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호수 필자] 아름다움에 대한 대명사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꽃을 말할 것이고 더러는 자연의 신선한 모습에 탄복을 발언하는 사람, 혹은 피어나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명백한 일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목록들이 첨가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중에 시- 시의 아름다움도 빠질 수 없는 이름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꽃의 아름다움은 직관의 시선에서 나오는 감성이라면 시는 지적 감수성의 깊이에서 나오는 느낌이기 때문에, 생각을 더 해야 하고 다시 분석하면서 얻어지는 지성적인 아름다움의 지칭- 시는 심리적인 반응이 길고 또 판단의 정상적인 가치 혹은 순수한 지성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의 인식은 정서적 감동과 조화의 길이 상관을 맺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는 지적 인식만을 앞세울 땐 자칫 어지러운 함정에 빠져 도그마의 편견을 갖게 된다면 그건 시가 아니라 딱딱한 돌을 만지는 설명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지성과 감성의 조화에는 시적 묘미의 깊은 맛을 부추길 수 있게 된다. 시는 조화의 미학이기 때문이다. 시는 일정한 거리만큼 떨어져서 바라보는 아름다움이다. 너무 가까이 가면 아름다움의 실체가 흐리게 되고 또 멀리 자리잡고 바라보면 분간하기 어려운 사물로 둔갑하기 때문에, 균형이 있는 정서를 대동하고 목 좋은 자리에서 감상하는 행복이 조건으로 갖춰져야 한다. 이를 감상자의 태도라 칭하면, 생산자인 시인은 고뇌와 아픔 그리고 탄식을 조합하여 아름다움을 생산하는 사람이 시인일 것이다. 김정석의 시에서는 요란함과 군더더기가 없으며 고요하고 금도를 지키는 정신의 고양을 대면하면 올곧은 정신이 숨 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고독의 깊이에서 그리움을 보내는 여린 정서가 보이기도 한다. 아울러 나이테나 세월의 깊이에서 오는 이별의 아쉬움이나 돌아보는 생의 소회 등이 어우러져 파노라마의 의식을 보여준다. 더불어 근엄한 시적 태도는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관조하는 시선에는 정감이 흐르고 있음을 보게 된다. 2. 감각 서정, 정서의 감성 때로는 시는 감각적이어야 하며 정서를 풀어내는 감수성이 시인의 재능과 일치하는 점을 가질 때 시의 묘미는 아름다움과 보조를 함께한다. 김정석의 시에는 그런 감칠맛이 들어있고 의미와 가락의 조화에는 시조가 갖는 정서의 증폭에 일조하는 느낌을 배가하게 된다. 시조의 태생적인 특성이 가락 위주였음은 누구나 알 것이지만 자유시와 경쟁 구도를 갖춘 이후에 시조의 자리는 의미와 가락을 함께 담으려는 데서 위축되거나 정체 혹은 현상 유지라는 점에서 답보에 머물고 있음이 현재의 시조일 것이다. 왜냐하면 시조와 자유시의 경계가 엄존할 때, 오로지 정형에만 특징을 붙잡아 두려는 데서 시조 시인의 노력 없음이 더 하다, 라는 느낌이지만 그러나 김정석의 시(詩)- 시조라는 구분의 말이 없으면 자유시와 다름이 없는 재미에 빠지게 된다. 자분자분 정을 주는 속살속살 비가 온다 산당화 살진 볼에 목덜미가 간지러워 배시시 왼고개 들며 알 듯하게 웃고 있다. 숨겼던 사연들을 당사실 올로 감춘 안으로 차오르는 고요의 살 핏줄에 들릴 듯 사랑의 밀러 봄 기별이 바쁘다. 『입춘 부근』 지극히 감각적이고 서정적이면서 의인법 혹은 동음 반복에서 나오는 가락은 여유가 있고 맛깔스러운, 뉘앙스를 전달한다. 언어를 비틀거나 완곡하게 조종하는 것이 아니며 유연하고 부드럽고 그러면서 반복적인 시어의 배치가 매듭 없는 마치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에 오르고 소요하는 인상을 준다. “자분자분”과 의성어 “속살속살”에서 나오는 여운은 의미의 중첩- 속살속살은 내면의 부드러움이면서 가는 빗소리- 왁자한 비가 아니라 소곤거리는 암시를 포개는 인상을 준다. 비가 내리는 날은 무겁고 우울한 기분이 점령하지만 김정석 시인의 비는 무겁고 칙칙함보다는, 귀엽고 산뜻한- “목덜미가 간지러워,”와 “배시시” 웃고 있다는 시어의 조합이 가벼우면서도 경박하지 않고 흩어진 것이 아니라 정리된 의미로 옷을 입어 밝음의 상태를 전달한다. 이는 시의 전체적인 표정이 밝아 봄의 정서가 살아나는 것뿐만 아니라 산당화가 사랑의 모습으로 전이되는 풍경이 따스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우수 지나』 『해당화』 등은 김정석의 서정적 이미지가 드러난 수작으로 시인의 재능과 원숙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3. 문법 희망 절망에서 희망 그리고 아픔에서 사랑을 추구하는 것은 시의 본령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꿈과 사랑 그리고 희망의 미래를 말하는 손짓이고 예지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곤궁하고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는 불빛의 역할을 하는 일면 평화로울 때는 화려한 장식으로의 소임은 시가 갖는 본령이고 시의 역할에 주된 임무일 것이기 때문이다. 시의 특징을 Ambiguity에서 찾는 것도, 시가 천의 얼굴을 소유한 보살의 역할처럼 다양한 표정을 내장했을 때, 비로소 시의 기능은 희망의 문법을 완수하게 될 것이다. 떠날 수도, 주저앉아 쉴 곳도 없는 세상 촘촘한 눈빛 시린 볼모의 공간에도 봉곳이 예비한 가슴 신들의 꿈은 있다. 지상에 널브러진 오탁의 그림자도 한 켜를 걷고 보면 땅줄기의 물이 올라 신들의 영혼을 닮은 꽃으로 피어난다. 『해토머리』 중 매우 질서 정연한 과정으로 엮어진 시이다. 즉 1연에는 시련과 아픔이 따르는 “볼모의 공간” 2연은 “꿈”을 말하고 3연은 “땅줄기 물이 올라” 4연에서는 비로소 개화의 의미가 완성으로 이어지는 “꽃”에 최종 목적이 발현된다. 시련, 꿈, 희망, 꽃으로의 4단계 진전은 삶의 원리를 대입해도 정확한 일정이 된다. 시는 비유로 진실을 말하는 기교라면 김 시인의 시조에는 녹아있는 삶의 진수가 담겨있다. 이는 생을 통찰하는 그리고 명상에서 건져 올린 정서의 내공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오랫동안 훈련된, 그리고 시의 장인만이 이룰 수 있는 언어 기법인 것이다. 이럴 경우 시와 정신의 결합이 공고했을 때 비로소 시의 속살을 꽉 채우는 의미에 도달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시인의 정신을 나타내는 민감한 온도계와 같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시는 곧 시인의 삶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표정이기 때문에, 그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생각으로 오늘을 바라보고 내일을 생각하는가의 조차 파악되는 길이 담겨있게 된다. 가슴에 물을 담아 배를 하나 띄울란다. 구름 걷고 맨손으로 밤마다 별을 따는 봄 한날 살가운 저녁 조각달과 같은, 그런 가슴을 새로 닦아 이름 하나 새길 난다. 차운 밤 따스하게 황 촉 밝혀 뜨고 몸으로 몸을 태우는 목이 가는 여인, 그런 『가슴을 새로 닦아』 중 별과 달은 어둠에서 좌표의 길잡이가 될 뿐만 아니라 생의 궁극을 말하는 의미조차 내포한다. 그러나 달과 별은 어둠을 전제로 했을 때, 빛의 의미를 구가할 수 있고 희망에의 노래가 합창될 수 있기 때문에 『가슴을 새로 닦아』는 어둠을 생략하고 밝은 빛과 달을 전면에 포진 시키는 기법을 보이는 시가 된다. 2연에 “가슴을/ 새로 닦아/이름 하나 새길란다.”/를 위해 “황 촉”을 켜는 빛의 단계로 진입하기 때문에, 시적 균형이 안정감을 가지면서 의미의 확장을 이룩하는 기교가 환해 보인다. 4. 고독과 황혼의 여운 김정석의 시적 표정은 겉으로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고독과 이별이 교차하는 모습이 다소 쓸쓸함을 느낄 수 있다. 아무래도 나이의 깊이에서 오는 감수성이 용약(勇躍)하는 정서이기보다는 가라앉아 차분하고 쓸쓸함- 황혼의 풍경이 다가든다. 시는 시인과 정서의 일체화를 이루기 위해 사물을 앞세워 비유라는 도구를 사용하면서 자기로 돌아가는 설명을 상징으로 처리한다는 일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적절성의 비유에는 음식의 맛깔스러움을 더하는 역할과 같기에 곰삭은 지혜가 들어 있어야 한다면 김정석의 고독은 현실에 대한 반응이 꾸미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움과 같은 이치로 보는 것이다. 선홍빛 물든 잎에 얼굴을 대어본다. 잎맥을 타고 흐르며 어질게 늙는 소리 세월의 등성에 누워 감빛 놀만 담고 있다. 『두 겹 다리 위에서』 사물의 모습을 소리로 듣는 시인의 귀 밝음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보아야 할 것들이 소리로 다가오는 일은 체험과 세월의 깊이에서 알아차린 쓸쓸함이다. 뼈와 뼈가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귀에서 들리는 이명의 낯설음, 아울러 시야에 다가온 흐린 사물의 윤곽들이 시인은 소리와 직결되는 환청으로 들을 수 있을 때, 마치 멀리 떠나온 것 같은 소회에 잠길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더불어 달빛에서 소리를 듣는 일이나 꽃에서 아름다운 연인의 음성을 유추하는 일은 시인의 주된 상상의 깊이와 연결되는 작업이다. “잎에 얼굴을 대어볼 때.” 들리는 “어질게 늙은 소리” 앞에 어떻게 삶을 진행하는가의 숙제가 “어질게”에 모아든다. 즉 “어질게 늙음”과 “감빛 놀”이 아름답게 결합하는 방법을 찾는 도정에는 쓸쓸함과 고독이 다가올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하면 둘의 이미지 모두 종점 의식을 암시하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난 바다 물금 넘는 한 사내를 본다 영토를 잃어버린 알 섬 같은 사내를 하루가 전광을 거두는 구부정한 저녁나절 『가을 낙수』 중 수평선을 바라보는, 그리고 영토를 잃어 절망에 의상을 슬프게 걸친 사나이의 모습- 무인도의 비유에서 처절한 표정의 슬픔을 읽는다. 더구나 하루가 마감되는 황혼 무렵의 구부정한 저녁나절은 곧 시인 자신을 보여주는(showing) 풍경이 서러움을 배가 한다. 인간은 언젠가는 혼자 마지막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을 유추하면서 깊게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면 숙연한 정감이 눈물을 불러오게 된다면 김정석의 고독은 황혼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홀로 서 있는 모습이 오히려 은은하고 정 깊은 풍경화가 되는 것은 아닐지 고독은 자기 찾기이고 자기를 찾아가는 일은 삶의 모습을 어떻게 그림으로 아름답게 표출할 것 인가의 기교적인 일이 될 것이다. 생의 궁극이 곧 아름다움을 연출하는데, 목표가 있다면 젊음에서는 젊음의 미가 있고 시니어는 시니어의 표정이 있을 수 있다. 아무런 욕심 없이 그린 그림으로 김정석 시인이 그리는 생의 그림은 담담한 수묵화이면서 철학이 담긴 풍경에는 그 성품의 모습이 고독한 그림자를 이끌고 가는 황혼의 자화상에 여운이 너무 긴 것은 아닌지 5. 이별의 소리 회자정리의 이치는 인간만이 갖고 있는 정서는 아니다. 우주의 섭리라는 생로병사의 윤회를 굴리면서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다시 돌아오는 바퀴 속에서 존재라는 이름을 키우게 된다. 석가모니의 고뇌는 곧 그런 이치를 가장 순수하게 설명하기 위해 한 방편으로 정확한 이름표를 달고 있다. 만남에는 즐거움이 따르며 반면 이별에는 슬픔의 강물이 수런거리는 일은 억만년 인간의 역사가 축적한, 슬픔의 기록일 것이다. 이별 앞에서는 누구나 답안지를 찾을 수 없어 두런거리고 슬픔의 깊이에 빠지게 된다. 그처럼 김 시인의 이별에는 건너지 못하는 미련의 줄기가 뒤따르면서 가락으로 형성되면서 길을 찾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한 사나흘 질긴 비로 봄눈은 트겠지만 아파서 자라는 고독 먼 폐가를 돌아 나온 바람도 어깨 걸려 곡비(哭悲)처럼 울고 있다. 지우면 지울수록 꽃고무신 갈아 신고 출구가 막힌 회안 나선으로 감고 와서 추억의 물목에 앉아 눈뜬 자정을 지킨다. 『이별 이후』 이별의 구체적인 사유는 알 수가 없다. 누구인지 그리고 언제 이별의 사건이 시인을 슬픔의 강물을 띄었는지- 그러나 시는 리얼함을 나열하는 글이 아니고 상상의 생략 혹은 사실에 상상의 옷을 입힐 때, 더 넓은 상상의 반경을 소유할 수 있다면 시인의 이별은 “아파서 자라는 고독”과 “곡비처럼 울고 있다”에서 슬픔의 농도가 처절함을 느끼게 하지만 지적인 제어로 매우 고단함을 주게 하는 인상이며 더불어 “지우면 지울수록” 다가오는 기억들은 추억을 부추기는 이름이 되어 “눈뜬 자정을 지킨다.”에서 불면의 함정에서 어찌할 수 없는 각인의 이름 앞에 흐느끼는 여운이 길게 느껴진다. 그러나 드러나는 이름에서는 허무와 함께, 동행 모습이 보인다. 6. 에필로그(가슴의 풍경화) 시는 언어가 아니라 시인의 가슴을 열어 보이는 풍경화라는데 이의가 없다면 김정석 시인의 시에는 한국 시의 서정이 숲을 이루면서 시원하고 삽상한 바람을 미소로 건네준다. 이는 표현의 깊이를 간직한 셈이고 여기서 시의 숙성은 곧 체험과의 조화를 느끼게 한다. 아울러 대상을 바라보는 날카로움의 시선을 사랑으로 감싸는 동화에서 형식의 절제와 언어 탄력을 수용하는 미감과 내용의 무한성에는 여유로운 감상의 길이 보인다. 고독과 허무 의식 그리고 그리움의 표정을 나타내는 기법이 시적 기교의 무아경을 방문하는 소감처럼 객관적인 표현일 때, 더욱 친근감을 전달하고 있다는데 방점을 찍고 싶다. Allan Tate가 말한 “문학은 인간 경험의 완전한 지식이다.에 미감을 더한 소득이 따라오는 감동의 시인 김정석 시인이 그렇다. 라고 말하면서 나가려 한다. 참으로 대단한 시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느끼며 정서적 감성을 느끼며 오랜 체험의 체취를 맡으며 에필로그 한다. 2025.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필자 저서]
[천계단의 필자] 시를 쓰는 일이나 살아 가는, 일이나 구분에서는 다름이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시 또한 유기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에 생로병사의 과정이 인간의 생애와 유사하다는 점을 건론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의 표정은 삶의 표정과 같이 진지하고 때로는 땀을 흘리는 표정도 감지되고 더러는 생의 화려함을 대변하는 가락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때,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반응을 갖게 된다. 시가 독자에게 감동을 전달할 수 있음은 인간의 감정과 반응의 감수성과 유사성을 가질 때 인간은 시에 열정을 투사하면서 감동의 종점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감동이란 결국 인간의 정서와 시적인 정서가 함께 매칭되었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상징성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빛- 밝음이면서 의미요 가치의 개념으로 환산되는 상징에서 시의 가치는 인간의 가슴을 장악하는 가락을 만들 수 있게 되기에 시인은 빛을 만드는 자요 삶의 의미를 고양하는 점에서 頂點을 향한 노력이 투척 되어야 한다. 그러나 삶의 의미 그리고 생의 심사(深思)한 명상의 숲을 지났을 때, 비로소 의미와 빛을 알아 차리는 인간의 체온을 가져야 한다. 따스하면서도 때로는 이지(理智)의 냉엄한 잣대를 가지고 사물과 대상을 투시하는 눈을 가졌을 경우 시의 이미지를 조종하고 창조하는 사람의 체온을 가질 수 있고 또한 유지하는 정감의 소유자라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은 초감각 또는 범상한 의미를 위해 자신을 망각하면서 인간의 의미를 위해 의복을 제작하는 창조자라는 뜻이 곧 유기체를 창조하는 인간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정다감하고 따스한 김정옥의 온화함으로 연결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물을 대면하면서 살아가는 생명의 소리가 들리는 창조의 입구를 장악하고 있다. 이제 그의 시적 특성이 독자 앞에 어떤 소리로 다가오는가를 살피기로 한다. 2. 감수성의 표정 1) 자기만큼의 그릇 인간은 자기만큼 살고, 자기만큼 표현하고, 자기만큼의 한계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지나간다. 다시 말하면 자기라는 그릇을 가지고 그 그릇에 의미를 채우는 일이 고작일 뿐 과욕은 넘치게 되고 부족은 갈증을 유발하면서 일생을 살게 된다는 뜻이다. 결국에는 자기라는 몫을 모두 맛을 보고 사는가 아니면 부족에 안타까움을 갖느냐는 오로지 당사자의 능력으로 좌우된다는 점에서 존재가 형성된다. 때문에, 열성으로 자기를 계발하고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고 확장하는 일이 운명일지 모른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 델포이 신전의 명제를 당시 민중들에게 깨우침의 도구로 말한 것도, 결국에는 존재를 확인하고 살아가는 의지의 사람과 맹목의 인간에게는 다른 결과가 도출된다는 뜻을 강조한 말일 것이다. 