인의 시적 능력을 뜻한다. 이런 특징을 강조한 이유가 함축된다.              하늘을 보노라면 발그레한 노을 물결로 일렁이고  파랑, 파랑 자죽자죽 여울지는 길을 따라  두런두런 하늘 붉은빛 원을 그린  먼 곳 머물고 싶은 마음속 풍경화                                <노을 길> 중                  시란 시인의 마음을 그림으로 그리는 풍경화 - 이때 시의 특성 중에 회화 즉 (phanopoeia)를 대입할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읽어 그림을 연상하는 일은 의미와 리듬과 3대 요소라는 점에서 필수적인 이미지 구축술이다.  “노을이 물결로 일렁이는” 연상은 고요와 더불어 따라오는 소리의 겹침이 연상 작용으로 이어진다. 또한 <노을 길>의 가장 백미이다. “파랑파랑”과 “자죽자죽”에서 언어의 특징이 한몫으로 드러난다. 이런 언어의 감수성을 터득한 시인의 시적 능력은 감각적인 언어의 탄력을 싱그러움으로 살아나게 하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흔히 서정시의 특징을 말하면 자아의 세계와 일체화를 이룩하는 방법론과 주관이나 객관 또는 이성과 감정이 하나로 통합되는 서정적인 자아의 확립을 motto로 나아가는 정서에는 유연한 감성이 파도를 일렁이게 만들어 논을 하는 필자도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낙엽> <단비> 풍경> 등 다양한 시가 많지만, 그것을 모두 논한다면 양이 너무 많아 간단하게 그의 주요 부분만 언급하였다. 다만 시는 절망과 아픔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길이라고 늘 말을 하지만 그러나 시는 아무런 힘도 없고 명예도 아닐 것이지만 아픔이나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한 편의 시는 용기와 희망을 주는 에너지이기에 더욱 위대한 힘을 가진다는 뜻이다.            시는 그렇기에 문학이라는 맨 앞자리에 놓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반인은 모르고 지나가는 일이지만 시인은 그것을 낚아채는 것이 시인이다. 무심히 지나가는 담쟁이넝쿨의 모습에서 삶의 길과 운명을 개척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는 것도 시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독자가 시 1편을 보고 느끼는 희망의 담금질을 하는 행위와 표현에서 악착한 삶의 길을 펼쳐야 하는 이유와 기운을 받는 것도 독자의 몫인 것 - 시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행운이라는 뜻이다.                 3. 에필로그- 독특한 상상의 표현 압축                   시인의 시적 언어 감각은 탁월한 것 같다. 특히 서정성의 부드러움과 자아의 대상을 독특한 언어로서 조화를 이끌면서 풍경화를 그리는 섬세함과 솜씨는 일품이라고 장담한다. 더구나 언어의 직조에 번지는 묘미와 응축을 통해 이를 탄력으로 이어지는 상상의 길은 그만의 성을 구축하는 구상이면서 특징이라 하겠다. 이번 2번째 시집을 출간하면서 꾸준한 열성으로 이어진다면 우리 시단의 돌풍과 더불어 무서운 기둥 역할을 할 것이라고 느끼면서 나가려 한다. 앞으로 두고두고 볼일이 아닐까 하면서 말이다.      2025. 08.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투명의 변증과 사랑, 헌신]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시는 의식의 토로를 거쳐 나오는 질서 현장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시인 자신의 체험이 바탕을 이루면서 상상력의 조력을 받을 때, 일정한 질서의 규범을 갖추면서 시인의 정신세계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이런 전제하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삶의 방안을 찾으면서 의미의 조직화에 혼신을 발휘하려 한다. 더러는 성공한 사람도 있고 도로(徒勞)에 그치는 행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명망을 얻거나 그 반대인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며 다만 새로움을 찾아 자기만의 성을 구축하려는 일상의 노력이 가상한 것이지 유명의 대열과는 별로 의미가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유명이란 말은 부풀어 오른 거품 현상이지 자신의 참된 의미와는 무의미할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일도 그렇다.     생(生)이라는 고해(苦海)의 바다에서 오로지 자기의 정화 혹은 순수 수양의 도구일 때, 시의 가치는 참된 자기와 만남 혹은 그런 표정을 연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때문에, 시를 쓰는 일은 진실 혹은 순수와 대화를 나누는 일에 한정된다. 자기 삶의 오뇌(懊惱)와 고통 신산(辛酸)한 생의 이름들이 모여 순화의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시는 아름다움을 손짓하는 가락으로 탄생될 수 있는 역설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청탁의 의해, 서문용 시인의 시를 접해본다. 그의 시는 헌신과 사랑 그리고 삶에 대한 성찰 혹은 자기를 돌아보는 닦음의 소재가 의식의 통로를 통해서 가락을 형성한다. 물론 저변에는 부모나 고향의 정서 또한 시의 원형을 이루는 표정에도 따스한 햇살이 다가든다. 이제 점검의 코스를 통해 정신도(情神圖)를 확인해 보기로 하자     2. 거느린 의식들   1) 헌신의 소리   낮은 자세로 흐르는 물은 속성이 겸손하다. 거스름이 없다는 것은 달관의 높이와 경지를 점했다는 의미가 되지만 인생에 커다란 교훈으로 남을 것이다. 