그대여 하얀 달빛 되어 연못 위를 비추어 주세요 그러면 난 희망의 꿈을 실은 종이배 하나를 띄우겠습니다 예쁜 나의 꿈과 고운 사랑의 빛은 따스한 보금자리가 되어서 밤마다 별들이 또르르 내려와 놀고 새들의 노랫소리 떠나지 않는 아름다운 나의 작은 호수에 그대의 마음도 와주신다면 언제까지나 달을 품듯 별을 품듯 행복을 꼭 껴안을 수 있을 텐데 『작은 호수』 중 김정옥의 호수는 작은 호수가 자기 자신을 암시하고 표징(表徵) 하는 의미로 인식된다. 이왕이면 크고 큰 호수이지 “작은”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는 일은 아무래도 시인 자신의 상징성과 같은 일로 추측된다. 1연에 “그대”라는 미지칭으로 호소로 시작- 그대는 미지의 대상이고 합하기를 염원하는 상징이라면 작은 호수에 동일성을 이루는 일을 수행해 주기를 바라는 의지적인 심리가 백색의 감각적인 “달빛”과 같은 은은함을 더하는 무드로 흐르고 있다. 공간적인 이미지가 밤이고 작은 호수 그리고 달빛이라는 뉘앙스가 정적인 현상에서 기다림이 점철, 되었다. 2번째 연에는 희망을 실은 배는 이동의 이미지가 그리고 3연에는 보금자리에 꿈과 사랑의 아늑함을 부추기게 되고 4연에 별과 새가 어울리는 환상적인 호수에 소리의 울림이 노래로 진전하고 이 공간에 그대가 와준다면 에 소망이 애처롭다. 이런 조건이 이루어지면 시인은 달과 별들의 위호(衛護)를 받으면서 궁극의 지향점인 “행복”에 이를 것이라는 상상의 여백이 넓어진다. 이런 꿈은 곧 작은 호수의 소망이자 시인의 마음이 흐르고 있는 최종의 염원을 암시하고 있다. 작은 호수의 시인이고 여기서 행복과 따스함을 염원하는 여성의 이미지가 가득한 느낌을 준다. 적극적인 심성보다는 소극적이고 우람하기 보다는 작고 아담하면서 정다움을 느끼는 평화의 이미지가 앞장선다. 이런 총체적인 이미지가 김정옥 시인의 표정이고 인상인 듯싶다. 2) 사계의 표정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인생의 순환과 같이 서로 연계되어 인간의 생활과 밀접한 상관 하에서 진전의 바퀴를 돌린다. 이는 생로병사의 혹은 동서남북 등 우주적인 현상과 인간의 삶은 늘 연결 고리를 갖고 진행하기 때문에, 봄에서 삶을 준비하고 여름에서 꽃을 피우면서 씨앗으로 가을의 준비를 갖출 때, 이미 겨울은 삶의 뿌리를 땅속 깊이 의식을 감추고 계절을 보내게 된다. 이런 비유는 시에서도 높은 빈도로 시인의 심금을 울리게 된다. 기ㅁ정옥의 시에서 봄 의식은 태동의 의미가 생명으로의 길을 찾으려 한다. 『꿈꾸는 봄』 『기웃거리는 봄』 『봄비는 오는데』 『사계절의 연가』 『봄이어라』 『봄의 노래』 『봄비가 내리는 이유』 『슬그머니 오는 봄』 등 봄날의 이미지는 생동과 삶의 약동을 준비하는 계절로 들어간다. 갈증 난 초록의 군상들 긴 목 뺀 기다림으로 반기며 마시는 빗방울 풀기 없는 응달에도 귀하디귀한 감로주로 붉디붉은 꽃을 피우고 있다 이 비를 흠뻑 맞으며 정처 없이 훌쩍 떠나서 봄비의 향연을 즐기고 싶은데 ··· (중략) ··· 촉촉이 젖어 드는 비처럼 보고 싶은 이를 불러 본다 돌아올 길 없는 그리운 이름을 『봄비 오는데』 중 봄은 비로 의해 비로소 문을 열게 된다. 마치 굳은 패각(貝殼)의 땅- 맹위를 떨치던 겨울의 두꺼운 의상을 벗고 비에 젖으면 잠을 깨는 자연의 숨소리가 푸른 이름을 불러오는 진행이 계속하게 된다 때문에, 봄은 비의 전령이 있을 때, 문을 열어젖히는 생명의 약동이 준비를 넘어 세상의 입구에 이를 수 있는- 환희의 준비가 갖춰진다. “긴 목 뺀 기다림”은 곧 봄의 특징이고 준비라는 점에서 여느 계절과는 다른 이미지가 풍부해진다. 왜 그런가 하면 “붉디붉은 꽃을 피우고 싶다”의 소망이 자라는 계절- 여기에 비가 올 때 비로소 봄날은 화려한 시절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의 마음을 적극적이기보다는 다소 소극적인 이미지- “돌아올 길 없는 그리운 이름을” 만나는 열정이 “봄비의 향연을 즐기고 싶은데”라는 “싶은데”의 소극성 때문에 여성적인 뉘앙스를 대입하면 이해가 된다. 『분수대』 『여름 식탁』 『아직도 여름은』 『소나기 낙뢰』 『여름이 오는데』 등 여름의 시는 맛과 소리와 화려한 꽃들의 이미지가 어울려 분주한 시절이 구가 된다. 가장 왕성한 기운이 계절의 꽃을 피우고 절정의 높이가 녹음으로 덮이는 때를 여름이라 칭하면 인생의 화려한 꽃은 행복을 향한 이미지 구축이 된다. 하늘은 높고 불타는 태양이 나를 맞는 날 파도로 넘실대는 너울이 귓전에 올라앉은 달콤한 속삭임 너와 나의 만남이 아름다운 것은 행복이란 이름으로 살포시 다가와 고운 미소의 속삭임이 너무 좋아 따가운 모래알이 빚어낸 조약돌도 뭐가 그리 좋아 동그라미 그릴까? 아마 행복한 웃음꽃 하트를 그리겠지 『그 여름의 아름다운 날에』 중 모든 사물은 왕성한 시기를 견디는 성하(盛夏)의 계절은 주기적으로 다가든다. 그러나 새로움으로 가득한 변화일 뿐 전혀 이질적인 것은 아니다. 시인은 여름의 중심에서 행복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때문에, 여름날이 아름다움으로 마음을 채우고 생의 의미가 한층 빛나는 듯 개화의 중심에 선다. 시원한 분수는 하늘을 향하고 때로 소낙비와 낙뢰는 두려움을 키우는 듯 큰소리로 심장을 자극한다. 여름은 요란과 극성 그리고 화려한 이미지들이 저마다 특색을 갖추는 일이기 때문에 쉽게 지나간다. 김 시인은 파도에서 달콤한 속삭임을 감상하고 만남에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행복이란 이름 앞에 스스로 낮추는 겸손이 보인다. 가을은 조락의 이미지가 왕성해진다. 그러나 모든 준비를 갖추고 삶의 미래를 위해 저정 공간을 넓히는 이미지 앞에 전별을 준비한다. 정리의 마음이 앞서고 이별 같은 준비가 목록에 들어갈 때 바람은 스산한 노래를 부르는 계절- 가을 앞에 시심은 가락을 만든다. 반짝이는 별들 사이에 넌 달보다 더 환한 미소로 손짓하며 말을 걸어오는구나! 우리가 정다웠던 그 시절 생각난다. 손잡고 눈짓만 해도 가슴 설레던 순간들 영상으로 그 순간이 머릿속을 회오리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너의 모습 아득히 먼 곳에서 다시 자꾸만 멀어져 저기 별이 되어 반짝이나! 내 가슴 아린 추억이어라 『가을밤에 널 생각하며』 가을은 사념의 길이 넓어지는 때이다. 왜 그런가 하면 가을의 무드는 애상적이고 페이셔스함이 여린 감정을 조장하는 때가 되기 때문이다. 마치 시가 분위기를 타고 날아오르는 감수성의 계절이라는 듯 시인은 가락을 가을의 이미지에 실어 보내는 분주함에 추억이 넓어진다. “반짝이는 별” 혹은 “달”의 분위기가 “미소”로 시인의 정서를 자극하면서 부풀어 오르는 추억 앞에 “내 가슴 아린”의 정조가 바람 앞에 더욱 흔들리게 된다. 즉 가을의 정취는 사념의 길을 넓히고 삶의 애뜻함이 길을 만들게 된다. 『갈대의 노래』 『가을아』 『추상』 『이 가을에』 『낙엽』 『10월 마지막 날』 『애수』 등 따스함을 열망하는 의식이 시인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노래 가락이 마음의 길로 유장하게 흐른다. 겨울은 눈의 계절이다. 그것도 흰빛의 이름에 포근함을 꿈꾸는 시절의 낭만이 더욱 여유로워질 때이다. 아울러 마지막을 준비하는 겨울 입구에서는 예외가 아닐 것이다. 서럽도록 시린 향기 내 가슴에 꽃망울로 활짝 피어났다가 빛바랜 꽃잎처럼 시들어 갔었지 어젯밤 꿈속에서 토닥토닥 덮어준 목화솜 이불 그대가 놓고 간 수정보다 투명한 꽃밭 때문이었지 『첫눈 오는 날』 겨울을 바람이 불고 파도는 높이를 위해 너울을 높이면, 따스한 사람의 열기가 더욱 갈증나고 혹독한 냉기 앞에 스스로를 감추는 연습을 진행하는 때이지만 죽음이 덮인 것은 아니다. 오로지 준비의 때이고 삶의 내일을 생각하는 양이 많이 쌓이는 계절이 겨울의 엄혹한 특징이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김정옥 시인은 순수로 하얀 계절의 여유를 알아차리는 이미지가 보이고 또 삶의 여백에 쌓이는 미소가 곱다 계절은 변화 앞에 특징이 드러났고, 이는 시적 대상을 바라보는 투명한 정서의 가치로 돌릴 수 있는 부분이면서 봄, 여름 그리고 가을, 겨울 등 계절마다 변화의 이미지가 생동감으로 특색을 시화한 노고가 두드러진다. 미래로 문을 열기 위해 기다림의 씨앗은 언젠가의 날을 위해 숨을 고르는 겨울의 따스함- 희망과 내일을 대동하고 견디는 인종의 시간 앞에 펼쳐지는 겨울의 환타지가 조요한 화음을 횐 눈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겨울의 미감이 반짝인다. 산기슭 외로이 홀로 피어난 고운 모습 향기로워라, 산새들과 정답게 뛰놀던 들짐승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아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네. 『들국화 꽃』 중 들국화의 표정은 곧 시인의 모습을 오버랩하는 인상이다. “홀로 피어난”의 적당한 고독과 “고운 모습”에 간직한 향기의 승화와 서로 어울리는 열린 마음의 행방과 “묵묵히 자리를 지키려는” 의지의 표현미에서 시인의 모습이 겹치는 것으로 자화상을 삼는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곧 시인 자신을 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향기를 내뿜는 꽃은 자발(自發)성으로 꽃을 피우고 향기를 발산하는 일이 아닌- 스스로에 몫이기 때문이다. 시는 항상 자신으로 향하는 점에서 비유와 은유 등의 의상을 걸치고 있을 뿐 진실의 모습을 은근히 감추고 있을 때 독자는 이를 알아차리는 수고 또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독자들의 감흥을 받을 수 있는 시가 되기 때문이다. 3. 에필로그 시는 추상의 구름을 걷고 지상의 선명한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가락을 만들어야 한다면 김영옥의 시는 다양한 사물의 모습에 자신의 표정을 대입하여 가락을 만든다. 아울러 여성적인 섬세한 눈으로 포착한 정서는 그만의 영역에서 훌륭하게 조합하고 어울리는 하모니의 표정에 밝고 환한 이미지들이 수런 거린다. 사계절의 변화를 스크린 하는 것이 아니라 이면에 들어있는 계절의 다양한 표정들이 살아서 담소하는 정겨움이 유난함을 느끼게 한다. 차와 음식에 대한 깊이가 맛으로 다가올 때, 신선미 또한 유난한 정서로 시의 맛을 부추기는 여유가 있다. 더불어 순수한 표정에서의 그리움이 손짓처럼 다정하고 따스함으로 강이 흐르는 시의 품위가 다가오는 것 같다. 꽃을 사랑하고 속삭임에 귀를 열어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정말 정겹고 맛나고 맛깔이 난다. 가족을 중히 여기는 것이 미덕이 아니라 품성의 본질이라면 김영옥의 시에는 그런 속삭임이 정갈하고 순수하다. 이는 우정을 소중히 여기는 면에서도 시인의 시적 수원지는 매우 풍부하고 담백한 인상을 남기는 시인의 면모가 인상적이며 출중하다고 보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5.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필자 저서] [필자 저서] [필자 저서]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1> 시가 주는 효과는 무엇인가는 시를 쓰는 목적에 근접하는 말이 될 것이다. 토마스 만은 예술가의 임무는 생기 <to animate>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닐 때, 예술은 선(善)에 가깝고 친절성에 뿌리에 있으며 화합을 위해 단지 위안(慰安) 일뿐이라는 말을 했다. 다시 말하면 거창한 목표에 헌신하는 투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기력한 허무주의자의 독백도 아니다. 생기와 발랄 혹은 즐거움을 이어주는 때로 단순하기도 하고 더러는 복잡 미묘한 인간의 심성을 대변하는 임무에 헌신하는 일이 시인의 역할이라 본다. 여기엔 간과할 수 없는 삶의 이야기에 무목적성이 아니라 상상으로 떠나는 이상의 꿈이 첨가될 때 조미료의 맛깔스러움은 배가 될 것이다. 언제나 시인은 무료에 심심풀이의 풍선 띄우기가 아니라 꿈을 담아 대상에 즐거움을 주는 언어의 마술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엔 몇 가지 조건이 수반이 된다. 2> 관(觀)이란 “보다” 자세히 보다. 보이다. 드러내다. “명시하다”의 의미가 들어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할 경우, 우선 정립되어야 할 것이 대상에 대한 목적의식이 선명할 때 결과는 더욱 명확한 답안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시를 쓰는 일도 목적에 대한 정립이 있을 때의 경우와 없을 때의 경우와 확연하다. 전자의 경우엔 언어의 조합일 뿐 이리저리 무엇을 시로 표현하려는 목적성에 대한 헷갈림이 나타나고 후자의 경우엔 비록 짧은 응축(凝縮)의 경결(硬結)함의 언어의 의미에 숲을 이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작정 길을 걷는 나그네와 목표를 정하고 길을 가는 비유와 다름이 없다는 뜻에서 대부분의 시에 함정은 단순히 언어의 유희에 빠진 나그네들이 많다. 왜, 시를 쓰는가! 그리고 무엇을 의미로 구축하는가에 대한 자문자답이 있고 난 후에 대상을 관찰(觀察)하며 투시(透視)하고 난 뒤에 문자로 의식을 표현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이가 들면 과거 지향형으로 변한다. 앞에 있을 것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과거 추수의 길을 넓게 확대하는 경향이 다분해진다. 그러나 지나치면 나태의 그물에 걸리는 문제는 살아가는 개성의 문제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아, 고향에 돌아와 혼자 나 이곳에 있다네. 어린 시절에 뛰어놀던 기억은 나이 60대 후반의 기억에선 여전히 거의 흔적에 매몰된 시심이 아쉬움으로 넘치고 의욕만 앞세우며 길을 달리고 있다. 넓고 컸던 골목이 “기껏 20걸음 남짓”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어 “파릇파릇하게 고개를 쳐들었네”의 현상으로 다가와 문을 두드린다. 시의 중심은 “혼자 여기 나 혼자 서 있네”에 모아들고 지금은 “목이 쉰 노래”를 허공에 빛바랜 꿈의 파편으로 회상의 길목을 지키는 오늘의 모습이 처연하다. 깊음이 깊어지면 허무가 되고, 그 어느 것도 구분하기 어려운 추상의 숲을 소요하는 귀향의 꿈- 노년의 또 다른 모습이 차라리 친근함으로 다가든다. 시는 진솔함의 문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신명(神明)- 하늘과 땅의 신령이라는 의미가 신명이 된다. 시인은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다. 아주 쉽게 말하면 신명이 잡힌 사람이라야 한다. 풀이를 하나 더한다면 시인은 산문(散文) 작가와는 달리 신들린 집중력을 가질 때, 시의 모습은 잠시 아주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순간에 사라진다. 예를 든다면 무당에 신이 절정에 올랐을 때 날카로운 작두날 위에 맨발로 선다. 그리고 춤을 춘다. 이때 전기를 통해도 전류가 통하지 않는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실험이 있었지만 정확한 논리를 정의하지 못했다. 이것이 과연 과학으로도 증명하지 못한 현실을 어떻게 부정할 것인가? 관습에 얽매인 평범한 사람들은 불가능이란 간단하게 정리할 것이다. 그 옛날 타이타닉 호는 “보이는 얼음”에 충돌하여 비극을 맛보았다. 얼음덩이는 70%가 물속에 있다. 이를 간과했기에 충돌의 참사가 일어났다. 시인의 의식은 바로 무의식의 깊이를 발굴하는 사람의 이름이다. 물론 산문을 쓰는 사람은 현상의 리어리티이고 보이는 것을 얼마나 실감 있게 묘사하는 방법을 기술하는 작가와 시인은 이러한 관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난 후 어떻게 무엇을 에 목적의식을 두면서 산다. 전자는 방법의 문제요. 후자는 대상에 대한 구분법이 될 것이다. 시 쓰는 일도 이런 구분의 명확성이 곧 헷갈리는 상태를 벗어나는 첩경일 것이다. [우연히 가다 말다 세상을 보았고 어쩌다 세상을 돌아 돌아보니 뒤로 가는지 딴 세상으로 가는지를 보았다] <졸 시><세상 이야기> 어려운 것과 쉬운 것의 차이는 선택의 길일뿐이다. 그러나 중심 잡기의 생은 기준점이 필요하고 여기서 개성은 더욱 필요의 항목이 될 것이다. 비유- “개처럼 핥고” “고개 숙이고” 유순하게 사는 도처춘풍(到處春風)의 인생을 일러 개 같은 놈이라 칭하면 욕이 된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가 없을 때 받는 통칭의 슬픔이기 때문이다. 편하게 살아 명예를 얻으면 그 가치는 짧고, 중심 잡고 살아가면 명성이 따라오는 차이가 있다.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들이 지조는 당시에 고관대작의 삶이었어도 그 자손들은 숨기기 바쁜 일이라면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목록이다. 이런 과거의 일상은 쓰디쓴 아픔이 된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역설의 기교가 시인이 가지고 있는 의도이다. 4> 일체화(ldentyty)- 시의 가장 중요한 목록은 대상과 시인의 의도가 통합하는 길을 만드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표현하려는 사물-대상을 어떻게 의도에 충실하게 하나로 묶을 것인가의 여지는 시적인 기교를 넘어 재능으로 귀환한다. 언어의 기교이지만 이는 정신의 기교를 뜻하고 목적성의 하나 되기라는 점에서 일체화는 동일성의 원리가 된다. 이를 위해서 시는 기교와 메시지가 필요한 것이다 언어, 리듬, 이미지, 상징, 시제, 비유의 언어를 일러 토운(tone)에 충실할 때 시의 맛깔은 살아나는 것이다. 내 신발이 물에 젖기는 하였으나 그림자는 젖지 않았다 그림자는 내게 자유 평화를 명령하기에 그림자는 몸살이 시작되어 아직은 이른 봄 꽃 이건만 졸 시 <그림자> 중 주인공인 나는 또 하나의 나인 그림자를 끌고 다니면서 산다. 이 녀석을 떼어버리기 위해 온갖 음모를 꾸며도- 벼랑에서 밀어도, 어둠에 갇혀도 다시 살아나는 숙명의 존재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이 그림자를 무심히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존재의 형상으로 깨닫고 바라볼 때는 새로운 자각의 길이 존재 문제로 부각되는 것이다. 여기서 무심히 사는 사람과 시인의 통찰이 주는 삶의 무게는 완전히 길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필요한 사물 이면(裏面)의 관찰기는 곧 시에 신선함을 부추기는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5> 신념(信念)- 시와 신념을 불가분의 개성으로 “무엇”에 합당한 지는 그 풍경의 연출이 대부분이다. 이런 이유에는 여러 가지의 문제가 있을 것이지만 자기 선전의 광고문을 작성하는 것에 불과한 뜻이다. 이는 시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문제와 직결될 것이다. 감상(感傷)의 덫, 이미지 사용의 장식(裝飾) 성, 관념이나 의도의 지나침, 모순이나 충돌이 내포된, 지나치게 종교적인 강조는 안 좋은 시의 표본이라는 지적은 학자들이 강조하는 요점이다. 미상불 시의 신념은 자기중심을 세우는 일이라 시의 표정에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를 관찰하는 요인이 된다. 씨앗 심어 수확을 기다렸으나 수확은커녕 네게 겨누며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터지고 흩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졸 시 <냉전시대> 중 한때 민중 타령의 개구리 떼의 놀음이 문단의 중심을 장악한 적이 80년대를 풍미했다. 그 이후 통일의 문제는 유행목록처럼 지금도 기준이 무엇인지 오리무중이며 언제까지 일지는 글쎄올시다.이다. 목적의식이 공고하지 못한 유행의 결론인가 아니면 이데올로기 시대인가 “아직도”에서 분단의 아픔은 진행형이고 언제 꽃으로 피어날 것인가는 요원한 지경이다. 일찍이 나는 북한의 문학은 치약광고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체제의 선전도구일 때 광고 문안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문학은 상업성에서 혹은 노랑 알고리즘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실에 대한 아픔이 여전히 엄존한다. 요컨대 문학성의 가치에 방점을 찍을 때, 참된 가치의 문학이 꽃으로 다가들 것이다. 시의 제목처럼 “아직도”는 유행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본질로 눈을 돌려야 할 책무가 남는다. 통일을 위한 염원은 진정한 우리 민족의 꿈이라는 갈증이 인상적이라고 생각 하며 이제는 처절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서로의 알고리즘을 통해 절차나 방법을 일관성으로 정해진 틀 속에서 통일을 논하기를 기대하며 에필로그 하련다. 2023.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파도] [이승섭 시평집 대학교재 선정]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글을 쓰는 일이란 엑스터시(Ecstasy) 즉 감정의 경지 또는 신의 경지나 무아지경을 방문함으로 입구를 방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글의 행로는 삶의 과정과 표정을 관리하게 되는 것이다. 글이란 글의 표정은 곧 작가의 생을 대변하는 일이며 인생을 묘사하는 글이며 시는 인생을 압축하는 일이라고 들 하는 것이다. 글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렇기에 1편의 시에는 전 생애가 들어있는 것이며 감정의 추이와 생의 전개도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글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의도를 내장하는 명제는 글을 쓰는 이유이면서 본질로 길을 내는 상징의 숲을 건설하는 것처럼 시의 건축의 의미를 찾는 이치라는 뜻이다. 단순한 언어로 조합해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시인 자신의 체험을 담고 이를 아름다움으로 포장하는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질서를 균제미로 담아 의미의 숲을 이룩할 때, 비로소 감동의 누선(淚腺)을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인의 정신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조감을 할 수는 없지만 언어의 표현을 통한 흔적(trauma) 찾기는 심리학적인 원조를 받을 때는 가능한 해법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니 시는 고백의 특징을 예외로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고백적인 현상을 시적 장치로 객관화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詩는 정신의 에센스를 나타내는 기교에서 시인 자신의 감수성을 고양(高揚)하는 면밀하고 정치(情致)한 계산에서 의미의 논리를 갖출 때 독자의 뇌리를 장악하는 경지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공 즉 생’ “있는 것은 없는 것이라” 순환의 논법은 우주의 질서 원리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단독이나 전체와 부분은 언제나 연결고리를 형성하면서 우주의 진행은 앞으로도 앞으로 진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주의 드라마에서 때로는 관객이고 주인공이라는 상관을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우주의 주인공처럼 사고하는 것도 모순이기에 관찰자의 자세로 바라보는데서 깨달음이 있어야 할 것이라면 과학의 결국은 인간을 성숙의 단계로 올려주는 계단일 수 있지 않을까? 이만치의 거리(距離)는 저만치의 상대적인 개념일 때 이만치의 자각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시는 원래 단순한 감수성의 나열이 아니라 치밀한 생각과 계획 속에 비로소 언어의 경제성을 운위(云謂)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詩 의 심연(深淵)은 곧 시인 정신의 깊이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시를 낯설게 표현하려 하고 기교를 부리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는 시인의 속을 들여다보기 위해 일정한 도식을 동원하려 해체하는 수고로움을 가질 때 독자와 시인의 관계는 소통의 행복과 감동을 만나는 결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고민정의 시는 주변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주조를 이루면서 관계에서 빚어지는 감수성의 줄기와 주위에 사람의 관계에서 오는 그리움의 깊이와 일상 삶에서 느끼는 일 등이 시의 행동을 장악하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더불어 주위의 환경과 꽃에 대한 시화(詩化)는 자연에 일부를 향기로 전환하는 의미로서 고민정의 시적 감성을 탐방하려 한다. 2. 순환의 의미 찾기 1> 허무와 배고픔 허무라는 것은 인간이 살면서 필연으로 따라오는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삶의 요소를 만들면서 인자(因子)에 의해 결정하고 요체를 만드는 것이다. 모두가 인간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현실에 대한 만족에 도달할 수 없는 간격만큼 허무(虛無)를 갖게 되는 것이다. 고민정의 詩에는 허무라는 허상이 마음자리에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고민정의 詩集부터 앞문에 이러한 비유가 보인다. 품에서 떠난 자식 연민에 늪에서 때로는 관용이라는 마음 층층 감겨온다 -중략- 그리움은 허연 함에 스며들고 다시 채워야 할 기다림이 망설여진다 <떠난 자식> 중 어머니 곁을 떠나 자식에게 보내는 호소이다. 관용과 사랑의 심각하게 교차하며 여기서 허기를 느끼는 자식에 대한 애달픔의 허무가 들어 있다. “내 품을 떠난 자식” 의 고백은 그리움을 만들고 ‘다시 채워야 할’ 필연의 기다림이 있게 되는 것이다. 기다림에는 고독과 허전이 마음을 파고들고 머뭇거리는 행동의 주저에서 용기가 아닌 후회의 기다림만이 앞장서는 이유를 자식에게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모정의 진실이고 아픔이지만 자식은 쉽게 이해 불가인 것이다. 자식이 다시 부모가 될 때 깨달음이 있을 뿐이기에 모정의 관계는 이해나 설명이 훨씬 넘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다. 2> 갈등 사랑의 결정판은 자식은 부모에게 자랑이면서 영원한 기쁨의 산실인 것이다. 그러나 자식이 성장하면서 모정의 관계는 점차 관계의 빈틈이 생기는 일이 자식이 커감에 따라 서로의 강이 생기는 일은 다반사이다. 늘 부모는 자식이 성장해도 어린 시절에 묶어두려 하고 있기에 괴리가 생기는 것이며 때론 실망과 회의감이 들게 되는 것이다. 특히 자식의 결혼 무렵에는 의견이 대립되며 더러는 벽과 벽 사이가 되는 대화의 소통 문제로 의견 소통이 원활하지 않기에 아픔이 동반되어 허무가 길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성성 맴도는 이유는 무얼까 어디에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숫자의 노작처럼 해답은 가물거리고 이것이 인생이고 저 것이 무엇인가? 허전함에 젖어보고 허전에 띄어 본다. <갈등> 중 원인과 맴도는 이유 그리고 답은 몰라도 된다. 여하간 갈등 요인이 자리하고 풀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모정의 슬픔이 놓여 있어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움이다. 자식과 모정 사이에서 가로놓인 문제를 어떻게 해야 만이 명확하게 처리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시간이라는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을 것이다. 세상의 문제는 논리로 풀이를 하겠지만 자식과의 문제는 논리적으로 풀 수 없는 오로지 情의 문제이기 때문에 시간은 情을 용해하는 일면 다시 접합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그 무언의 힘을 가진 관계가 자식과 모정의 관계일 것이다. 고운 마름질 손끝에서 자라 훌쩍 자유인으로 품 떠났다 자식을 늘 속사랑으로 물들이는 가슴 걸러 걸러도 그 자리에 있다. <조각 사랑> 중 늘 자식은 곁을 떠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도 부모는 이를 애달프게 생각한다. 왜 그런가 하면 부모는 자식을 언제나 가슴으로 안아 속마음으로 키우고 자식은 부모를 정으로 느끼는 것에서부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자식은/늘 속사랑으로/물들이는/가슴만으로 사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낼 수 없고 다만 속사랑으로 키우는 일 때문에 ‘훌쩍/자유인으로/품 떠났다. 의 당황이 속절없는 안타까움이 되기에 “걸러 걸러도”/제자리를 지키는 것과 자유인으로 떠나는 간격은 항상 애달픔을 유발하는 이유를 제공하기에 모정은 떠나는 자식에게 섭섭한 마음이 무늬를 그리게 된다. 『소용돌이』는 아들과의 갈등을 나타냈고 「갉아 먹히는 일」은 부모의 역할이 한계에 이를 때, 서글픔을 갖는 모정이 그리움으로 드러난다. 시 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의 소재가 자식과 상관을 갖는 이유 대부분이 모정의 따스함에 이유를 돌릴 부분이다. 자식에게 향하는 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모정의 정은 상처의 깊이를 가질 수밖에 없고 이런 증거는 결국 상처 의식으로 드러날 때 갈등의 심각성을 나타나게 된다. ‘녹지 않은 자락/까닭 놓인 일/운명으로 엮는다. “자식의 흔적” 같은 운명의 문제 – 지난(至難) 한 일이지만 시간이 경과함으로써 치유되는 방법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염려하는 마음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면 자식들은 모정의 깊이를 이해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순수한 사랑 그리고 끝없는 모정이 슬픔에 젖는다면 이는 아픔이기 때문이다. 자식이 부모가 되어 아기를 키울 때 모정을 깨달아도 그때는 이미 강물의 흐름이 멀리 있기 때문이다. 3. 생의 방황 살아 있다는 것은 고민이 많다는 것과 뜻이며 이로부터 방황의 길은 선택을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죽은 자는 고민이 없고 방황의 길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은 생사의 문제는 얼마나 지혜롭게 고통의 바다를 유영하면서 자기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될 때 경험의 층층이 쌓이게 되고 성숙의 이름을 얻게 되는 길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생각하나요. 높고 낮은 자리 아파 우는 설움의 자리네요. 먼저 가는 길 떨치지 못한 이 원망 이래서 한잔 저래서 한잔 끝내는 못났다고 잘났다고 다 그런 건가요. <삶> 중 생사의 문제는 시인에게 무거움과 짐이라고 생각할 때 원망과 허전과 ego의 마음에 들어서는 것이다. 고민정 시인의 경우에도 높거나 아니면 낮은 자리이거나를 막론하고 ‘아파 우는 설음’ 의 자리라는 평범한 고백 앞에 도달된다. 이러한 아픔을 해소하기 위해 술은 위무(慰撫)의 방편으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술에 의지해서 우열을 우기는 상태로 진행이 된다 고민정 시인은 술로 표현을 했으니 비유가 아닌 그대로의 현실인 것이다. 물론 삶에는 의지가 공고해야 하며 의지를 약화하는 일을 자초하면서 고통의 밀물에 쏠리는 경우 운명을 허전과 속상함으로 한탄하게 되는 것이다. 바퀴가 두 번 또 힘겹게 밟는 틀에 낀 씨름인데 도는 삶 모질게 살아온 땟물 옹기종기 절규가 건네지고 이렇게 또 구르는 시간을 태우면 까맣게 숱이 된 마음 가난과 고통을 태우고 노을 매어둔 삐걱거리는 바퀴여 삶이 <생(生)> 중 시인은 바퀴와 바퀴 사이에서 힘겹게 고통의 진행을 체험하는 느낌을 적는다. ‘힘겹게 밟아대는’의 유추로 볼 때, 모질게 살아온 ‘땟물’의 이미지가 삶의 아픔을 상기하는 연상 작용을 하면서 ‘절규’로 이어질 때, 고통의 심연을 지나온 시간을 느끼게 된다. 아울러 그런 시간의 흔적을 ‘까맣게 그을린 마음’과 ‘가난’의 상관이 힘겹게 살아온 상징으로 나타난다. 물론 가난의 아픔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 때문에 페달을 계속해서 밟아야만 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짐이면서 그런 의미를 교환하는 일상이다. 종국은 가난의 사투로 인해 ‘삐걱’ ‘절규’ ‘숱이 된 마음’ 이 아픔을 동반하는 연속적인 의미, 바퀴가 구르는 페달을 밟아야만 앞으로 나아가는 자전거 비유에 삶의 이름이 실리어가는 인상이다. 삶을 살아가는 길에는 순풍이 있는 반면에 파도의 거센 물살을 넘어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반복은 곧 세월이라는 층을 이루면서 내일로 다리를 놓게 되는 것이다. 한 줌도 되지 않는 인간은 이 세월의 주인공이자 때로는 나그네의 운명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일 뿐인 것이다. 인연 연결에 울고불고해보나 숨어든 미로에 싸여 파도만 일고 부표만 남는 삶 <인연> 중 살아가노라면 무서운 파도와 싸워야 하는 일이 더 많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평탄은 위력을 실감하지 못할 것이지만 태풍이나 비바람이 오거나 파도는 거센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이런 도정(道程)을 거치면서 자기의 세계를 확보하는 것은 곧 삶의 신성한 의미가 될 수 있기 에 신념이라는 의지에 다지고 또 다지는 것이다. 생의 문제는 해결이 아니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길인 것이다.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삶의 자세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악착스럽게 혹은 선량함으로 또는 비우고 비우면서 아니면 채우고 채우면서 사는 일 등 삶의 자세는 개인의 품성에 따라 선택적인 문제로 나타나는 것이다. 욕망의 이름에 실려 갈 것인가. 아니면 선한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는 자기 개성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고민정의 일생은 비움에서 그의 명상적인 생의 진로를 확정하는 느낌을 준다. 