지배보다는 헌신이고 교만 보다는 겸손을 앞세울 때, 사랑의 마음이 깃들게 되고 사랑의 넓이는 따스함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Van Gogh가 파리 시대에 그린 『Lee Souliers』라는 작품이 있다. 한 켤레의 농부화에서 서럽게 살아온 농부의 슬픈 삶에 고달픔과 생의 아픔이 낡았고 지친 표현의 구두에는 충분히 담겨 있다. 더구나 Gogh가 그린 『La Chaise De Vincent』 또한 딱딱하고 비뚤어진 의자 모습에서 삶의 고단함을 유추하는 일은 너무도 쉬운 일이다. 이런 일의 작품은 작가의 모든 생을 압축하는 일이기 때문에 결국 체험과 상상력은 작품과 밀접한 상관 하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언제나 내 발을 꼬-옥 껴안는다   무덥고 지쳐도 언제나 내 편인 남 보기 부끄러워도 전혀 싫은 내색 없다   가다가 쓰려져도 제 몸 다 닳고 헤어져도 원망 한번 하지 않고 언제나 보살핀다.   마음도 넓고 고운 아프지도 않는 봄 화신처럼 언제나 나를 지켜준다.     『내 신발』 중   시인이 시집을 상재(上梓)할 때 의도적으로 작품의 순서를 배열하는 일은 독자의 첫인상을 휘어잡으려는 발상에서 맨 앞자리에 있는 작품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머리 위에 모자로부터 발끝을 지켜주는 신발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감싸고 의상은 다양하다. 그러나 의상과 어울리는 신발의 모습- 깔끔하면 그 사람의 인상은 멋진 사람으로 인식을 심고 지저분할 때는 흐린 인상을 각인 시켜주는 일은 인상에서 좌우되는 현상이다. 앞에서 고흐가 그린 농부화에서 삶의 고단함과 서글픈 농부의 등식처럼, 시인과 구두는 비교 가치가 연결된다. 시인의 약력에서 느끼는 일이지만 그는 중앙부처의 공무원으로 봉사와 헌신을 좌표로 삼고 살아가는 일이 삶의 방편이다. 공무원은 국민을 위하여 가장 낮은 자리에서 봉사하는 자리일 때, 그의 임무는 비로소 화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신발은 곧 공무원이고 그 신을 신고 있는 사람은 국민이기 때문에, 신발은 어떤 경우에서나 주인을 위해 아픔을 참고 끈기 있게 “너를 지켜준다.”라는 임무에 헌신해야 한다. “가다가 쓰러져도/제 몸 다 닳고 헤어져도”의 무한 성실을 다할 때, 국가와 민족의 미래가 보이는 희망처럼 서 시인의 마음에는 희망의 푸른 이름이 빛나고 있다. 그러나 봉사와 헌신은 때로 고독할 수가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이타행(利他行)은 자기를 희생하는 기본 바탕에서만 성립되는 Eros적인 희생이기 때문이다. 햇빛은 날마다 항상 변함없이 환한 웃음을 선물하고 우리는 그저 받기만 한다   세상 인연 맺은 날로부터 이 시간까지 무한 사랑 에너지를 주었지만 우리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빛은 우리를 향해 행복하게 살라고 알려 주지만 그 의미를 모르고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     『날마다 감사에서』     사랑이란 대상과 대상의 교감이 성립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이치처럼 헌신과 봉사에도 그런 교감은 필요할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일방적일 경우 짝사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신에게 드리는 기도 조차도 응답을 기다리는 신도의 자세처럼 봉사에도 일정한 대가는 보여야 할 것이다. 시인은 햇빛의 일방적인 사랑에 “우리는” 감사함이 없이 마냥 받고 돌아서는 일에 서운함이 있을 것이다. 몰이해는 실망과 고단함이 따라올 것이지만 조건 없는 사랑을 펼칠 때, 아가페적인 무한의 사랑은 고귀할 수 있다면, 일방적으로 받아서가 아니라 주었을 때, 비로소 빛나는 가치로 돌아서는 이유를 도외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2) 사랑의 이름   시인은 사물을 바라보면서 사랑을 숙고하면서 또 찾아 나서고 그것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가의 신명을 바치는 사람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곧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고 자연을 끌어와서 인간과 하나로 통합하는 일을 대신하는 사람일 때, 시는 고귀한 가치로 표정을 갖게 된다. 서 시인은 가장 많은 시적 정서가 사랑의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말을 바꾸면 인간을 사랑하고 자연과 상대를 하나로 묶어 평화로운 땅을 만들 때, 그의 시는 공고한 성주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음에 목표를 설정하고 있는 시인인 듯하다. 『사랑하라』 『당신은』 『사랑하고 싶다』 『사랑의 꽃』 『하얀 눈』 『빈 의자』 등은 사랑의 이미지가 번다, 하게 들어 있다.   시는 체험의 요소와 상상력 그리고 의미와 신념이 교직(交織) 되면서 한 편의 시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에 결국 생각의 방향과 의지가 시화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면 사랑의 감수성이 많은 이유는 시인 정서의 모두가 그런 방향으로 설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시인의 내적 고백이며, 이 고백은 진실의 함량이 우선하기 때문에 독자의 심금을 울릴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 인간들 앞으로 살아갈 시간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아 행복하게 살라 서로 행복하게 살라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며 살라 행복하고 사랑하라   『사랑하라』 중     “살라” “하라”의 형태로 사랑을 명령으로 강조한다. 