다음에 詩는 그런 증거로 보이는 흔적 지혜에서 얻어진 이름일 것이다. 굴비 엮어 놓은 길 파이고 갈라진다면 끝내 흩어져 사는 것 도려내지 못하고 견디어야 하는 그것이 사랑이라 하는데 묵언의 자락 고운 잎 하나 기다림을 심는 날 숨겨둔 심 채우려 잠재운다 <비우는 삶> 중 누구나 채움을 열망하는 일상을 갖지만, 욕망은 더 큰 욕망으로 불러오고 다시 욕망의 포로가 됨으로써 결국은 욕망에 먹히는 신세로 전락한다. 이 같은 생은 높이로 오르려는 것 때문에 자칫 높이에서 떨어지는 비극적인 결말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비우면서 사는 일은 낮은 곳으로 향하기 때문에 고통의 이름이 반감되거나 아예 없는 평안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비우는 일은 비우는 크기만큼 만족이 채워지지만 채우는 일은 채움의 크기만큼 오히려 짐이 되는 무게에 시달리는 생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고민정의 어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체득한 지혜의 결과를 발견하게 된다. ‘묵언’의 자락과 ‘숨겨둔 마음’/채우려 잠재운다. 의 노력에 따라 사랑이라는 불빛을 얻을 수 있다면 오히려 안도감은 평안과 안정을 주는 요인이 되는 인상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대의 마르지 않는 아픔 진실을 말할 수 있나요? 그대의 벼랑 끝자락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나요? 그대의 속울음 안은 길 단 하나 사랑뿐인데 그대가 다시 오는 날 피워내는 것 진심이었나요. <秋의 일생> 중 가을이 오색 단풍으로 요란을 떨다 아주 순식간에 허허로움을 가져다준다. 이는 시인과 가을의 단풍과 유사적 정서의 대비라는 점에서 가을의 낙엽이 구르는 허허로움의 허전과 다시 온다는 기다림은 곧 시인의 정서에 부합되는 듯하다. 기다림과 속울음은 모두 사랑이라는 진실에 있음이지만 이를 전달하는 갈등 속에서 통로가 없는 시인의 애절한 정서는 발동되는 듯하다 ‘다시 오는 날’의 기다림은 허무와 허전과 같은 손짓이며 진실을 묻는 일은 허무에 대한 아픔의 호소라는 데서 가을은 사랑을 기다리는 시인의 정서에 내포되는 상징물인 셈인 것 같다. 4. 에필로그 시인은 精을 사물에 투사하여 독자들 앞으로 보내는 메신저의 기능을 완수하는 시인인 것 같다. 일상에서 겪은 체험을 아름다움으로 포장하여 노래할 때 그 가락은 흥겨울 수도 있고 애절할 수도 있다면 고민정의 가락은 후자에 속하는 것 같다. 이는 그의 삶이 이별에서 그리움과 허전을 낳았고 사랑에 대한 추억은 손짓처럼 먼 거리에서 흔들리기 때문이다. 삶에 허전과 허기에 그리움의 교차는 모두 생활의 깊이에서 나오는 가락이면서 시심(詩心)의 나래가 화려함을 갈망하는 태도를 보이기에- 그리고 자식에 대한 정감이 깊어 때로는 단절된 것 같은 고독을 대면하면서 용기와 신념을 안으로 키우는 가락의 시인은 詩에 대한 깊은 인상을 남기는 요인들이며 시인의 오늘의 표정을 확인하는 징표가 되면서 내일로 가는 희망과 행복을 갖고 詩에 대한 열정과 정성을 다하기를 기대하면서 고민정의 정서를 보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3.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 시평집] [희망의 노을] [지구와 자연의 공존]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시는 과학이라고도 하며 마음을 꺼내서 쓰는 창작성을 구축하는 상상의 나래라고들 한다. 그렇기에 마음의 언어의도구로 그리는 행위이기에 언어로 포착된 1편의 시에는 삶과 배경, 혹은 미래로 향하는 시적 의도가 선명히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냉철한 이상과 따스한 감성이 복합적으로 결합할 때 비로소 시의 성(城)을 구축할 수 있다는 논리이고 미학의 감수성이나 차가운 이성을 가질 때만이 시의 이름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문학의 장르라는 것은 운문(韻文)에서 詩의 특성은 가장 치밀하고 가장 근엄하고 또 고독한 상황을 이해할 줄 아는 詩心을 가진 자만이 詩의 중심에 이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아니면 시의 성주는 결코 문을 열지 않는 옹고집을 갖고 있기에 때로 상량한 표정을 알고 그런 뜻을 이해하고 가진 자에 허락을 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시는 정의로 서가를 장식하는 이름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장식으로 책장의 구석을 채우는 단지 이름에 불과 하다는 미명에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여기서 시의 한가지 명확한 특성은 시는 Science 결합이라는 것이다. 나는 수학을 가진 진실의 숫자라 칭할 때 그렇게 정치(精致)함을 요구한다는 뜻을 설명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언어와 언어의 단순한 결합이 아니라 피돌기의 구조를 갖고 화학적 반응으로 일치하는 경우에만, 詩語로 환생하는 절차가 수행될 때 비로소 1개의 이미지가 구성을 위해 보폭을 옮기는 설득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도 이미지와 이미지의 결합은 현실적인 모습이 아니라 결합의 결과가 화학적인 제3의 의미로 이어질 때 이미지의 숲을 구성하는 무성함이 나타난다고 보는 견해이다. 나는 과학, 수학을 하지 못해 숲을 이루는 글을 쓰지 못하여 구속에 매달려 있다고 보지만 위와 같은 일들을 구성의 원리로 포함 시킬 수 있다면 경우에 따라 냉냉하고 입장이 전환 화면서 따스함을 간직하는 신선한 시의 가치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필자가 2009년도 이천 문사원에서 황금찬시인의 詩의 구성을 수업 받을 때 느낌을 전달한다고 할까. 필요한 한가지가 바로 詩 창작자의 '마음, 이 주요 모티브를 형성하는 요소가 되어야 한다는 작고하신 문사원 채수영 박사에게 수없이 들어 왔기에 시는 사랑을 암시 하거나 노래하는 몫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시인의 마음이 어떤 함량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둑 시인 “프랑소아, 뷔용”은 감옥에서 시를 썼지만 출옥하면서는 시를 버린 행적처럼 - 그의 [유언시집]은 전반부에는 감옥과 간수에 대한 증오, 저주받은 청춘과 배반 받은 연애에 대한 회한 등이 생의 허무와 무상을 노래했고 후반부에는 은인, 어머니, 여자, 친구들에게 보낸 유언에 야유, 조소, 해학을 섞어 그 속에 자기의 모든 감정을 담았던 진실의 언어가 감옥 안에서 나왔다는 사실- 어둠의 감옥 속에서 시의 빛을 발견한 것이라면 감옥 밖에서는 아예 감수성을 잃어버리는 눈이 보이지 않는 마음을 읽게 된다. 의식의 두 세계 중에 특이하게도 어둠의 그의 시는 결국 프랑스에서 서정시의 개척을 이룬 공로가 있다지만 불행히 어디에서 죽었는지 그림자조차 발견하지 못한 신비의 시인이었다고 하지만 필자도 지나가듯이 본 경험과 간접적으로 수업을 들은 바에 의해 옮겨보는 것이다. 시는 포괄적 언어라고 배웠기에 시인의 창작에는 저마다의 습관과 맥락이 있다고 한다. 불빛이 환한 세상에서 시를 만나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어둠 속에서 아니 아픔과 그리움 속에서 오히려 빛을 찾아 나서는 시의 창작 습관은 서로 다르지만 물론 나는 후자의 속 하지만 이는 중요한 이유는 없다고 본다. 어디에서 집중의 근거를 찾아 거기에 온 정신으로 투시의 빛을 모을 수 있는 프리즘의 기능과 창작자와 마음이 일치할 때 비로소 결과물에 도달한다고 한다. 어떤 시인은 소음이 있는 시장에서도 시 쓰기가 가능하고 또 음악을 들으며 거기에 빠져드는 정서의 이끌림을 가질 수 있을 때, 각기 다른 환경에서도 시를 두드리는 행동을 보인다. 시는 장소의 문제나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詩의 꼬리를 어떻게, 어떤 상황에서 시를 대면하는 가의 여부는 전적으로 시인의 성품에서 저마다 다른 태도로 대면하는 것이기에 이는 체험을 용해하거나 가상 창작으로 이미지로 결합하는 일은 각자 시인의 두뇌에 치밀성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사실 시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결합이 논리와 이성 그리고 결합이 무결점으로 완성될 때 시와 사이언스(Science)의 유사성이 일치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흔히 오랜 경륜의 시인 작품과 신인의 시의 차이는 이런 경험에 용해하고 많은 지적능력, 지식 즉 수많은 책을 소화한 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결합의 무결점이 없을 때 원로의 작품에서는 흠결이 없지만 신진 시인의 작품에서는 과도한 수사와 꾸밈이 나열될 뿐 결합의 무결점이 아닌 절뚝거리는 언어의 튀기만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시적 풍모가 안정감과 의미에 무결점을 보일 때 독자의 마음을 잡을 수 있다고 한다. 신인의 작품에는 꾸밈이 과도하면서도 안정감을 이탈한 털털거림이 장애 요인으로 나타난단다. 단지 얼마나 치밀한 경험과 사물을 결합할 수 있는 가의 여부가 시의 안정성과 메시지 전달에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느냐의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치밀한 정신의 요소를 적재적소에 배합하는 기술과도 다름이 없을 때 시인의 역활은 때론 장인 정신의 임무를 부여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랜 습작과 열망의 결합이 집중될 때 날마다 시를 대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비평가들은 역설하고 주장들을 많이 하는 것을 보았다. 다시 말해 시는 배움의 척도 보다는 시야를 넓게 보는 안목과 치밀성, 논조 수사, 등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인데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오랜 습작, 열망의 결합, 집중의 난이도라 할 수 있겠다. 라고 비평가들은 말들을 한다. 필자는 솔직히 말해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우울증세, 정신사고, 어리숙한 생각, 등을 겪으면서 정신적인 책을 많이도 보았다고 자부한다. 미치지 않고서는 시인이 될 수 없다 했듯이 미치지 않고는 시적 감각이 떨어진다고 보는 초로이기에 정신적, 물리적, 스승인 황금찬 스승과 이천 문사원 채수영 박사에게 감사를 드린다. 좋아서 하는 일에는 신명이 나는 법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일에 대한 호볼호의 상관이 능력으로 귀결되는 이유도 가미될 것이다. 누구나 능력이란 결과 앞에서 운위하는 설득일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일이라도 동일한 시간에 감동과 감탄을 보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업적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그 업적의 성과에 대한 평판조차 훌륭할 수 있다면 이는 좋아서라는 피상적인 말이 핵심을 벗어나는 경우는 아닐 것이다. 사실 시라는 존재는 창작, 과학, 등 무한대(無限大)의 미학의 선율이라는 데에는 모두 공감을 할 것이다. 그리고 시의 밭을 일구는 일은 성실과 노력 운명에 밭을 헤쳐나가는 슬픔에서도 웃음기가 있고 밝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쓸쓸함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언제나 노랫가락의 길을 따라 숲으로 가면 되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詩의 사이언스(Science)]{시는 과학이다.}라는 말로 결말을 내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3. 07. [대중문화 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삼라만상] [이승섭시평집 [시의 숲에 빠지다.] 베스트셀러가 되다] [자연 과학의 신비] [자연의 생명 사상]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 글을 쓰는 일이란 엑스터시(Ecstasy) 즉 감정의 경지 또는 신의 경지나 무아지경을 방문함으로 입구를 방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글의 행로는 삶의 과정과 표정을 관리하게 되는 것이다. 글이란 글의 표정은 곧 작가의 생을 대변하는 일이며 인생을 묘사하는 글이며 시는 인생을 압축하는 일이라고 들 하는 것이다. 글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렇기에 1편의 시에는 전 생애가 들어있는 것이며 감정의 추이와 생의 전개도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글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의도를 내장하는 명제는 글을 쓰는 이유이면서 본질로 길을 내는 상징의 숲을 건설하는 것처럼 시의 건축의 의미를 찾는 이치라는 뜻이다. 단순한 언어로 조합해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시인 자신의 체험을 담고 이를 아름다움으로 포장하는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질서를 균제미로 담아 의미의 숲을 이룩할 때, 비로소 감동의 누선(淚腺)을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인의 정신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조감을 할 수는 없지만 언어의 표현을 통한 흔적(trauma) 찾기는 심리학적인 원조를 받을 때는 가능한 해법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니 시는 고백의 특징을 예외로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고백적인 현상을 시적 장치로 객관화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詩는 정신의 에센스를 나타내는 기교에서 시인 자신의 감수성을 고양(高揚)하는 면밀하고 정치(情致)한 계산에서 의미의 논리를 갖출 때 독자의 뇌리를 장악하는 경지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공 즉 생’ “있는 것은 없는 것이라” 순환의 논법은 우주의 질서 원리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단독이나 전체와 부분은 언제나 연결고리를 형성하면서 우주의 진행은 앞으로도 앞으로 진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주의 드라마에서 때로는 관객이고 주인공이라는 상관을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우주의 주인공처럼 사고하는 것도 모순이기에 관찰자의 자세로 바라보는데서 깨달음이 있어야 할 것이라면 과학의 결국은 인간을 성숙의 단계로 올려주는 계단일 수 있지 않을까? 이만치의 거리(距離)는 저만치의 상대적인 개념일 때 이만치의 자각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시는 원래 단순한 감수성의 나열이 아니라 치밀한 생각과 계획 속에 비로소 언어의 경제성을 운위(云謂)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詩 의 심연(深淵)은 곧 시인 정신의 깊이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시를 낯설게 표현하려 하고 기교를 부리는 것이다. 그리고 독자는 시인의 속을 들여다보기 위해 일정한 도식을 동원하려 해체하는 수고로움을 가질 때 독자와 시인의 관계는 소통의 행복과 감동을 만나는 결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고민정의 시는 주변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주조를 이루면서 관계에서 빚어지는 감수성의 줄기와 주위에 사람의 관계에서 오는 그리움의 깊이와 일상 삶에서 느끼는 일 등이 시의 행동을 장악하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더불어 주위의 환경과 꽃에 대한 시화(詩化)는 자연에 일부를 향기로 전환하는 의미로서 고민정의 시적 감성을 탐방하려 한다. 2. 순환의 의미 찾기 1> 허무와 배고픔 허무라는 것은 인간이 살면서 필연으로 따라오는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삶의 요소를 만들면서 인자(因子)에 의해 결정하고 요체를 만드는 것이다. 모두가 인간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현실에 대한 만족에 도달할 수 없는 간격만큼 허무(虛無)를 갖게 되는 것이다. 고민정의 詩에는 허무라는 허상이 마음자리에 차지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고민정의 詩集부터 앞문에 이러한 비유가 보인다. 