이런 태도는 독자에게 위압적이고 때로는 독선적인 함정이 될 수도 있지만 합리적이고 타당했을 때는 오히려 감동의 작동 원리로 드러날 수가 있다. 시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진리의 정직을 외면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들”에서 누구든지 해당될 수 있는 3인칭 복수의 지시적인 시어에서 사랑을 이룩하면 행복해지는 등식이 전개된다. “하라”와 “살라”의 명령어가 거북스럽지 않은 이유는 사랑이 곧 행복으로의 길을 만들고 있다는 이유에서 시의 묘미는 한층 밝음을 주는 역설의 기교가 된다.   사랑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개된다. 포용의 기대감도 있을 수 있고 하나로 결합하는 통합의 일도 기대되고 또는 포로 의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면 서 시인은 저축의 의미- 복리의 계산으로 부풀어 오르는 무한의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어느날 내게 당신이라는 은행이 하나 생겼어요. 장기간 복리로 사랑 계좌를 만들었어요.   당신이 내게 사랑이라는 원금을 보낼 때마다 고스란히 입금 시켰어요.   『사랑은 만삭』 중   매우 신선한 사랑법이다. 많은 시평을 썼지만, 사랑을 은행에 저당하여 복리로 부풀리겠다는 비유는 서 시인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시는 비유일 뿐만 아니라 상징의 도구를 통해 언어의 신선함을 위해서는 심지어 언어를 버리면서 언어를 획득하려는 역설의 기교까지 동원한다. 은행의 이름은 당신이고 시인은 사랑의 계좌에서 수시로 입, 출금이 들락거리는 것이 아니라 복리를 위해 장기간 계약이라는 점에서 사랑의 가치가 한층 고조된다. 더불어 당신이 사랑이라는 “원금”을 보내올 때 “고스란히 입금시켰어요.”의 진솔성은 사랑의 가치가 얼마나 지고한가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사랑은 계산이 아니고 오로지 저금하는 일이라는 의미에서 뒷날 받을 자산 가치는 화려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곧 행복이라는 궁극의 지점에 도달함을 뜻한다.     내게 오는 시간을 듬뿍듬뿍 토막 내어 빈 의자에 올려놓고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빈 의자』 중     사랑이 기다림이라는 말은 사랑의 깊이와 비례하는 암시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대상의 마음이 허락의 시간까지 기다림이 있어야만 사랑의 진정성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사랑은 기다림에서 진실의 불을 켜는 시간 앞에 엄숙한 마음을 가다듬고 긴 시간을 의미로 채우려는 발상이 지극하다. 다음은 포로(捕虜 의식이다.     오늘 하루 이십사 시간 전 시간을 정지시키고 싶다.   혹 저 멀리 떠나간 내 님 마음 변하여 되돌아오면 내 쳐놓은 그물망에 걸여 오도 가도 못하게 가두고 오랫동안 묶어두고 싶다.     『사랑의 그물망』 중   사랑의 포로라는 의미를- 앞장서서 오히려 그물로 대상을 포획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강압적인 방법- 이런 강압의 방법은 그 농도에 따라 비례하여 진실함을 나타내는 언어의 기교일 뿐 실제로의 행위는 물론 아니다. “혹” 저 멀리 떠나간 “내 님”이라는 가정의 상태이기 때문에 쳐놓을 그물망은 기대할 수 없지만 대상을 사랑하는 깊이가 얼마나 진실한가에 이르게 된다. 사랑은 어떤 방법이든 진실- 때로 진실이 불통의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서 시인의 사랑 법은 가능한 한 이룩하고 싶은 열망의 농도와 상관이 있는 것 같은 비유를 모두 동원한 인상이 특이하다.     3) 고향 그리고 부모     인간의 근본은 뿌리를 아는 일일 것이다. 이 출발은 부모로부터 시작하고 다시 고향의 이미지로 전개될 때 나의 모습은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물론 친구도 있어 추억의 이름이 더해질 때, 생은 풍윤(豐潤) 해질 수 있게 된다. 작고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먼 나라의 아버지』, 『아버지의 영상』 그리고 『어머니의 모습』 또한 고향을 생각하는 『고향 무정』 『밤하늘 친구』 등 고향에 대한 추억은 많은 편은 아니다. 이런 이유는 “오십 성상 세월 망각한 채/고향길 달려가서/그때 밤하늘 쳐다 보았네.”(밤하늘 친구)처럼 오랜 세월 동안 단절된 그리움이 있을 뿐 특별한 추억의 이야기는 감춰져 있다. 오십 년이라는 긴 세월의 단절에서 추측의 길이 암시될 뿐이다.     오늘따라 이마엔 골 깊은 주름살이 큰 고랑 선명하게 드러나고 생살 도려내는 아픔처럼 마음이 아프다.   『어머님 모습』 중   “오늘따라”에서 현재의 상황이 느껴진다. 그러니 주름살 낀 어머니의 모습에서 통증을 느끼는 효심에서 느끼는 인상은 가슴으로 따스하게 전달된다. 자기의 원형인 부모에 대한 마음에 통증이 클수록 스스로 모습은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커지는 것 같은 형상이다. 효도는 곧 자기 사랑과 같은 이치이기 때문이다.     먼 나라 계신 아버지 보고 싶습니다. 세상살이 벅차고 힘들 때 더욱 보고 싶습니다. =중략=   『먼 나라 아버지』   부모는 자식의 반면교사가 될 때, 교훈이라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 엄격하고 강인함을 요구하는 아버지는 때로 외로운 모습이 될 때가 많다. 그러나 아버지가 부재할 때, 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먼 나라에 계시는 아버지가 “밤에 몰래몰래 변신하여 오시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생전의 가난조차도 물려준 아버지를 이해하는 가슴에 그리움이 애절하다.     3. 에필로그 (시 정신의 골드)   1) 사랑은 헌신에서 나오고 헌신은 더 큰 사랑의 길을 내는 길이 만들어진다면 서 시인의 시는 순수와 투명이 남다르게 시의 표정을 밝게 한다. 