품에서 떠난 자식 연민에 늪에서 때로는 관용이라는 마음 층층 감겨온다 -중략- 그리움은 허연 함에 스며들고 다시 채워야 할 기다림이 망설여진다 <떠난 자식> 중 어머니 곁을 떠나 자식에게 보내는 호소이다. 관용과 사랑의 심각하게 교차하며 여기서 허기를 느끼는 자식에 대한 애달픔의 허무가 들어 있다. “내 품을 떠난 자식” 의 고백은 그리움을 만들고 ‘다시 채워야 할’ 필연의 기다림이 있게 되는 것이다. 기다림에는 고독과 허전이 마음을 파고들고 머뭇거리는 행동의 주저에서 용기가 아닌 후회의 기다림만이 앞장서는 이유를 자식에게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모정의 진실이고 아픔이지만 자식은 쉽게 이해 불가인 것이다. 자식이 다시 부모가 될 때 깨달음이 있을 뿐이기에 모정의 관계는 이해나 설명이 훨씬 넘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다. 2> 갈등 사랑의 결정판은 자식은 부모에게 자랑이면서 영원한 기쁨의 산실인 것이다. 그러나 자식이 성장하면서 모정의 관계는 점차 관계의 빈틈이 생기는 일이 자식이 커감에 따라 서로의 강이 생기는 일은 다반사이다. 늘 부모는 자식이 성장해도 어린 시절에 묶어두려 하고 있기에 괴리가 생기는 것이며 때론 실망과 회의감이 들게 되는 것이다. 특히 자식의 결혼 무렵에는 의견이 대립되며 더러는 벽과 벽 사이가 되는 대화의 소통 문제로 의견 소통이 원활하지 않기에 아픔이 동반되어 허무가 길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성성 맴도는 이유는 무얼까 어디에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숫자의 노작처럼 해답은 가물거리고 이것이 인생이고 저 것이 무엇인가? 허전함에 젖어보고 허전에 띄어 본다. <갈등> 중 원인과 맴도는 이유 그리고 답은 몰라도 된다. 여하간 갈등 요인이 자리하고 풀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모정의 슬픔이 놓여 있어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움이다. 자식과 모정 사이에서 가로놓인 문제를 어떻게 해야 만이 명확하게 처리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시간이라는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을 것이다. 세상의 문제는 논리로 풀이를 하겠지만 자식과의 문제는 논리적으로 풀 수 없는 오로지 情의 문제이기 때문에 시간은 情을 용해하는 일면 다시 접합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그 무언의 힘을 가진 관계가 자식과 모정의 관계일 것이다. 고운 마름질 손끝에서 자라 훌쩍 자유인으로 품 떠났다 자식을 늘 속사랑으로 물들이는 가슴 걸러 걸러도 그 자리에 있다. <조각 사랑> 중 늘 자식은 곁을 떠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도 부모는 이를 애달프게 생각한다. 왜 그런가 하면 부모는 자식을 언제나 가슴으로 안아 속마음으로 키우고 자식은 부모를 정으로 느끼는 것에서부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자식은/늘 속사랑으로/물들이는/가슴만으로 사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낼 수 없고 다만 속사랑으로 키우는 일 때문에 ‘훌쩍/자유인으로/품 떠났다. 의 당황이 속절없는 안타까움이 되기에 “걸러 걸러도”/제자리를 지키는 것과 자유인으로 떠나는 간격은 항상 애달픔을 유발하는 이유를 제공하기에 모정은 떠나는 자식에게 섭섭한 마음이 무늬를 그리게 된다. 『소용돌이』는 아들과의 갈등을 나타냈고 「갉아 먹히는 일」은 부모의 역할이 한계에 이를 때, 서글픔을 갖는 모정이 그리움으로 드러난다. 시 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의 소재가 자식과 상관을 갖는 이유 대부분이 모정의 따스함에 이유를 돌릴 부분이다. 자식에게 향하는 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모정의 정은 상처의 깊이를 가질 수밖에 없고 이런 증거는 결국 상처 의식으로 드러날 때 갈등의 심각성을 나타나게 된다. ‘녹지 않은 자락/까닭 놓인 일/운명으로 엮는다. “자식의 흔적” 같은 운명의 문제 – 지난(至難) 한 일이지만 시간이 경과함으로써 치유되는 방법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염려하는 마음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면 자식들은 모정의 깊이를 이해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순수한 사랑 그리고 끝없는 모정이 슬픔에 젖는다면 이는 아픔이기 때문이다. 자식이 부모가 되어 아기를 키울 때 모정을 깨달아도 그때는 이미 강물의 흐름이 멀리 있기 때문이다. 3. 생의 방황 살아 있다는 것은 고민이 많다는 것과 뜻이며 이로부터 방황의 길은 선택을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죽은 자는 고민이 없고 방황의 길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은 생사의 문제는 얼마나 지혜롭게 고통의 바다를 유영하면서 자기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될 때 경험의 층층이 쌓이게 되고 성숙의 이름을 얻게 되는 길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생각하나요. 높고 낮은 자리 아파 우는 설움의 자리네요. 먼저 가는 길 떨치지 못한 이 원망 이래서 한잔 저래서 한잔 끝내는 못났다고 잘났다고 다 그런 건가요. <삶> 중 생사의 문제는 시인에게 무거움과 짐이라고 생각할 때 원망과 허전과 ego의 마음에 들어서는 것이다. 고민정 시인의 경우에도 높거나 아니면 낮은 자리이거나를 막론하고 ‘아파 우는 설음’ 의 자리라는 평범한 고백 앞에 도달된다. 이러한 아픔을 해소하기 위해 술은 위무(慰撫)의 방편으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술에 의지해서 우열을 우기는 상태로 진행이 된다 고민정 시인은 술로 표현을 했으니 비유가 아닌 그대로의 현실인 것이다. 물론 삶에는 의지가 공고해야 하며 의지를 약화하는 일을 자초하면서 고통의 밀물에 쏠리는 경우 운명을 허전과 속상함으로 한탄하게 되는 것이다. 바퀴가 두 번 또 힘겹게 밟는 틀에 낀 씨름인데 도는 삶 모질게 살아온 땟물 옹기종기 절규가 건네지고 이렇게 또 구르는 시간을 태우면 까맣게 숱이 된 마음 가난과 고통을 태우고 노을 매어둔 삐걱거리는 바퀴여 삶이 <생(生)> 중 시인은 바퀴와 바퀴 사이에서 힘겹게 고통의 진행을 체험하는 느낌을 적는다. ‘힘겹게 밟아대는’의 유추로 볼 때, 모질게 살아온 ‘땟물’의 이미지가 삶의 아픔을 상기하는 연상 작용을 하면서 ‘절규’로 이어질 때, 고통의 심연을 지나온 시간을 느끼게 된다. 아울러 그런 시간의 흔적을 ‘까맣게 그을린 마음’과 ‘가난’의 상관이 힘겹게 살아온 상징으로 나타난다. 물론 가난의 아픔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 때문에 페달을 계속해서 밟아야만 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짐이면서 그런 의미를 교환하는 일상이다. 종국은 가난의 사투로 인해 ‘삐걱’ ‘절규’ ‘숱이 된 마음’ 이 아픔을 동반하는 연속적인 의미, 바퀴가 구르는 페달을 밟아야만 앞으로 나아가는 자전거 비유에 삶의 이름이 실리어가는 인상이다. 삶을 살아가는 길에는 순풍이 있는 반면에 파도의 거센 물살을 넘어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반복은 곧 세월이라는 층을 이루면서 내일로 다리를 놓게 되는 것이다. 한 줌도 되지 않는 인간은 이 세월의 주인공이자 때로는 나그네의 운명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일 뿐인 것이다. 인연 연결에 울고불고해보나 숨어든 미로에 싸여 파도만 일고 부표만 남는 삶 <인연> 중 살아가노라면 무서운 파도와 싸워야 하는 일이 더 많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평탄은 위력을 실감하지 못할 것이지만 태풍이나 비바람이 오거나 파도는 거센 상처를 남기기 때문이다. 이런 도정(道程)을 거치면서 자기의 세계를 확보하는 것은 곧 삶의 신성한 의미가 될 수 있기 에 신념이라는 의지에 다지고 또 다지는 것이다. 생의 문제는 해결이 아니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길인 것이다.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삶의 자세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악착스럽게 혹은 선량함으로 또는 비우고 비우면서 아니면 채우고 채우면서 사는 일 등 삶의 자세는 개인의 품성에 따라 선택적인 문제로 나타나는 것이다. 욕망의 이름에 실려 갈 것인가. 아니면 선한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는 자기 개성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고민정의 일생은 비움에서 그의 명상적인 생의 진로를 확정하는 느낌을 준다. 다음에 詩는 그런 증거로 보이는 흔적 지혜에서 얻어진 이름일 것이다. 굴비 엮어 놓은 길 파이고 갈라진다면 끝내 흩어져 사는 것 도려내지 못하고 견디어야 하는 그것이 사랑이라 하는데 묵언의 자락 고운 잎 하나 기다림을 심는 날 숨겨둔 심 채우려 잠재운다 <비우는 삶> 중 누구나 채움을 열망하는 일상을 갖지만, 욕망은 더 큰 욕망으로 불러오고 다시 욕망의 포로가 됨으로써 결국은 욕망에 먹히는 신세로 전락한다. 이 같은 생은 높이로 오르려는 것 때문에 자칫 높이에서 떨어지는 비극적인 결말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비우면서 사는 일은 낮은 곳으로 향하기 때문에 고통의 이름이 반감되거나 아예 없는 평안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비우는 일은 비우는 크기만큼 만족이 채워지지만 채우는 일은 채움의 크기만큼 오히려 짐이 되는 무게에 시달리는 생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고민정의 어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체득한 지혜의 결과를 발견하게 된다. ‘묵언’의 자락과 ‘숨겨둔 마음’/채우려 잠재운다. 의 노력에 따라 사랑이라는 불빛을 얻을 수 있다면 오히려 안도감은 평안과 안정을 주는 요인이 되는 인상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대의 마르지 않는 아픔 진실을 말할 수 있나요? 그대의 벼랑 끝자락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나요? 그대의 속울음 안은 길 단 하나 사랑뿐인데 그대가 다시 오는 날 피워내는 것 진심이었나요. <秋의 일생> 중 가을이 오색 단풍으로 요란을 떨다 아주 순식간에 허허로움을 가져다준다. 이는 시인과 가을의 단풍과 유사적 정서의 대비라는 점에서 가을의 낙엽이 구르는 허허로움의 허전과 다시 온다는 기다림은 곧 시인의 정서에 부합되는 듯하다. 기다림과 속울음은 모두 사랑이라는 진실에 있음이지만 이를 전달하는 갈등 속에서 통로가 없는 시인의 애절한 정서는 발동되는 듯하다 ‘다시 오는 날’의 기다림은 허무와 허전과 같은 손짓이며 진실을 묻는 일은 허무에 대한 아픔의 호소라는 데서 가을은 사랑을 기다리는 시인의 정서에 내포되는 상징물인 셈인 것 같다. 4. 에필로그 시인은 精을 사물에 투사하여 독자들 앞으로 보내는 메신저의 기능을 완수하는 시인인 것 같다. 일상에서 겪은 체험을 아름다움으로 포장하여 노래할 때 그 가락은 흥겨울 수도 있고 애절할 수도 있다면 고민정의 가락은 후자에 속하는 것 같다. 이는 그의 삶이 이별에서 그리움과 허전을 낳았고 사랑에 대한 추억은 손짓처럼 먼 거리에서 흔들리기 때문이다. 삶에 허전과 허기에 그리움의 교차는 모두 생활의 깊이에서 나오는 가락이면서 시심(詩心)의 나래가 화려함을 갈망하는 태도를 보이기에- 그리고 자식에 대한 정감이 깊어 때로는 단절된 것 같은 고독을 대면하면서 용기와 신념을 안으로 키우는 가락의 시인은 詩에 대한 깊은 인상을 남기는 요인들이며 시인의 오늘의 표정을 확인하는 징표가 되면서 내일로 가는 희망과 행복을 갖고 詩에 대한 열정과 정성을 다하기를 기대하면서 고민정의 정서를 보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3. 07.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정서 고독의 즐거움] [밤 바다 어선 무료의 확증 지향] [이승섭시집]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1>소요의 여행 사는일은 모두가 여행하는 길일 것이다. 그렇다고 뚜렷한 목적지가 있는 일상의 여행이 있는가 하면 미지의 공간으로 무작정 떠나는 여행도 있을 것이다. 전자에는 목적지의 방향이 설정되어 있지만 후자에는 확실한 장소가 없이 떠나는 어둠의 여행일지 모른다. 인간은 어짜피 살아가는 일이 여행인 것은 분명하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의 삶의 길을 떠나는 여행은 태어나서 마지막 공간에 이를 때까지 생의 길은 굴곡과 시련을 지나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는 끝 모를 방황이 여정(旅程)으로 설정된다. 이는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길이 아닐까? 시는 언제나 삶의 길에 대한 표현이 된다. 아름답게 노래하는 경우도 있고, 악착(齷齪)한 삶의 괴로움을 버티는 인내의 노래도 있지만, 더러는 기쁨과 행복에 대한 환희의 가락도 있다. 어느것을 선택하든 자기의 삶에 대한 한계를 갖고 표현에 집중하게 된다. 물론 시인마다 삶의 태도에는 일정한 규격화가 아니라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갖고 시화(詩化)의 길을 걷기 때문에 저마다 다른 표현의 맛을 구가하게 된다. 이를 시를 읽는 이유는 이런 맛깔스런 개성의 감상이기 때문에 저마다 다른 세계의 지향(志向)에 감동을 보내게 된다. 사실 도시에 사는 사람의 정서와 전원에서 사는 사람의 정서가 시로 나타내는 표현은 확실히 다른 듯하다. 왜 그런가 하니 환경의 영향이 시로 흡수되는 과정이 표현의 묘미에서는 다르게 나타난다는 뜻이다. 자연은 인간의 본질이고 이 자연을 어떻게 육화하여 표현하는가는 흡수되는 환경의 결과에 따른 시적 표정- 도시는 메마른 상상의 기저가 중심이 된다면, 전원에서는 생산된 시는 물기 있는 상상의 흡수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필자의 시는 어떤 시일까? 의문이다. 2> 은유의 길 건너기 시는 비유일 뿐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의 특성은 응축(凝縮)이라는 줄임의 미학일 때, 그 전개의 방식은 산문과는 확연히 달리 가지치기의 군말을 버리고 오로지 줄기만을 위한 표현의 미학은 곧 비유의 방도로 이미지 뼈를 어떻게 산뜻하게 건져 올리는가의 방법에 시인 재능이 귀속되는 것이다. 늘이고 펴는 일은 산문의 서술(敍述)기법이라면 시는 이런 방법과는 정 반대의 방향에서 함축(含蓄)의 여백을 갖는 일이 우선 시 된다. 동양화의 여백의 미학은 서양화의 논리의 구축과는 다르다. 왜 그런가 하면 서양화는 칠하고 다시 닷칠하고의 기교에 여백을 갖지 않는 채움의 정치(精緻)조력을 받아서 풍경을 그리는 화가의 정신 표현이라면, 시는 이와는 달리 여백과 함축을 방도(方途)로 독자에게 의미를 전달해주는 고급한 여유를 갖는 비유가 성립된다. 때문에 시는 여타 산문의 어떤 것보다 어렵고 지난(至難)한 기교를 갖는 첫째 방도가 비유의 도구를 앞장 세우는 일이다. 물론 시적 전개의 장치에는 리듬과 이미지, 비유 그리고 상징이나 인유 그리고 패러디 등 다양한 구조적인 내포(內包)가 있을 때 풍윤한 표현의 길이 넓어지는 것에서 고급화의 방도- 시인은 결국 자기 정신의 고급화를 지향하는 예술논의 중심에 자기 정신의 의도(意圖)를 세우는 일이 언어 기교로 나타는 바, 이는 언어운용의 응축이라는 절차가 가장 먼저 등장하게 된다. 언어 감각은 생동감 있고 온화한 내면의 기품이 담담한 것을 풀어내는 기교가 신선함을 주는 것을 당연한 것이라 본다. 겨울과 봄 사이 봄 눈 녹듯 메마른 둥지 헤치고 이곳 저곳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간지러움 긁으면 긁을수록 더욱 가려운, 아으, 미치고 환장할 가려움이여 <겨울과 봄 사이> 중 사실 겨울이란 삭막하고 모든 물상이 잠들어 조용한 이미지로 정리될 수 있다. 그러나 어둠의 겨울에서 점차 여명의 봄날로 다가들수록 “이곳 저곳”이 스멀 거리면서 살아나는 신비가 “간지러움”으로 생동감을 부추긴다. 이런 표현의 묘미는 결국 리얼한 표현의 여운을 대동하면서 시가 갖는 여백의 미학이 감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위 글의 비유의 신선함은 마무리에 “아으” 미치고 환장할 “가려움”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비 시적인 언어일지 모른다. 그러나 적절함을 기준자로 한다면 “아으” “미치고 환장할 가려움”은 그야말로 시의 화룡정점의 역할을 수행하는 시어가 된다. 독목(禿木)의 앙상한 나무들과 겨울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에서 스멀스멀 솟아 나오는 부스럼딱지같은 여기 저기의 “선연한 눈빛”의 생명체를 바라보는 모양- 시인의 가슴을- 시인의 가슴을 적시는 생명의 보임은 찬탄을 불러 온다. 다시 한번 예를 들어 본다. 앞산이 서운산이 각혈하는 어느 소리꾼의 득음인 양 긴 여운을 담아 오늘 아침 초대장을 보내 왔다 그리고 산을 안고 오는 각혈을 품으란다. 