이는 삶의 질료(質料)가 되기도 했으며 평생을 지속하는 삶의 에너지로 작동되는 것 같다.     2) 호수의 아름다움은 관조의 경지에 이를 때라야 하늘이 보이고 맑은 바람조차 시원한 행복을 줄 수 있다면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끝없는 자기 수양 혹은 정화의 노력이 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시인은 이런 이치를 수행하는 행동의 모범이 날마다 거울 보기 혹은 구두를닦으면서 지혜를 축적하는 비유로 나타난다.   3) 생을 지속하는 데는 정답이 없지만 자기 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절제와 균형을 갖추는 삶에 모습이 투명해야 한다는 조건 앞에 시인은 당당하다.   4) 사회에 불합리에는 몸살을 앓고, 옳은 것을 위해 신명을 바치는 자세가 환하게 보이는 정신은 바로 서 시인의 시 정신을 이룩하는 원천이면서 삶의 지표로 적용되는 건강한 시인 서 시인의 시는 그렇다.*     2025.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저서]   [필자저서]  

[고독 그리움과 서정의 깊이]

  [어느 호수 필자] 아름다움에 대한 대명사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꽃을 말할 것이고 더러는 자연의 신선한 모습에 탄복을 발언하는 사람, 혹은 피어나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명백한 일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목록들이 첨가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중에 시- 시의 아름다움도 빠질 수 없는 이름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꽃의 아름다움은 직관의 시선에서 나오는 감성이라면 시는 지적 감수성의 깊이에서 나오는 느낌이기 때문에, 생각을 더 해야 하고 다시 분석하면서 얻어지는 지성적인 아름다움의 지칭- 시는 심리적인 반응이 길고 또 판단의 정상적인 가치 혹은 순수한 지성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의 인식은 정서적 감동과 조화의 길이 상관을 맺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는 지적 인식만을 앞세울 땐 자칫 어지러운 함정에 빠져 도그마의 편견을 갖게 된다면 그건 시가 아니라 딱딱한 돌을 만지는 설명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지성과 감성의 조화에는 시적 묘미의 깊은 맛을 부추길 수 있게 된다. 시는 조화의 미학이기 때문이다. 시는 일정한 거리만큼 떨어져서 바라보는 아름다움이다. 너무 가까이 가면 아름다움의 실체가 흐리게 되고 또 멀리 자리잡고 바라보면 분간하기 어려운 사물로 둔갑하기 때문에, 균형이 있는 정서를 대동하고 목 좋은 자리에서 감상하는 행복이 조건으로 갖춰져야 한다. 이를 감상자의 태도라 칭하면, 생산자인 시인은 고뇌와 아픔 그리고 탄식을 조합하여 아름다움을 생산하는 사람이 시인일 것이다.   김정석의 시에서는 요란함과 군더더기가 없으며 고요하고 금도를 지키는 정신의 고양을 대면하면 올곧은 정신이 숨 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고독의 깊이에서 그리움을 보내는 여린 정서가 보이기도 한다. 아울러 나이테나 세월의 깊이에서 오는 이별의 아쉬움이나 돌아보는 생의 소회 등이 어우러져 파노라마의 의식을 보여준다. 더불어 근엄한 시적 태도는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관조하는 시선에는 정감이 흐르고 있음을 보게 된다.     2. 감각 서정, 정서의 감성     때로는 시는 감각적이어야 하며 정서를 풀어내는 감수성이 시인의 재능과 일치하는 점을 가질 때 시의 묘미는 아름다움과 보조를 함께한다. 김정석의 시에는 그런 감칠맛이 들어있고 의미와 가락의 조화에는 시조가 갖는 정서의 증폭에 일조하는 느낌을 배가하게 된다.   시조의 태생적인 특성이 가락 위주였음은 누구나 알 것이지만 자유시와 경쟁 구도를 갖춘 이후에 시조의 자리는 의미와 가락을 함께 담으려는 데서 위축되거나 정체 혹은 현상 유지라는 점에서 답보에 머물고 있음이 현재의 시조일 것이다. 왜냐하면 시조와 자유시의 경계가 엄존할 때, 오로지 정형에만 특징을 붙잡아 두려는 데서 시조 시인의 노력 없음이 더 하다, 라는 느낌이지만 그러나 김정석의 시(詩)- 시조라는 구분의 말이 없으면 자유시와 다름이 없는 재미에 빠지게 된다.     자분자분 정을 주는 속살속살 비가 온다 산당화 살진 볼에 목덜미가 간지러워 배시시 왼고개 들며 알 듯하게 웃고 있다.   숨겼던 사연들을 당사실 올로 감춘 안으로 차오르는 고요의 살 핏줄에 들릴 듯 사랑의 밀러 봄 기별이 바쁘다.     『입춘 부근』     지극히 감각적이고 서정적이면서 의인법 혹은 동음 반복에서 나오는 가락은 여유가 있고 맛깔스러운, 뉘앙스를 전달한다. 언어를 비틀거나 완곡하게 조종하는 것이 아니며 유연하고 부드럽고 그러면서 반복적인 시어의 배치가 매듭 없는 마치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에 오르고 소요하는 인상을 준다.     “자분자분”과 의성어 “속살속살”에서 나오는 여운은 의미의 중첩- 속살속살은 내면의 부드러움이면서 가는 빗소리- 왁자한 비가 아니라 소곤거리는 암시를 포개는 인상을 준다. 비가 내리는 날은 무겁고 우울한 기분이 점령하지만 김정석 시인의 비는 무겁고 칙칙함보다는, 귀엽고 산뜻한-     “목덜미가 간지러워,”와 “배시시” 웃고 있다는 시어의 조합이 가벼우면서도 경박하지 않고 흩어진 것이 아니라 정리된 의미로 옷을 입어 밝음의 상태를 전달한다. 이는 시의 전체적인 표정이 밝아 봄의 정서가 살아나는 것뿐만 아니라 산당화가 사랑의 모습으로 전이되는 풍경이 따스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우수 지나』 『해당화』 등은 김정석의 서정적 이미지가 드러난 수작으로 시인의 재능과 원숙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3. 