웅장한 소리꾼의 각혈을 그리란다. <가을 풍경> 가을의 깊이로 접어드는 풍광의 리얼함이 눈에 보이는 듯 “각혈”하는 소리꾼“의 비유가 강력하고 적절하며 상상의 여정을 초청하는 역활을 다하는 모습에서 아주 심오한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각혈은 소리꾼의 길고 멀고 닦은 세월의 흔적이며 수행의 결과물이 완성된다. 득음(得音)으로 이어지는 길이면서 소리꾼의 존재가 빛나는 이름으로 환치되는 상상이 마무리되는 뜻 일게다. 완성의 표정을 시인에게 그리라고 하는 초청장에서 과정의 깊이를 상상하면서 각혈을 시인이 직접 표현하라는 것은 독자에게 펼쳐지는 것이기에 시의 맛깔이 나는 듯하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의 함축의 묘미를 여백의 무궁한 깊이를 제공하여 재능을 보는 것 같아 심히 즐겁다. <2>의미의 전개와 플라톤의 변증법 모든 사물에는 의미가 있어 존재하는 실물과 접하는 길이 만들어진다. 소설의 이야기 전개는 구조를 통해 그리지만 시는 이미지로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으로 전해진다. 의미는 곧 소설의 구조와 상통하지만 시의 의미는 결코 앞장서서 깃발을 흔드는 직접적인 방법이 아니라 감추고 숙이면서 드러내는 은근미의 속살을 보여주는 이름이어야 한다. 우회하지만 결코 멀리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쉽게 또는 가까운 곳에서 비유의 의상(衣裳)을 걸치고 화려하게 혹은 고담(枯淡)한 정서의 깊이가 살아있는 것 같은 신선미가 전재되어야 한다. 시어의 선택에 어려움은 이런 조건들이 결코 정석이 없는 시인만의 뇌수(腦髓)에서 발원하는 맑음이어야 한다. 이는 미적 경험과 상상력이 결합하여 표현되는 과정에서 시인의 숨은 기교가 발휘되는 특성을 뜻한다. 결국 의미는 감동의 일차적인 관문이고 이 관문을 지나면서 삽상(颯爽)한 기운을 대동하는 데서 의미의 신선감은 감동의 누선(淚腺)을 자극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온몸으로 밤을 노래하는 너 홀연히 들어 날 아득한 세상 별 자리로 이끌며 새벽을 낳는가 왜 그리 호젓한 음악을 틀어 놓는가 무엇이 안타까워 무엇이 외로워 이슬 맞으며 노래를 부르는 너 함께 노래를 부르자꾸나 <한 밤의 귀뚜라미 노래>중 ‘온몸으로’의 이미지가 중요하다. 이 과정을 지나면 비로소 고진감래(苦盡甘來)의 교훈이 자기화가 되기 때문에 신기한 ‘새벽을 낳는가’라는 탄성이 나올 수 있는 여백이 담겨진다. 이는 시적인 안정감 즉 시인의 정서 균형이 평형을 유지하는 건강성으로 해석되는 부분이다. 예술의 미학에서 이른바 개념에 알맞게 이룩된 형태는 현실성으로서의 이상(理想)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된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일정한 사물에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시에는 비유로 시인의 마음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될 때, 자신 속에 또 다른 자신을 그림으로 그리는 역할이 수행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결국 이런 자기 표현의 그림이 비유와 상상의 결합으로 형태화되는 과정이 수립되는 결말이 감동으로 정리 된다는 뜻이다 <3> 갈증과 물의 변증법 시는 자연의 이치와 등가(等價)를 이룰 때, 합리성을 갖는바, 세상의 진리와 상통하게 되는 것이다. 합리라는 의미는 상식과 같고 이 상식은 인간이 정한 오랜 도덕적 기준이다. 물론 이 기준은 불변성이 아니라 가변성의 진리이다. 언제나 변할 수 있고 또 변화할 수 있는 여지를 갑고 있는 기준이라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 자체가 절대의 논리에 갇힌 존재가 아니고 때에 따라 변하는 일이 당연지사라는 뜻이다. 그러나 갈증에는 물이 필요하고 목마름을 채우면 이내 또다른 공간의 욕망이 발동될 때, 새로운 경지가 나타나고 이로부터 인간의 역사는 또 다른 영역의 변화가 진행형이 된다. 그렇다면 갈증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 것인가? 살아있기 때문에 요구가 일어나고 갈증은 물의 부족을 요구하는 생리적인 현상이지만 존재 자체의 표현이라는 뜻이다. 왜 그런가 하면 생체는 순환의 기운이 있고 이런 요구에 부족 현상이 발생하면 갈증의 농도가 도(度)를 높이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어둠이 태풍처럼 몰려와 거대한 몸 짓으로 위협하지만 지극히 작은 촟불 하나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빛의 그림자일 뿐 헛것에 넋 나가 탕진한 젊음이다. 어떻게 살아갈 할 것인가는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를 화두처럼 붙잡고 습한 음지 굼뱅이처럼 붙잡고 새어 나오는 신음소리 숨죽여 견뎌온 어둠의 시간들 닿지 못할 먼- 별 꿈꾸며 뜬눈으로 밤새는 목마른 동물이다. <어둠의 빛> 중 어둠은 빛을 낳는 모태로 생각하는 시인의 마음인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면 ‘지극히 작은 촞불 하나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어둠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운명은 어둠이 포장되었기 때문에 빛을 향하는 행동이 다음 단계의 진전을 예약하는 것이다.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뚫고 벗어나려는 의지의 물살을 일으킬 때, 비로소 새로운 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둠의 상징인 동굴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와 별을 꿈꾸는 ‘목마른 동물’ 로 갈증의 늪을 벗어나는 길이 보인다. 고난의 상징인 얼음장의 아래로는 소리로 환생하는 흐름에서 절망을 탈출하는 시인의 마음이 밝아지는 듯하다. 이는 곧 춘봄을 암사하는 것 같다. <4>산뜻한 자연의 시 에필로그 시라는 것은 시인의 정서가 감수성의 표정이라 하겠다. 어떤 정서가 주류를 이루는가는 그의 삶이 뒷받침될 때, 시의 표정으로 말하게 된다. 시는 순수의 정서가 온화하고 질박(質朴)하다. 이는 시인의 마음이 시어로 포착되는 심성의 이유도 있지만 청량한 자연의 요소가 바탕을 이루면서 더불어 시인의 마음을 이끌고 있는 풍광이 한몫 거드는 요소도 부인할 수 없겠다. 생동하는 은유의 숲속을 거니는 신선미와 어둠에서 빛을 추구하는 생명 약동이 의미를 생산하고, 물의 요소가 많은 것도 자연의 도움으로 일어서는 시심의 흥취(興趣)라는 생각인 듯하다 특히 풍경을 만들면서 여기에 소리의 개입이라는 시를 찾고 사는 독특한 득의(得意)로움 같아서 기분 좋은 마음으로 에필로그 한다. 2023.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편주의 시간여행] [운무가 주는 행로] [이승섭시평집]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詩를 일별(一瞥)한다면 시인의 특징이 언어로 주입된다. 왜냐하면 언어로 그의 신념이나 사상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시집을 읽으면 대체로 언어의 빈도에 따라 그 시인의 정신적인 추이를 가늠할 수가 있다. 문학은 곧 그 사람의 정신에 나타나는 고백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꾸미고 치장하고 분칠한다 해서 궁극에는 시인의 생각을 시적인 은유나 알레고리 혹은 상징으로 포장하였지만, 본질은 고백이라는 형태를 보이는 심리적인 표현이다. 내시의 초기에는 계절이나 바람에 의해 시어에 의지해서 과거와 미래 혹은 현재의 풍자를 시도해보았지만 어디까지나 바람은 촉매의 징검다리라 할까? 그러나 내 생각의 본질은 그리움이 요동을 친다. 점차 나이를 먹어 가면서 이런 생각이 시나, 수필, 칼럼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웃음이 저절로 피식 웃음이 난다. 왜 그런가 하니 내 과거가 지금까지 질펀한 추문이 아니라 인간적인 애(愛)라 할까? 겉만 번지르한 그런 허세, 허풍, 허영에만 눈이 멀었었다. 돌아보면 그런 것 같다. 아마도 여린 마음에 그리움의 막연한 동경이 결핍 증상으로 표현 된 것이 아닐까 한다. 愛가 결핍되어 앓던 날 풍경의 풍광이 마냥 어두워 다시 지나 돌아보면 그것이 눈물겨운 이름 아름다운 꽃이었네 저 멀리 돌아간다면 풍경화로 보듬는 향기 자아에 숨겨 혼자 펴보는 추억 바람난 그리움으로 오롯이 젖고 있네 <내 그리움>중에서 1연의 내용만으로 보면 첫사랑이나 2번째 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 같은 뉘앙스가 될 것이기에 나는 그런 일에 겉만 번지르한 모션만 취했지 실속은 없었다. 기실 자유스러운 상상의 길이 없었다면 드라이함도 기준만 넘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내 그리움은 막연하고 또한 특별하게 붙잡을 뼈대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실질적 사랑에 빠지거나 발을 담가본 적이 없었기에 상상의 벌판만 왕래하거나 삶의 목표를 그리움의 궁극으로 생각한다면 내 자유 아니 벌판에 풀어 논 망아지 같아 이상에 머무르는 안개 같은 막연한 상상의 그리움이 일정한 대상이 토착화된 것들이 아니었기에 때로는 정치의 곧음을 나타내는 정의감일 수도 있고 이루지 못한 꿈들의 파편들이 아니었겠나 하는 반추가 가능한 것이다. 내 어린 나날은 정도와 의무감 때론 의리에 유달리 생각과 일편단심에 가진 날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실행에 옮긴 것보다 에고의 길에 남다른 비판의 칼날이 번뜩이는 직장 생활이었고 사회 기준의 옳음에 판단 이단적인 사고를 유지했기에 대부분 교과서에 정의만을 외우고 있을뿐 - 현실은 무기력하고 침묵으로 지나는 경우가 태반임을 잘 알고있다. 문학비평에도 그런 현상이 사회 일반적 생활이 다름이 없다고 할까? 이는 옳은 평가와 바라보기가 안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침묵하기보다는 실행에 옮기고 비판하는 기능이 좀 더 예민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성미 때문에 늘 이단적인 혹은 외곽에 머무르는 일이 다반사였기에 비판의 기능은 외로움이고 고독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후회한 적이 없다. 고개 숙이고 엎드려 사느니 고개 들고 사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태생적 성질머리가 그러니 어찌하랴. 이런 결과물이 결국은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대한 그리움의 진원지인지도 모르겠다. 성공적인 결과보다는 불만족의 경우가 더 많은 삶의 세월을 지탱해 오면서 자랑거리 하나 없지만 말이다. 이루지 못한 것이 많을수록 그리움은 더욱 증폭한다. 내 글의 표현은 결국은 삶의 도정을 나타내는 언어의 포장인 셈이다. 단지, 이성에서 사랑을 갈구하는 것보다는 생의 길에 이루지 못한 아득한 일들이 사실 그리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라는 유추의 생각에 이를 때, 더욱 간절한 상념의 길이 열리고 그 길로 가고 싶은 막연한 동경이 발동된다. 이런 그리움의 진원은 늘 애간장으로 내 마음을 끌고 어디로 가곤 또 오곤 한다. 무작정 따라가면서 불러보는 그리움의 표정은 선하고 따스함을 갈구하는 마음이 전부라면 감정은 나이를 먹지 않은 특징이 있는 것 같아 애달파하게 밀려오는 고독은 왜일까인지는 아직도 (?)물음표이다. 내 그리움의 최종 종착지는 애매하고 붙잡을 수 없는 "아득함"에서 내 특성이 잘 나타난다. 또한, 이루지 못한 것이 많을수록 발동되는 그리움은 사랑 같은 의상으로 시의 표정을 만들고 있는 내가 어느 때는 철없는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면 실소(失笑)가 떠돌며 애고(Ego)의 오리무중임이 그리움의 종착점이 아닐까 생각하며 이만 끝내련다. 2023. 05.1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자연 육화] [꽃의 왈츠] [그대들은 시의 맛을 아는가?]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1. {시의 표정이란} 시는 바로 시인 자신들이 모든 이야기를 함축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가장 진솔하고 일생을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의 특성은 곧 시인의 삶에 대한 기록이면서 과거와 미래 현재의 표정을 관찰하는 방법이 돈다는 점에서 진실의 기록인 것이다. 물론 시적 특징은 함축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모든 과거, 현재 미래까지 응축이 내포되는 것이다. 즉 서정은 오로지 현재라는 시점에서 조망(眺望)의 기교를 만나야 하기에 독자는 언제나 내면으로 통하는 길을 지키는 긴장(緊張)이 요구되는 것이다. 시를 그리면서 긴장은 독자나 시인이나 필요한 덕목이다. 시인에게는 언어의 탄력이 필요한 이유이고 독자는 감동에 따르는 정서의 환기 현상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의 배열이나 생략 등 시적인 기교와 장치의 여부에 부응하는 종합적인 성분이 좌우되는 일종의 인상에 해당되는 것이다. 시는 언어로 재료로 하여 감정을 부추기는 일이 곧 시의 필요성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시인은 늘 언어의 무게를 따지는 일이 우선 되어야 할 것이다. 시는 다양하고 소재의 특성을 들어야 한다. 자연 현상에 대한 다양한 관심이 소재로 등장하고 삶의 방법이 그 나름대로의 들어 있을 뿐 아니라 생의 깊이를 방문하면서 나오는 원숙성이라 할 것이다. 이는 고뇌의 젊은 날이 지나면 느끼는 사물과 대화가 친숙성을 더하는가 하면- 이는 주로 회고의 정념(情念)으로 나타났다면 미래를 지향하는 소재도 희소한 것도 사실이다. 가을과 겨울 감각이 이를 뜻한다면 초목의 시적 대면이 많은 이유이다. 사실 도시 중심의 정서가 아닌 전원의 추억이 영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리움의 정서가 많은 것은 이는 여린 생을 살아온 여적이 보이고 자식을 키우고 난 이후의 썰물에서 느끼는 허망이 뜻이 들어나기 때문이다. 2.{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1) 사랑과 그리움 사랑은 그 자신의 쾌락을 구하지 않으며 자신을 위해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는 헌신이 자리할 때 그 마음에 찾아드는 신기루이면서 오아시스가 되기 때문이다. 순간에 자리잡는 특징은 대상을 아름다움으로 포장하고 이를 영원의 장막으로 가릴 때, 사랑은 따스한 이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단계는 우선 그리움이라는 언덕이 있고 그 언덕을 넘으면 푸른 이름을 가진 사랑의 정원에 들어간다면 거긴 행복한 나라의 이름을 얻는 자유가 다가오는 듯 하다. <여린 마음>으로 시작 된다. 여리기 때문에 무언가를 의지하려는 발상이 시작 되기 때문이다. 이는 의탁의 갈증이며 그 갈증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의미에 다다른다. 여름로 내딛는 자줏빛 노을이 맑은 푸르름을 지천으로 토할 때 그리움에 짓눌러 붉어진 눈 하늘거리는 바람이 헤집고 마음 지나니 정녕 그대의 전갈인지 슬픔 가득 여린 마음 의탁 되어 푸름에 실려 온다. <여린 마음> 시간은 여름을 재촉하고 또한 황혼 무렵에 푸르름 지천으로 토할 때 그리움에 짖눌러 붉어진 눈 - 그리움에 채색된 처절한 의탁이 화자의 마음을 대변하고 “그대의 전갈”처럼 착각되는 시심을 자극하면서 그리움을 불러오는 느낌이다. “슬픔 가득”이라는 비극적 무드로 진행 되면서 “여린 마음”을 점령하면서 출렁이는 정서가 그대에게 향하는 전가리 된다. 무엇을 그리는 정황으로 보아 슬픈 이름으로 연상이 된다. 자- 그러면 시인은 그리움의 비극의 확실한 중심에서 시를 만났고 이는 실재가 아닐 수도 있고 실재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시는 상상의 산물이고 상상력으로 포장된 시심이 곧 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의 정서가 지향(志向)하는 방향은 내성적이고 부드러운 사람에게서 느끼는 사고의 일종일 것 같다. 이는 성격과 상상이 결합하여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하며 거기서 푸름의 위안과 평안을 쟁취하려는 의도가 앞서며 의탁하는 내면을 보게 된다. 유진영의 시는 실재 모습과는 달리 또 다른 상상의 그리움을 잘 표현 한다고 할 수 있다. 푸름의 계절에 왜! 외롭고 그리운지 싱그럽고 푸르른 계절 온몸으로 포용해 새들의 울음소리 바람에 실려 흩어지는 사랑의 영혼들과 멍 때리는 작전에 넋 잃은 몸부림을 모두 끌어안고 그대 5월 여왕 되고 싶어라 <5월 사랑> “그대”라는 미지(未知)의 대상과 5월은 늘 연결 된다. 이러한 이미지의 연결과 본질 - 5월은 새싹의 푸르름이 녹음을 전하고 있다. 5월 사랑을 그리워하는 역설적 표현으로 대체한다. 새들의 울음소리가 바람에 실리고 이끌려 시인의 정서가 6월의 여왕으로 멍~때리는 작전에서 그리움의 넋을 위로한다. 사랑은 인간이 도달하고자 꿈꾸는 최종 종착지일 것이다. 사랑은 모든 이들의 추구하는 종점이고 인간 삶의 궁극이기 때문에 사랑의 실현은 곧 5월 사랑의 가치로 환산한다. 이상향이면서 자유의 중심인 곳을 멍 때리며 관조하는 매취 되는 언어에서 상상의 공간을 유영하면서 여왕의 사랑이라는 상상이 저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하늘 별』 『연가』 등은 시인의 정서를 대변하는 듯하다 하늘 별은 그대 사랑 묶여 있어 자유가 그립다. 사랑이 있고 없고 그대는 아름다운 빛깔로 나타나 마음 흔들어 놓고 산란한 봄바람에 울렁증 생겨 내 삶의 자아를 하늘 별에게 묻고 물어 사랑의 이름으로 하늘별로 뜬다. <중략> <하늘 별>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마치 하늘 별에게 조심스럽게 묻는 소중한 다룸에서 연결된다. 사랑이라는 하늘 별이 고귀한 천상의 별은 이미지 이면서 상승의 가치앞에 신비감을 더해준다. 별에서, 사랑의 이미지는 무게를 갖는 을렁증이 생겨 자아를 묻는 것은 효과를 극대화 해준다. 유진영 시인의 시는 그리움과 사랑이 너무나 많다는 것은 굳이 현실적 연관을 갖기 보다는 미지의 공간을 향하는 의식적인 상상으로 유추된다. 물론 명료함의 시의 본질은 아니나 모호성(Ambiguity)이 시적인 본질이지만 의미(意味)의 일탈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나 미지에게 묻고 답하는 것은 어느 상상의 풍부한 사상이 아닐까도 생각된다. 시는 과학적인 의미의 구축을 가져올 때 비로소 언어의 다양성을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움과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의 이미지 속에 서로 다른 표정과 같다. 상상만 해도 수줍은 미소 온몸을 감싸고 내 성안에 온몸으로 부딪쳐와 상상으로 열린 하루가 부푼다. 난 그만 당신의 포로가 되어 행복의 닻 그리움으로 실어 내리고 애뜻함으로 밀려와 바람으로 싱그럽게 그대가 달려온다. <상상의 그리움> 어느 대상 앞에 자신이 작아지는 것은 사랑의 진수에 이르면 나타나는 현상이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랑에서는 자기(自己)가 없으며 오로지 대상만이 크게 다가오므로 진실함이 넘치는 사랑에서는 자기 자신이 대상에 포함하여 내포 되어지는 것이다. 이런 경험과 경륜은 진실한 공간에서 행복의 종착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대를 향하는 이름만이라도 “당신의 포로” “수줍은 미소”에서 행복이 충만해지며 내 의식의 성안에 가득 차오르는 기쁨과 설레임의 하루가 행복하다. 이는 포로 에서의 구속에서 행복을 만끽하는 망아(忘我)의 경지가 아닐까? 2) 관계 설정의 정(情) 부모라는 것은 마음의 고향이고 안식처이기에 꿈을 저장하는 암시를 나타내면서 돌아가 의지하고 싶고 모태의 대상이다. 그러나 부재한 부모일 경우는 안타까움과 그리움의 정서와 정회(情懷)가 더한층 부풀게 된다. 이는 누구나 갖는 보편성의 마음이면서 이를 나타내는 것은 인간의 상정(常情)일지라도 애뜻함이 더하게 된다. 유시인의 경우 『“어머니”』 『“생의 삶”』 등은 과거 지향성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애뜻한 마음이 늘 가슴에 남아 있기에 어머니를 연상하는 마음인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지금껏 살았습니다. 꽃이 피면 꽃인 줄 알았고 저며오는 마음만이 깊숙한 어느 곳에 맺혀만 있었습니다. 아련한 그 얼굴 보일 듯 말 듯 그저 솟구치는 그리움만입니다. 그리움 매달아 점점 커가는 빈자리를 채우고 또 채우고만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어머니> 과거를 회상하는 구조의 마음을 아직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어머니 마음-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진수이기에 더욱 절절한 세월의 아픔인 것이다. 채우고 또 채우려 해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그 언어에 구구절절 미어지는 애저한 마음이 언어 속에서 춤을 춘다. 『“보일 듯 말 듯”』 『“그저 솟구치는 마음” 』 등 감정이 이입되며 감정의 절정(絶頂)이 행방을 알 수 없는 묘연함 속에 그저 상상으로만 그리는 어머니의 그림자를 지금도 알 수 없다는 뜻에서 사랑으로 가는 영원한 길이라는 상징에 이른다. 3) 삶의 길 사람은 살아 있기에 현실에 대응하고 여기서 새로운 역사를 창출하기 위한 상상의 여정을 떠나는 것이다. 이는 오늘이라는 뒷받침이 없다면 인간이 역사는 공허한 이름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현실에 충실하다는 것은 곧 내일을 맞이할 가능의 시간을 확보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비록 하루살이의 인생일지라도 거기엔 진지와 탐색 그리고 성실한 책임, 소임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삶의 생애가 흘러가듯 아까운 시간을 쪼개서 살다 하강 곡선을 그리네. 인간은 만물의 동물이듯 죽음의 그늘 벗지 못하고 세상만사 삶의 터전 준비 중 죽음의 길로 가는 우리 삶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도대체 오리무중이다. <삶의 생> 우주의 장구한 시간에서는 수유(須臾)의 찰나이지만 마지막 가는 날까지 인간이 가는 과정을 아직도 우리는 미로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이 가는 죽음을 붙잡을 수 없기에 언제나 가족의 임무 가정의 임무 자신의 임무를 떠안고 살아 가지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유시인의 『“오리무중”』이라 하며 죽음의 그림자도 모르면서 살아간다. 사실 모든 존재의 가치는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사실을 형이상학적으로 인간도 이 지구상에 테어나면 결코 나갈 수 없는 운명적인 존재라는 뜻에서 시가 상승되는 듯하다. 바람 자락에 가버린다 해도 밉지 않다. 세찬 바람에 홀씨 되어 사랑의 분신을 준다. 그리움 매달아 커 가는 빈자리로 날려 보내는 홀씨 모두 내어 주고 허탈한 미소로 사각이며 흔들릴 뿐이다. 긴 들녘 저 빈 들녁 그믐달 서러운 듯 윙윙거리며 서러움 달랜다. <억새 풀> 중 마음이 공허할 때 고독은 다가온다고 한다. 이는 자기 발견에서 느끼는 일이기 때문에 자각의 농도에 따라 공허의 함정이 나타난다. 고독은 그렇게 다가오며 바쁘거나 힘겨운 젊은 날 세월에 언덕을 넘느라 고달픈 시절이 지나고 나면 어느 순간에 모두 짝을 찾아 저마다 떠나고 나면 비로소 자아의 발견- 여기서 고독이 깃드는 것이다. 『“허탈한 미소”』 『“서러움이 윙윙 거린다”』 등 이는 시인 자신이 그믐달로 형상화하여 서러움을 인생에 대입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비록 늙어진다는 것은 고독의 맛도 강해진다는 뜻 일게다. 왜 그런가 하면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혼자가 된다는 애달픔이 짙어지고 이러한 경향들이 인생의 허무와 손을 잡게 된다. 빈 들녘의 그믐달을 연상하면 이러한 징후는 마음 깊게 공허함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4) 자신의 길 시는 대답을 말하는 자신의 길이 아니라 길에 대한 노래를 부를 때, 독자는 감동의 추수(追隨)를 거둔다. 이는 개인차에 따라 서로 다른 이미지로 이해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미지의 해답은 시를 살아나게 하는 요인이 된다. 한편의 시에서 해답을 얻을 수도 있고, 문제를 다시 발견할 수도 있다. 유진영의 시에는 해답을 얻는일 보다는 문제의 깊이를 발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는 황혼의 풍경화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생의 모습이 액자로 담겨 있기도 하고, 추억을 찾아가는 아슬한 이름들이 나타나는 삶의 애정에서는 깊은 정감이 드러나고, 부모의 사랑이 따스함으로 회고될 때, 인간의 세계가 새삼 포근해진다. 이는 오랜 연륜의 생에서 비롯되는 맛깔이라는 점에서 마치 옛정에 그리움이 넘치는 고향을 방문하는 것 같은 뉘앙스를 남기는 차분하고 자기를 관조하는 어조(tone)의 시인인 듯 하다. 다시금 필자도 추억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고 느끼며 나가려 한다. 2023. 05. 02. 대중문화평론가/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자연위 귀한 <자택 연못 호수>] [삽교천 카페 人] [그대들은 시의 맛을 아는가?]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시를 쓴다는 것은 엑스타시의 경지 즉 접신의 경지를 방문함으로서 입구를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의 행로는 여기서 표정 관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시의 심연은 곧 시를 대변하는 일이 되는 것이며 자아의 평정심을 찾는 길이 도는 것이다. 그리고 시는 자아의 평화가 온다면 사랑의 시연을 찾게 되는 것은 시를 그리는 사람은 모두 알 것이기 때문이다. 시가 단순히 감수성의 나열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 속에 비로소 언어의 평화 심연을 운위하고 시의 위의(威儀)를 갖추고 사랑의 심연을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시의 심연은 곧 곧 시인 정신의 깊이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에 이를 낯설게 표현하는 기교를 발휘한다. 하기에 독자는 시인의 비밀을 찾기 위해 일정한 도식을 동원하려 해체하는 수고로움을 가질 때 독자와 시인의 관계는 소통의 행복, 즉 감동을 만나는 일이다. 생활의 주변 상황이 주조를 이루면서 전개되는 홍미선의 감수성의 줄기와 가까운 사람의 부재에서 오는 그리움의 깊이와 삶에서 느끼는 일 등이 시의 행로를 장악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꽃에 대한 자아의 심연은 자연의 향기로 전환하려는 의미가 연결된다. 이제 홍미선의 자아의 평화, 사랑의 심연 찾기로 들어가보고자 한다. 2.<시의 허무 자아의 허기 사랑 의미 찾기> 1)허기와 허무의 자아 허무는 인간의 삶에 필연으로 따라오는 인자(因子)이면서 삶의 요소를 결정하는 몫을 다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살아있는 인간에게는 현실에 대한 만족에 도달될 수 없는 간격만큼 허무를 갖게 된다. 홍미선의 시에는 허기와 허무가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시집의 서문부터 이런 냄새가 물씬 풍긴다. 품 안에 자식 연민에 빠지니 때론 용서가 자아 층층 감겨온다. 그리움은 하얀달에 스며들고 다시 가득 담아야 할 기다림이 머뭇거린다. <부모의 마음>- 엄마의 곁을 떠난 자식에게 보내는 호소가 용서와 갈등에서 심각하게 교차하고 허기를 느끼는 자식에 대한 애달픔이 길들여진다. 품 안에 자식이 떠난 고백은 그리움을 만들고 채워야 할 기다림이 옮겨온다. 기다림에는 고독이 물씬거리고 머뭇거리는 행동의 주저에서 용기가 아닌 후회의 기다림만이 앞장서는 이유를 자식에게는 결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모정의 진실이고 아픔이지만 자식은 쉽게 히해를 못하는 것이다. 그 자식이 다시 부모가 될 때 깨달음이 있을 뿐이기에 자식과 모정의 관계는 이해나 설명을 넘는 고차원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2. 갈등의 자식 사랑의 결정체는 자식은 부모에게 자랑이면서 영원한 기쁨인 것이다. 그러나 성장의 도(道)와 함께, 자식과 부모와는 점차 간격이 벌어지는 일- 성장의 나이에 따라 부모와의 사이엔 강(江)을 만들게 되면서 점차 밀려나는 일이 부모의 몫이 된다. 이러한 일들은 유사 이래 진행된 자식과 부모의 관계 보모는 자식을 항상 어린시절에 묶어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에서 뒤쳐진 이유로 실망과 때론 절망을 맛보게 된다. 튿히 성장의 절정인 결혼, 무렵에는 의견 대립이 극에 이르면서 더러는 벽과 마주치며 외면이거나 – 부모는 시련의 시절을 감당하게 된다. 이런 갈등은 대화의 소통 문제에서 기인 하지만 쉽게 정리되지 못하는 아픔이 이끼 마련인 것이다. 자꾸 맴도는 이유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숫자에 노작거림 해답은 가물거리고 이것이 인생이고 저것이 무엇인가 쏟아짐에 젖어보고 강열함에 띄어본다. <모정의 갈등>- 이유와 원인 그리고 해답은 몰라도 된다. 어떻든 갈등의 요인이 자리하고 풀이할 수 없는 문제 앞에 모정의 슬픔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해결이 가능한가? 다시 말해 자식과 부모와의 사이에 가로놓인 문제를 명확하게 처리가 가능한 것인가? 기실 해답은 없을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일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 자식과 부모의 문제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논리로 풀이할 수 없는 오로지 정(精)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간은 정(精)을 용해하는 일면 다시 접합하는 능력을 발휘는 어떤 힘을 가진 관계가 자식과 부모의 관계일 것이다. 고운 손끝에서 자라 훌쩍 자유가 되어 떠났다. 자식은 언제나 사랑 속으로 물들이는 가슴 걸러내도 걸러내도 제 자리에 있구나 <자식 사랑>- 자식은 부모곁을 떠나는 것을 대수롭게 여기지만 부모는 이를 애달프게 생가한다. 왜 그런가 하면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안아서 키우지만 자식은 부모를 정으로 느끼는 것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자식은 언제나 사랑속으로 물들이는 가슴”만으로 사는 이유가 된다. 겉으로 드러낼 수 없고 다만 속 사랑으로 키우는 일 때문에 “걸러내도 걸러내도” 제 자리를 지키는 것과 자유인으로 떠나는 간격은 항상 애달픔을 유발하는 이유를 제공하기에 모정은 떠나는 자식에게 섭섭한 마음이 무늬를 그리게 된다. 시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의 소재가 자식과 상관을 갖는 이유의 대부분이 모정의 따스함에 이유를 돌릴 뿐이다. 자식에게 향하는 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어머니의 정은 상처의 깊이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이런 증거는 결국 상처 의식으로 드러날 때 갈등의 심각성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염려하는 마음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면 자식들은 모정의 깊이를 이해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순수한 사랑 그리고 끝없는 모정이 슬픔에 젖는다면 이는 아픔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식이 부모가 되어 아이를 키울 때 모정을 깨닫는다해도 그때는 이미 강물의 흐름이 멀리 가 있기 때문이다. 3) 삶의 방향 살아 있다는 것은 허기와 허무가 존재하고 고민이 있다는 뜻이고 이로부터 방황의 길은 선택을 헤아리게 된다. 죽은자는 말이 없으며 고민도 없다. 결국 생의 문제는 얼마나 지혜롭게 고통의 바다를 유영하면서 자기 성취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될 때 경험의 층이 쌓이게 되고 성숙의 이름을 얻게 되는 길을 만들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나요. 높고 낮은 자리 아파 우는 허기의 자리네요 먼저 가는 길 떨치지 못한 원망 이래저래 한잔 술 끝내는 못났다고 잘났다고 다 그런 건가요. <생(生)> 생의 문제는 시인에게 무거운 짐으로 작용할 때, 허기와 평화와 원망이 교차 되는 것이다. 홍미선의 경우도 높거나 낮거나 자리를 막론하고 “아파”우는 “허기의 자리” 라는 평범의 고백에 젖어든다. 이런 아픔을 해소하기 위해 술은 위무(慰撫)의 방편으로 작용을 하며 술에 의지해서 우열을 우기는 상태로 진행 되는 듯하다. 상상력의 발동이 “한잔”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시는 때로 간접체험- 상상으로 먼 여행을 떠나는 가공의 세계를 이룩하는 창조주의 때문이다. 물론 생에는 의지가 공고해야 함은 사실이지만 의지를 약화하는 일을 자초하면서 고통의 밀물에 휩쓸리는 경우엔 운명을 한탄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들쑥날쑥 거리는 바퀴 힘겹게 밟아대는 틀에 낀 씨름 일진데 돌고 있는 모질게 살아온 땟물 올망졸망 절규가 건네는 정 이렇게 굴러온 시간을 태우면 까맣게 그을린 마음 가난을 태우고 노을 자락 매어둔 삐걱거리는 패달 <삶의 바퀴> 시인은 바퀴를 힘겹게 고통의 진행을 체험하는 느낌을 적은 것 같다. “힘겹게 밟아대는”의 유추로 볼 때 “모질게 살아온 땟물”의 이미지가 삶의 아픔을 상기하는 연상 작용을 하면서 “절규”로 이어질 때 고통의 심연을 지나온 시간을 느끼게 된다. 아울러 그런 시간의 흔적을 “까맣게 그을린 마음”과 “가난”의 상관이 힘겹게 살아온 상징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 같다. 물론 가난의 아픔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 때문에 패달을 계속해서 밟아야만 생의 문제가 해겨되는 짐이면서 그런 의미를 교환하는 인상이 짙다. 