문법 희망     절망에서 희망 그리고 아픔에서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시의 본령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꿈과 사랑 그리고 희망의 미래를 말하는 손짓이고 예지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곤궁하고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는 불빛의 역할을 하는 일면 평화로울 때는 화려한 장식으로의 소임은 시가 갖는 본령이고 시의 역할에 주된 임무일 것이기 때문이다. 시의 특징을 Ambiguity에서 찾는 것도, 시가 천의 얼굴을 소유한 보살의 역할처럼 다양한 표정을 내장했을 때, 비로소 시의 기능은 희망의 문법을 완수하게 될 것이다.     떠날 수도, 주저앉아 쉴 곳도 없는 세상 촘촘한 눈빛 시린 볼모의 공간에도   봉곳이 예비한 가슴 신들의 꿈은 있다.   지상에 널브러진 오탁의 그림자도 한 켜를 걷고 보면 땅줄기의 물이 올라   신들의 영혼을 닮은 꽃으로 피어난다.   『해토머리』 중   매우 질서 정연한 과정으로 엮어진 시이다. 즉 1연에는 시련과 아픔이 따르는 “볼모의 공간” 2연은 “꿈”을 말하고 3연은 “땅줄기 물이 올라” 4연에서는 비로소 개화의 의미가 완성으로 이어지는 “꽃”에 최종 목적이 발현된다. 시련, 꿈, 희망, 꽃으로의 4단계 진전은 삶의 원리를 대입해도 정확한 일정이 된다. 시는 비유로 진실을 말하는 기교라면 김 시인의 시조에는 녹아있는 삶의 진수가 담겨있다. 이는 생을 통찰하는 그리고 명상에서 건져 올린 정서의 내공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오랫동안 훈련된, 그리고 시의 장인만이 이룰 수 있는 언어 기법인 것이다. 이럴 경우 시와 정신의 결합이 공고했을 때 비로소 시의 속살을 꽉 채우는 의미에 도달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시인의 정신을 나타내는 민감한 온도계와 같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시는 곧 시인의 삶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표정이기 때문에, 그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생각으로 오늘을 바라보고 내일을 생각하는가의 조차 파악되는 길이 담겨있게 된다.   가슴에 물을 담아 배를 하나 띄울란다. 구름 걷고 맨손으로 밤마다 별을 따는 봄 한날 살가운 저녁 조각달과 같은, 그런   가슴을 새로 닦아 이름 하나 새길 난다. 차운 밤 따스하게 황 촉 밝혀 뜨고 몸으로 몸을 태우는 목이 가는 여인, 그런   『가슴을 새로 닦아』 중     별과 달은 어둠에서 좌표의 길잡이가 될 뿐만 아니라 생의 궁극을 말하는 의미조차 내포한다. 그러나 달과 별은 어둠을 전제로 했을 때, 빛의 의미를 구가할 수 있고 희망에의 노래가 합창될 수 있기 때문에 『가슴을 새로 닦아』는 어둠을 생략하고 밝은 빛과 달을 전면에 포진 시키는 기법을 보이는 시가 된다. 2연에 “가슴을/ 새로 닦아/이름 하나 새길란다.”/를 위해 “황 촉”을 켜는 빛의 단계로 진입하기 때문에, 시적 균형이 안정감을 가지면서 의미의 확장을 이룩하는 기교가 환해 보인다.     4. 고독과 황혼의 여운   김정석의 시적 표정은 겉으로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고독과 이별이 교차하는 모습이 다소 쓸쓸함을 느낄 수 있다. 아무래도 나이의 깊이에서 오는 감수성이 용약(勇躍)하는 정서이기보다는 가라앉아 차분하고 쓸쓸함- 황혼의 풍경이 다가든다. 시는 시인과 정서의 일체화를 이루기 위해 사물을 앞세워 비유라는 도구를 사용하면서 자기로 돌아가는 설명을 상징으로 처리한다는 일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적절성의 비유에는 음식의 맛깔스러움을 더하는 역할과 같기에 곰삭은 지혜가 들어 있어야 한다면 김정석의 고독은 현실에 대한 반응이 꾸미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움과 같은 이치로 보는 것이다. 선홍빛 물든 잎에 얼굴을 대어본다. 잎맥을 타고 흐르며 어질게 늙는 소리 세월의 등성에 누워 감빛 놀만 담고 있다.     『두 겹 다리 위에서』     사물의 모습을 소리로 듣는 시인의 귀 밝음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보아야 할 것들이 소리로 다가오는 일은 체험과 세월의 깊이에서 알아차린 쓸쓸함이다. 뼈와 뼈가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귀에서 들리는 이명의 낯설음, 아울러 시야에 다가온 흐린 사물의 윤곽들이 시인은 소리와 직결되는 환청으로 들을 수 있을 때, 마치 멀리 떠나온 것 같은 소회에 잠길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더불어 달빛에서 소리를 듣는 일이나 꽃에서 아름다운 연인의 음성을 유추하는 일은 시인의 주된 상상의 깊이와 연결되는 작업이다. “잎에 얼굴을 대어볼 때.” 들리는 “어질게 늙은 소리” 앞에 어떻게 삶을 진행하는가의 숙제가 “어질게”에 모아든다. 즉 “어질게 늙음”과 “감빛 놀”이 아름답게 결합하는 방법을 찾는 도정에는 쓸쓸함과 고독이 다가올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하면 둘의 이미지 모두 종점 의식을 암시하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난 바다 물금 넘는 한 사내를 본다 영토를 잃어버린 알 섬 같은 사내를   하루가 전광을 거두는 구부정한 저녁나절     『가을 낙수』 중   수평선을 바라보는, 그리고 영토를 잃어 절망에 의상을 슬프게 걸친 사나이의 모습- 무인도의 비유에서 처절한 표정의 슬픔을 읽는다. 더구나 하루가 마감되는 황혼 무렵의 구부정한 저녁나절은 곧 시인 자신을 보여주는(showing) 풍경이 서러움을 배가 한다. 인간은 언젠가는 혼자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을 유추하면서 깊게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면 숙연한 정감이 눈물을 불러오게 된다면 김정석의 고독은 황혼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홀로 서 있는 모습이 오히려 은은하고 정 깊은 풍경화가 되는 것은 아닐지 고독은 자기 찾기이고 자기를 찾아가는 일은 삶의 모습을 어떻게 그림으로 아름답게 표출할 것 인가의 기교적인 일이 될 것이다. 생의 궁극이 곧 아름다움을 연출하는데, 목표가 있다면 젊음에서는 젊음의 미가 있고 시니어는 시니어의 표정이 있을 수 있다.   아무런 욕심 없이 그린 그림으로 김정석 시인이 그리는 생의 그림은 담담한 수묵화이면서 철학이 담긴 풍경에는 그 성품의 모습이 고독한 그림자를 이끌고 가는 황혼의 자화상에 여운이 너무 긴 것은 아닌지     5. 이별의 소리   회자정리의 이치는 인간만이 갖고 있는 정서는 아니다. 우주의 섭리라는 생로병사의 윤회를 굴리면서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다시 돌아오는 바퀴 속에서 존재라는 이름을 키우게 된다. 석가모니의 고뇌는 곧 그런 이치를 가장 순수하게 설명하기 위해 한 방편으로 정확한 이름표를 달고 있다.   만남에는 즐거움이 따르며 반면 이별에는 슬픔의 강물이 수런거리는 일은 억만년 인간의 역사가 축적한, 슬픔의 기록일 것이다. 이별 앞에서는 누구나 답안지를 찾을 수 없어 두런거리고 슬픔의 깊이에 빠지게 된다. 그처럼 김 시인의 이별에는 건너지 못하는 미련의 줄기가 뒤따르면서 가락으로 형성되면서 길을 찾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한 사나흘 질긴 비로 봄눈은 트겠지만 아파서 자라는 고독 먼 폐가를 돌아 나온 바람도 어깨 걸려 곡비(哭悲)처럼 울고 있다. 지우면 지울수록 꽃고무신 갈아 신고 출구가 막힌 회안 나선으로 감고 와서 추억의 물목에 앉아 눈뜬 자정을 지킨다.   『이별 이후』     이별의 구체적인 사유는 알 수가 없다. 누구인지 그리고 언제 이별의 사건이 시인을 슬픔의 강물을 띄었는지- 그러나 시는 리얼함을 나열하는 글이 아니고 상상의 생략 혹은 사실에 상상의 옷을 입힐 때, 더 넓은 상상의 반경을 소유할 수 있다면 시인의 이별은 “아파서 자라는 고독”과 “곡비처럼 울고 있다”에서 슬픔의 농도가 처절함을 느끼게 하지만 지적인 제어로 매우 고단함을 주게 하는 인상이며 더불어 “지우면 지울수록” 다가오는 기억들은 추억을 부추기는 이름이 되어 “눈뜬 자정을 지킨다.”에서 불면의 함정에서 어찌할 수 없는 각인의 이름 앞에 흐느끼는 여운이 길게 느껴진다. 그러나 드러나는 이름에서는 허무와 함께, 동행 모습이 보인다.     6. 에필로그(가슴의 풍경화)   시는 언어가 아니라 시인의 가슴을 열어 보이는 풍경화라는데 이의가 없다면 김정석 시인의 시에는 한국 시의 서정이 숲을 이루면서 시원하고 삽상한 바람을 미소로 건네준다. 이는 표현의 깊이를 간직한 셈이고 여기서 시의 숙성은 곧 체험과의 조화를 느끼게 한다. 아울러 대상을 바라보는 날카로움의 시선을 사랑으로 감싸는 동화에서 형식의 절제와 언어 탄력을 수용하는 미감과 내용의 무한성에는 여유로운 감상의 길이 보인다.   고독과 허무 의식 그리고 그리움의 표정을 나타내는 기법이 시적 기교의 무아경을 방문하는 소감처럼 객관적인 표현일 때, 더욱 친근감을 전달하고 있다는데 방점을 찍고 싶다. Allan Tate가 말한 “문학은 인간 경험의 완전한 지식이다.에 미감을 더한 소득이 따라오는 감동의 시인 김정석 시인이 그렇다. 라고 말하면서 나가려 한다. 참으로 대단한 시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느끼며 정서적 감성을 느끼며 오랜 체험의 체취를 맡으며 에필로그 한다.     2025.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필자 저서]            

[호수의 담긴 하늘과 노래 향기]

  [천계단의 필자] 시를 쓰는 일이나 살아 가는, 일이나 구분에서는 다름이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시 또한 유기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에 생로병사의 과정이 인간의 생애와 유사하다는 점을 건론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의 표정은 삶의 표정과 같이 진지하고 때로는 땀을 흘리는 표정도 감지되고 더러는 생의 화려함을 대변하는 가락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때,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반응을 갖게 된다.   시가 독자에게 감동을 전달할 수 있음은 인간의 감정과 반응의 감수성과 유사성을 가질 때 인간은 시에 열정을 투사하면서 감동의 종점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감동이란 결국 인간의 정서와 시적인 정서가 함께 매칭되었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상징성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빛- 밝음이면서 의미요 가치의 개념으로 환산되는 상징에서 시의 가치는 인간의 가슴을 장악하는 가락을 만들 수 있게 되기에 시인은 빛을 만드는 자요 삶의 의미를 고양하는 점에서 頂點을 향한 노력이 투척 되어야 한다.   그러나 삶의 의미 그리고 생의 심사(深思)한 명상의 숲을 지났을 때, 비로소 의미와 빛을 알아 차리는 인간의 체온을 가져야 한다. 따스하면서도 때로는 이지(理智)의 냉엄한 잣대를 가지고 사물과 대상을 투시하는 눈을 가졌을 경우 시의 이미지를 조종하고 창조하는 사람의 체온을 가질 수 있고 또한 유지하는 정감의 소유자라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은 초감각 또는 범상한 의미를 위해 자신을 망각하면서 인간의 의미를 위해 의복을 제작하는 창조자라는 뜻이 곧 유기체를 창조하는 인간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정다감하고 따스한 김정옥의 온화함으로 연결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물을 대면하면서 살아가는 생명의 소리가 들리는 창조의 입구를 장악하고 있다. 이제 그의 시적 특성이 독자 앞에 어떤 소리로 다가오는가를 살피기로 한다.       2. 감수성의 표정     1) 자기만큼의 그릇     인간은 자기만큼 살고, 자기만큼 표현하고, 자기만큼의 한계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지나간다. 다시 말하면 자기라는 그릇을 가지고 그 그릇에 의미를 채우는 일이 고작일 뿐 과욕은 넘치게 되고 부족은 갈증을 유발하면서 일생을 살게 된다는 뜻이다. 결국에는 자기라는 몫을 모두 맛을 보고 사는가 아니면 부족에 안타까움을 갖느냐는 오로지 당사자의 능력으로 좌우된다는 점에서 존재가 형성된다. 때문에, 열성으로 자기를 계발하고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고 확장하는 일이 운명일지 모른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 델포이 신전의 명제를 당시 민중들에게 깨우침의 도구로 말한 것도, 결국에는 존재를 확인하고 살아가는 의지의 사람과 맹목의 인간에게는 다른 결과가 도출된다는 뜻을 강조한 말일 것이다.     그대여 하얀 달빛 되어 연못 위를 비추어 주세요   그러면 난 희망의 꿈을 실은 종이배 하나를 띄우겠습니다   예쁜 나의 꿈과 고운 사랑의 빛은 따스한 보금자리가 되어서   밤마다 별들이 또르르 내려와 놀고 새들의 노랫소리 떠나지 않는   아름다운 나의 작은 호수에 그대의 마음도 와주신다면   언제까지나 달을 품듯 별을 품듯 행복을 꼭 껴안을 수 있을 텐데     『작은 호수』 중     김정옥의 호수는 작은 호수가 자기 자신을 암시하고 표징(表徵) 하는 의미로 인식된다. 이왕이면 크고 큰 호수이지 “작은”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는 일은 아무래도 시인 자신의 상징성과 같은 일로 추측된다. 1연에 “그대”라는 미지칭으로 호소로 시작- 그대는 미지의 대상이고 합하기를 염원하는 상징이라면 작은 호수에 동일성을 이루는 일을 수행해 주기를 바라는 의지적인 심리가 백색의 감각적인 “달빛”과 같은 은은함을 더하는 무드로 흐르고 있다. 공간적인 이미지가 밤이고 작은 호수 그리고 달빛이라는 뉘앙스가 정적인 현상에서 기다림이 점철, 되었다. 2번째 연에는 희망을 실은 배는 이동의 이미지가 그리고 3연에는 보금자리에 꿈과 사랑의 아늑함을 부추기게 되고 4연에 별과 새가 어울리는 환상적인 호수에 소리의 울림이 노래로 진전하고 이 공간에 그대가 와준다면 에 소망이 애처롭다. 이런 조건이 이루어지면 시인은 달과 별들의 위호(衛護)를 받으면서 궁극의 지향점인 “행복”에 이를 것이라는 상상의 여백이 넓어진다. 이런 꿈은 곧 작은 호수의 소망이자 시인의 마음이 흐르고 있는 최종의 염원을 암시하고 있다. 작은 호수의 시인이고 여기서 행복과 따스함을 염원하는 여성의 이미지가 가득한 느낌을 준다. 적극적인 심성보다는 소극적이고 우람하기 보다는 작고 아담하면서 정다움을 느끼는 평화의 이미지가 앞장선다. 이런 총체적인 이미지가 김정옥 시인의 표정이고 인상인 듯싶다.     2) 사계의 표정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인생의 순환과 같이 서로 연계되어 인간의 생활과 밀접한 상관 하에서 진전의 바퀴를 돌린다. 이는 생로병사의 혹은 동서남북 등 우주적인 현상과 인간의 삶은 늘 연결 고리를 갖고 진행하기 때문에, 봄에서 삶을 준비하고 여름에서 꽃을 피우면서 씨앗으로 가을의 준비를 갖출 때, 이미 겨울은 삶의 뿌리를 땅속 깊이 의식을 감추고 계절을 보내게 된다.   이런 비유는 시에서도 높은 빈도로 시인의 심금을 울리게 된다. 기ㅁ정옥의 시에서 봄 의식은 태동의 의미가 생명으로의 길을 찾으려 한다. 『꿈꾸는 봄』 『기웃거리는 봄』 『봄비는 오는데』 『사계절의 연가』 『봄이어라』 『봄의 노래』 『봄비가 내리는 이유』 『슬그머니 오는 봄』 등 봄날의 이미지는 생동과 삶의 약동을 준비하는 계절로 들어간다.   갈증 난 초록의 군상들 긴 목 뺀 기다림으로 반기며 마시는 빗방울   풀기 없는 응달에도 귀하디귀한 감로주로 붉디붉은 꽃을 피우고 있다   이 비를 흠뻑 맞으며 정처 없이 훌쩍 떠나서 봄비의 향연을 즐기고 싶은데 ··· (중략) ··· 촉촉이 젖어 드는 비처럼 보고 싶은 이를 불러 본다 돌아올 길 없는 그리운 이름을   『봄비 오는데』 중   봄은 비로 의해 비로소 문을 열게 된다. 마치 굳은 패각(貝殼)의 땅- 맹위를 떨치던 겨울의 두꺼운 의상을 벗고 비에 젖으면 잠을 깨는 자연의 숨소리가 푸른 이름을 불러오는 진행이 계속하게 된다 때문에, 봄은 비의 전령이 있을 때, 문을 열어젖히는 생명의 약동이 준비를 넘어 세상의 입구에 이를 수 있는- 환희의 준비가 갖춰진다. “긴 목 뺀 기다림”은 곧 봄의 특징이고 준비라는 점에서 여느 계절과는 다른 이미지가 풍부해진다. 왜 그런가 하면 “붉디붉은 꽃을 피우고 싶다”의 소망이 자라는 계절- 여기에 비가 올 때 비로소 봄날은 화려한 시절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의 마음을 적극적이기보다는 다소 소극적인 이미지- “돌아올 길 없는 그리운 이름을” 만나는 열정이 “봄비의 향연을 즐기고 싶은데”라는 “싶은데”의 소극성 때문에 여성적인 뉘앙스를 대입하면 이해가 된다.     『분수대』 『여름 식탁』 『아직도 여름은』 『소나기 낙뢰』 『여름이 오는데』 등 여름의 시는 맛과 소리와 화려한 꽃들의 이미지가 어울려 분주한 시절이 구가 된다. 가장 왕성한 기운이 계절의 꽃을 피우고 절정의 높이가 녹음으로 덮이는 때를 여름이라 칭하면 인생의 화려한 꽃은 행복을 향한 이미지 구축이 된다.     하늘은 높고 불타는 태양이 나를 맞는 날 파도로 넘실대는 너울이 귓전에 올라앉은 달콤한 속삭임   너와 나의 만남이 아름다운 것은 행복이란 이름으로 살포시 다가와 고운 미소의 속삭임이 너무 좋아   따가운 모래알이 빚어낸 조약돌도 뭐가 그리 좋아 동그라미 그릴까? 아마 행복한 웃음꽃 하트를 그리겠지   『그 여름의 아름다운 날에』 중     모든 사물은 왕성한 시기를 견디는 성하(盛夏)의 계절은 주기적으로 다가든다. 그러나 새로움으로 가득한 변화일 뿐 전혀 이질적인 것은 아니다. 시인은 여름의 중심에서 행복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때문에, 여름날이 아름다움으로 마음을 채우고 생의 의미가 한층 빛나는 듯 개화의 중심에 선다. 시원한 분수는 하늘을 향하고 때로 소낙비와 낙뢰는 두려움을 키우는 듯 큰소리로 심장을 자극한다. 여름은 요란과 극성 그리고 화려한 이미지들이 저마다 특색을 갖추는 일이기 때문에 쉽게 지나간다. 김 시인은 파도에서 달콤한 속삭임을 감상하고 만남에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행복이란 이름 앞에 스스로 낮추는 겸손이 보인다.     가을은 조락의 이미지가 왕성해진다. 그러나 모든 준비를 갖추고 삶의 미래를 위해 저정 공간을 넓히는 이미지 앞에 전별을 준비한다. 정리의 마음이 앞서고 이별 같은 준비가 목록에 들어갈 때 바람은 스산한 노래를 부르는 계절- 가을 앞에 시심은 가락을 만든다.     반짝이는 별들 사이에 넌 달보다 더 환한 미소로 손짓하며 말을 걸어오는구나!   우리가 정다웠던 그 시절 생각난다. 손잡고 눈짓만 해도 가슴 설레던 순간들 영상으로 그 순간이 머릿속을 회오리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너의 모습 아득히 먼 곳에서 다시 자꾸만 멀어져 저기 별이 되어 반짝이나! 내 가슴 아린 추억이어라     『가을밤에 널 생각하며』   가을은 사념의 길이 넓어지는 때이다. 왜 그런가 하면 가을의 무드는 애상적이고 페이셔스함이 여린 감정을 조장하는 때가 되기 때문이다. 마치 시가 분위기를 타고 날아오르는 감수성의 계절이라는 듯 시인은 가락을 가을의 이미지에 실어 보내는 분주함에 추억이 넓어진다. “반짝이는 별” 혹은 “달”의 분위기가 “미소”로 시인의 정서를 자극하면서 부풀어 오르는 추억 앞에 “내 가슴 아린”의 정조가 바람 앞에 더욱 흔들리게 된다.     즉 가을의 정취는 사념의 길을 넓히고 삶의 애뜻함이 길을 만들게 된다. 『갈대의 노래』 『가을아』 『추상』 『이 가을에』 『낙엽』 『10월 마지막 날』 『애수』 등 따스함을 열망하는 의식이 시인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노래 가락이 마음의 길로 유장하게 흐른다.   겨울은 눈의 계절이다. 그것도 흰빛의 이름에 포근함을 꿈꾸는 시절의 낭만이 더욱 여유로워질 때이다. 아울러 마지막을 준비하는 겨울 입구에서는 예외가 아닐 것이다.     서럽도록 시린 향기 내 가슴에 꽃망울로 활짝 피어났다가 빛바랜 꽃잎처럼 시들어 갔었지   어젯밤 꿈속에서 토닥토닥 덮어준 목화솜 이불 그대가 놓고 간 수정보다 투명한 꽃밭 때문이었지   『첫눈 오는 날』   겨울을 바람이 불고 파도는 높이를 위해 너울을 높이면, 따스한 사람의 열기가 더욱 갈증나고 혹독한 냉기 앞에 스스로를 감추는 연습을 진행하는 때이지만 죽음이 덮인 것은 아니다. 오로지 준비의 때이고 삶의 내일을 생각하는 양이 많이 쌓이는 계절이 겨울의 엄혹한 특징이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김정옥 시인은 순수로 하얀 계절의 여유를 알아차리는 이미지가 보이고 또 삶의 여백에 쌓이는 미소가 곱다     계절은 변화 앞에 특징이 드러났고, 이는 시적 대상을 바라보는 투명한 정서의 가치로 돌릴 수 있는 부분이면서 봄, 여름 그리고 가을, 겨울 등 계절마다 변화의 이미지가 생동감으로 특색을 시화한 노고가 두드러진다. 미래로 문을 열기 위해 기다림의 씨앗은 언젠가의 날을 위해 숨을 고르는 겨울의 따스함-   희망과 내일을 대동하고 견디는 인종의 시간 앞에 펼쳐지는 겨울의 환타지가 조요한 화음을 횐 눈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겨울의 미감이 반짝인다.     산기슭 외로이 홀로 피어난 고운 모습 향기로워라,   산새들과 정답게 뛰놀던 들짐승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아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네.     『들국화 꽃』 중     들국화의 표정은 곧 시인의 모습을 오버랩하는 인상이다. “홀로 피어난”의 적당한 고독과 “고운 모습”에 간직한 향기의 승화와 서로 어울리는 열린 마음의 행방과 “묵묵히 자리를 지키려는” 의지의 표현미에서 시인의 모습이 겹치는 것으로 자화상을 삼는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곧 시인 자신을 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향기를 내뿜는 꽃은 자발(自發)성으로 꽃을 피우고 향기를 발산하는 일이 아닌- 스스로에 몫이기 때문이다. 시는 항상 자신으로 향하는 점에서 비유와 은유 등의 의상을 걸치고 있을 뿐 진실의 모습을 은근히 감추고 있을 때 독자는 이를 알아차리는 수고 또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독자들의 감흥을 받을 수 있는 시가 되기 때문이다.     3. 에필로그   시는 추상의 구름을 걷고 지상의 선명한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가락을 만들어야 한다면 김영옥의 시는 다양한 사물의 모습에 자신의 표정을 대입하여 가락을 만든다. 아울러 여성적인 섬세한 눈으로 포착한 정서는 그만의 영역에서 훌륭하게 조합하고 어울리는 하모니의 표정에 밝고 환한 이미지들이 수런 거린다.   사계절의 변화를 스크린 하는 것이 아니라 이면에 들어있는 계절의 다양한 표정들이 살아서 담소하는 정겨움이 유난함을 느끼게 한다.   차와 음식에 대한 깊이가 맛으로 다가올 때, 신선미 또한 유난한 정서로 시의 맛을 부추기는 여유가 있다. 더불어 순수한 표정에서의 그리움이 손짓처럼 다정하고 따스함으로 강이 흐르는 시의 품위가 다가오는 것 같다. 꽃을 사랑하고 속삭임에 귀를 열어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정말 정겹고 맛나고 맛깔이 난다. 가족을 중히 여기는 것이 미덕이 아니라 품성의 본질이라면 김영옥의 시에는 그런 속삭임이 정갈하고 순수하다. 이는 우정을 소중히 여기는 면에서도 시인의 시적 수원지는 매우 풍부하고 담백한 인상을 남기는 시인의 면모가 인상적이며 출중하다고 보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5.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필자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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