결국 가난으로 인해 “졀규” “그을린 마음”이 아픔을 동반하는 연속적인 의미 - 페달을 밟아야만 앞으로 나아가는 자전거의 비유에 삶의 이름이 실리어 가는 인상을 준다. 살아가는 길엔 순풍이 있는가 하면 파도의 거센 물결을 넘어야 하는 일이 번다히 진행된다. 이런 반복은 곧 세월이라는 층을 이루면서 내일로 다리를 놓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 세월의 주인공이자 때로는 나그네의 운명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4) 사랑의 심연 사랑은 막연한 추상성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또 절실한 명칭으로 따라오는 이름일 수도 있다. 어떻든 사랑은 포근하고 따스함을 전달하는 이미지의 명칭 - 꽃이거나 바람이거나 홍시인은 추상적인 뉘앙스가 강한 듯하다. 왜 그런가 하면 자식에 대한 명확한 의미도 아니고 그렇다고 떠난 짝에 대한 절실함도 아닌 또 꽃에 대한 암시 - 사랑의 의미가 추상적이듯 홍시인의 사랑의 암시도 다소 추상적 전달이 아닌가 한다. 사랑은 빛 사랑은 꿈 사랑은 욕망 사랑은 파도 사랑은 눈물 사랑은 비밀 <사랑> - 사랑에 대한 정의가 6가지인지는 모르나 사랑을 명확하게 정의한다는 답안은 있을 수 없지만 그만큼 폭 넓은 이름으로 인식이 된다. “빛”으로 “꿈” “욕망” “파도” “눈물” “비밀” 긍정적 보다는 아픔이 수반되는 의미가 앞서는 것을 보면 이는 홍시인의 사랑에 담겨진 상처는 겉으로 드러나기 보다는 안으로 숨기는 은밀한 표현이 더욱 짙음을 느낀다. 아주 독특함으로 은유와 암축을 시키지 않으며 자신의 추상적 암시를 주는 듯하여 애매모호한 느낌을 주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 등을 집약하여 좀 더 확실성이 수반되는 시였으면 하는 바램이며 긍정마인도로 바꾸어 시향을 그린다면 지금보다 더 빛나는 시인이 되지 않을까 한다. =에필로그= 시인은 정(精)이라는 언어를 사물에 투사하여 독자 앞으로 보내는 메신저의 기능을 완수하는 시인이 아닐까? 유추하면서 일상에서 겪은 체험을 아름다움으로 포장하여 노래할 때 그 가락은 흥겨울수도 있고 애절할 수도 있다면 홍시인의 가락은 후자에 가깝다 할 수 있다. 이는 그의 삶이 이별에서 그리움을 낳았고 사랑에 대한 추억은 손짓처럼 먼 거리에서 흔들리기 때문이다. 삶에 허기와 그리움의 교차는 모두 생활의 깊이에서 나오는 가락이면서 시심(詩心)의 나래가 화려를 갈망하는 태도를 보인다. 또 자식에 대한 정감이 깊기 때문에 때로는 단절된 것 같은 고독을 대면하면서 자아의 심연을 대면하면서 용기와 신념을 안으로 키우는 가락의 주인공 - 홍 시인의 깊은 내면을 보고 또 다른 깊은 인상을 남기는 요인이 되었다. 한마디 덧붙인다면 긍정적 마인드 사고를 갖고 시심을 발휘한다면 더욱 빛나는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하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3. 04. 28. 대중문화평론가/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이승섭시평집] [말라르메 무한의 수단 외출] [흙 속의 진주 연꽃]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시인이란 세상을 살면서 일어나는 모든 사물을 노래하고 부딧치고, 느끼면서 사고한 상상력을 출현시켜 자기만의 물감으로 채우기를 원한다. 이것이 바로 이미지스트의 에고와 숨기는 미학의 색채를 아름답게 꾸미려 하는 것이다. 나름의 평가는 자신으로 책임의 한계 속에 존재하기에 남의 허락을 받고 나온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시도 마찬가지이다. 오로지 시인 자신이 해결의 실마리를 푸는 것이기에 자기 운명을 그리기 위해 표정을 만나고 순탄치 않은 고행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현실의 삶에 존재하고 있기에 본인이 분칠하고 신명을 발휘하는 것이다. 또한 정신 탐구 또한 철학이란 탐구로 용해될 때 시인이 펼치는 색채는 깊이와 넓이를 구비하는 단계로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이 없는 시는 공허하고 무의미한 언어의 불과한 것이다. 또한 시의 그릇은 삼라만상 우주와 자연현상 그리고 인간사의 모든 영역을 커버하는 도구로 현실에 밀접한 상관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수필이나 소설, 산문 등이 맨 앞자리에 서 있지 못하는 것은 시처럼 삼라만상의 세계를 단 몇 단어로 그릴 수 없기에 시를 맨 위 위치에 놓아 정신의 지표로 삼는 것이라 할 것이다. {2. 시 표정 시법이란} A. 아우구스티누수는 “시는 악마의 술이다. 라는 말을 했다. 이 경우 “악마”라는 말은 좋은 이미지로 풀어내는 “뗄 수 없는 운”적인 상관관계를 의미한다. 마치 끝까지 따라오는 그림자를 떼어 버릴 수 없는 이치처럼 시인의 삶에 시는 끝없이 그리고 다시 갈증으로 다가든 악마와 웃음과 같다는 말이다. 더불어 홍신남 시인의 불가분 요소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의탁할 곳 없는 세상에 누굴 믿으며 살겠나. 시만이 전부인데 의지할 곳 없는 세상 객 손이나 온다면 시 한수 넋두리 하고 싶은데 그저 영혼만이 가슴에 남아 그리운 시만 남았네. 이 노릇 어이할까? <시의 영혼> 중 인간은 늘 집중하는 정신과 분주한 일상을 사는 이들이 있다면 전자는 집중의 초점이 되는 사람이며 후자는 정신 줄기를 상실한 사람이라면 홍신남 시인은 전자에 속한다고 하겠다. “의탁할 수 없는 세상”이라는 그의 고백은 진솔한 편이지만 변통이 되지 않는 그런 솔직 담백한 느낌이 들며 고백하는 심경이 “영혼만 가슴에 남아” 간절하게 애타는 마음을 표시하는 시인 듯하다. 누구나 저마다의 특성이 있으며 저마다 개성이 다르겠지만 시인은 독특한 그만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개성의 톡특함은 곧 시의 특성이 되고 이 특성 속에 시인의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일정한 패턴으로 유형화 되는 것이다. 꽃 몽우리 열리는 소리 오, 너무 황홀해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비에 젖어도 꺼지지 않는 촛불 꽃이여 세상 밝히는 아늑한 빛이여 눈부신 꽃향기 가슴에 품는다. <꽃의 향기> 중 홍신남 시인은 친숙하고 온화하며 따스함을 간직한 시인이다. 위의 시를 보면 일종 이미지 구축 술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아름다운 꽃의 등식이 성립되고 꽃은 향기로 상승의 이미지를 남긴다. 중심은 꽃이고 향의 이미지가 맺음을 담긴다. 시는 이미지의 발굴이고 그 이미지를 연결고리로 하여 시인의 사상을 혹은 삶의 표정을 감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반응의 예술인 것이다. 예를 들면 마음의 넓이가 큰 사람은 소재의 이미지가 크고 보통의 일반 사람에게서는 시인의 정서만큼 따라오게 되기에 시는 곧 그사람을 표현하고 그사람만큼 쓰고 있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2 연에 “황홀” 6 연에 마무리에는 “향”으로 시각적인 이미지에 마지막 정서가 따스함을 연상하면서 고귀함을 부추긴다. 시라는 것은 순수와 담백한 정서가 꾸밈이 없을 때, 시적 가치가 드러난다. 일산의 소재가 튀느 법이 없고 자연스레 나오는 물줄기가 시원하고 구수하다. 마치 성숙을 넘어서는 안정감을 준다. 일상에 만족을 알면 그의 삶은 가치로 변화한다. 이를 일러 안분지족(安分知足)말로 처리 하지만 이런 지족의 마음을 갖고 사는 욕심없는 무심의 경우가 홍신남 시인이다. 내 무엇을 바랄 게 무엇인가. 더 가질 것이 무에 있는가. 바람도 산천도 구름도 어디로 떠나는지 여기서 이대로 가르쳐 주시게나 =중략= <삼라만상의 이치> 중 이 짧은 글의 시 1편에서 정서와 사상 그리고 느림의 미학으로 시를 그리는 것을 알 수 있다. “내 더” “무엇을 바랄 게 없는” 생활의 모습이 간결하면서도 가볍고 또 진중하면서도 무게가 넘치는 모습을 대변한다고 할까. “여기서 이대로 가르쳐 주시게나”. 는 이렇게 무심의 시인인 듯하다. 왜냐하면 시는 욕심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을 내려놓고 무심의 경지로 신명의 정서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것이 시인 것이다. 그의 시 작품 <상상> <내자> <우주> <부자의 삶> <가화만사성> 등 너무도 많은 시를 일일이 논평은 어렵기에 간단하게 일부만 평한다. 어느 정도 그 속을 들여다보니 너무도 여유롭고 자유스럽고 무욕에서 나타나는 그런 시들이다. 편안하고 무심의 여정에서 시를 그리는 모습이 보이기에 너무나도 안정감과 장중함을 느낀다. 3. 에필로그 = 여정의 표정 시는 자연스런 유로(流路)일 때 감수성의 파문은 아름다움을 불러오는 것이다. 이런 이치는 생활 속의 진솔함이 바탕을 이루는 요소가 되고, 이런 요소는 곧 정신의 줄기를 이어가는 모태가 된다. 시라는 것은 꾸미고 가꾸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상태로 진입하는 부드러움이고 여기서 언어의 압축에 따른 시어의 탄력이 생성되기에 홍신남은 계산되어지는 시가 아니라 자연스런 유추해서 그의 심성 기록이고 삶의 모습이 전체로 투영되는 하모니를 이룬다. 그는 시에 생애를 담는 오로지 시와 더불어, 시와 함께 보폭을 맞추는 우직하면서도 꾸준한 시심을 가꾸는 것 같다. 또한 그이 가족 사랑에 아담하고 따스한 양지에서 도란거리는 소리를 삶의 전부로 삼는 일상적인 가치에 헌신하는 모습이 담백하고 향기가 난다. 소시민의 생을 벗어나지 못한 이 땅의 부모요 지아비로서 작은 것들에 애정을 가치로 생각하는 사고에서 가족과 이웃에서 단란함일 일군 모습이 선하게 보인다. 그의 시는 욕심없는 투명성의 정서를 시로 담아내는 자연스러움에서 아름다운 가락으로 독자의 가슴을 울리는 그런 시인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의식이 지향하는 느림의 미학에서 정서의 표정이 향기로 나타나기를 기대하면서 다하지 못한 숙제를 내려놓은 듯하여 다소 아쉽지만 그 숙제를 시인 스스로 마침표 찍기를 고대하면서 내려 놓는다. 2003. 04.26. 대중문화평론가/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황혼의 놀이터] [우로지 생태공원 음악분수] [대중문화평론가의 베스트셀러 책 ]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언어의 성숙은 정신과 행동에 수반하는 것”이라고 (T.S ELLOT)는 <고전이란 무엇인?가>에서 언급을 했었다. 왜냐하면 정신의 원숙은 행동의 원숙으로 이어지고 모든 조건이 언어로 표현될 때 비로소 글의 무게를 감당하는 역할을 갖는다는 뜻이다. 결국 이 둘의 상관은 인간의 가치와 문학의 가치와 비례되는 등식(等式)을 도출하는 말과도 같다. 그렇다고 선한 사람이 선한 시를 쓰는 것만은 아니다. 사상의 고매성이 묻어나는 언어에는 깊이와 맛깔스런 표현이 감동을 자극하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란 가능성은 어마든지 있다. 왜 그런가 하니 고매함은 그런 격식을 갖춘 성품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학의 언어는 곧 인격의 수용(受容)이라는 점에서 문학 표현과 인간의 상관성은 궁극의 도달점인 감동에 메시지를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윤길상을 말한다면 지적이면서 원숙한 성품을 가진 시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설픈 언어의 과시가 아닌 가슴 속에서 우러 나오는 맛깔 스런 감수성으로 나타날 때 느끼는 삽상(颯爽)함과 풍미가 있는 점에서 남다른 시의 역할이 기대되는 시인이라 본다. 윤길상 시에는 가을날의 청아한 소리가 메아리로 들리는 뉘앙스에는 안도감과 미소를 동시에 받아보는 반가운 편지와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이제 그 이유를 추적하는 길을 답파(踏破)해보자. 2. 여정의 상상 속으로 1) 성품의 성찰 시는 지적인 결과물이 아니다. 왜 그런가 하면 시인의 감수성이 시적 장치를 마련하여 우회적으로 나타내는 기교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어설픈 현학적 욕망의 과시에는 냉소가 발생하지만 비록 눌변일지라도 진실을 내포할 때는 소통의 미학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윤길상의 시에 담겨진 정신의 요체인 듯하다. 왜냐하면 도시적인 냉철함이나 과학의 칼날이 번뜩이는 자세가 아니라 체온과 체온이 부딧치는 우리네 시골 장바닥의 다감하고 따스한 인정이 스며있는 그런 정서가 시인의 마음에 유려(流麗)한 흐름으로 다가든다. 지금 난 먼 곳까지 못갔어요. 고향이 코앞이지만 여기가 어디인지 어둠 속에 수 많은 별들만 주의만 맴돌고 먼 곳만 보이는 아스라한 인걸요. 방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누군가 그 안에 있을 것만 같아 한참을 망설이다 문열고 들어가면 누군가 내 방에 들어와 나 아닌 나가 되어 금방 나간 것같이 두려워 지네요. 내 기억 속엔 왜 엄마의 모습이 없나요? 그런데 자꾸 엄마가 보고파 저요. 아마도 내 몸에 흐르던 엄마의 피였나 봐요. 엄마 이 냄새가 나를 살아있게 하나 봅니다.- 중략- <엄마의 연서> 윤길상의 시는 부드럽고 지적인 듯하다. 그리고 그 부드러움에는 다양한 언어의 의미를 감추는 기교가 보인다. 쉬우면서도 어렵고 어려우면서도 쉬운 형태를 만드는 일은 확실히 고급한 방법이고 지혜가 동원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마치 날카롭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고 그런가 하면 간과의 헤픔이나 어설픔과는 거리가 멀다. 낯선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우리 곁에 있음으로 느낄 때 정신의 안도감을 가질 수 있다면 윤시인의 <엄마의 연서>는 그런 뉘앙스를 포함하고 있다. 엄마의 그리움을 마음으로 안으며 끈질긴 주위만 맴돌고 먼길만 보이는 아스라한 걸요. “엄마를 만나지 못한 애뜻한 기다림을 피 같다는 주장에는 수구초심과 그리움이 물씬 풍기는 어마의 품이 그립다는 정신의 핵심에는 온갖 애절한 마음이 냄새를 맡는 엄마의 품 속으로 돌아간다. 요즘은 너무도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는 도시인- 도시 체질은 항상 망각을 앞세우는 것 같다. 결코 떠날 수 없는 심상 깊은 곳에 귀향의 에너지는 인자가 길을 찾는 여정이 시작 된다. 아마도 윤길상의 정신 인자(因子)는 고향에서 만들어졌던 추억 엄마를 그리는 애잔한 맥락을 이루는 길을 만들면서 시로 연결되는 듯하다. 아무도 보는이 없는 밤이면 슬며시 다가가 입 맞추고 싶어서 그 고운 얼굴 한순간도 놓칠 수 없어서 날마다 매달려 바라만 보는데 나비 한 마리 날아와 그 꽃에 입을 맞춥니다. 약이 올라 거미줄로 사방을 엮어놓았지만 훌쩍 날아간 나비는 영영 다시 오지 않고 그리움 견디지 못하던 꽃 끝내 시들어 버리고 그 순결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이 어둠에다 제 몸만 옭아 맵니다. <나만의 사랑> ‘글은 사람이다” 는 말은 불란서 뷔풍의 말이다. 그렇다면 시는 곧 시인이다 라는 말도 외도된 말은 아니다. 시 속에 시인의 전 인생을 투척하고 또 사상과 미래조차 내포된 의미의 숲이 곧 시라는 뜻을 첨가하면 한편의 시는 곧 시인의 모든 면을 파악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요즘 애환 동물과 함께하는 현대인들이 많아지는 가운데 “그 꽃에 입을 맞추지 못하게 거미즐로 사방을 엮어 놓았지만” “훌쩍 날아간 나비는 영영 돌아오지 않고” “죄책감으로 나비의 기다림을 깨우치는 일은 대상을 포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대면하려는 기다림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윤길상의 정신이 펼치는 지도인 것 같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공식이 대입되는 사물 관찰법이라는 뜻이다. 이를 굳이 휴머니즘이라는 말대로 대신하는 것은 너무 상투적인 말이 될 것 같다. 2) 자연의 식물 정서 시인마다 개성의 진로에 따라 관심의 분야가 다르게 표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태생적인 환경에 의식의 지배를 조종하는 것은 명확한 사실일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면 아는 것에 대한 관심의 집중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가령 어린시절 어머니께서 만든 음식을 많이 먹던 시절이 성인이 되어서도 그 음식을 다시 찾게 되는 것은 우리 모두 증명되는 사실 아닌가? 윤길상은 평택에서 자라나 조그만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추억을 쌓고 성인이 되어서는 도시에서 생활을 하다 고향으로 귀향하여 전원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세상의 아귀다툼 속에서의 시는 별로 없으며 거의 모든 작품은 전원에서 『달맞이 꽃』 『자귀나무』 『제비꽃』 『연꽃』 『들꽃』 등 대부분 식물로 구성된 향기로 나타내는 시로 구현되는 듯하다. 너에게서 우주는 붉은 빛으로 펼쳐지고 모든 것은 침묵에 잠기는데 네 안에서 언어들은 꽃이 되고 나비가 되고 새가 되어 어느새 낮선 것들은 친숙하게 다가왔지. 어릴 적 돌담길을 걷는 것처럼 초가집과 골목사이 아이들 소란함과 어른의 기침 소리 계집에 봉긋한 가슴 수줍은 듯 잔잔히 머물던 햇살까지 쉴새 없이 다가오는 영상들 꽃잎 위에 끝없는 몽상으로 펼쳐졌지 한참을 신비 속에 길 잃고 헤매다 사랑으로 사랑으로 살아왔음을 알았을 때 네 우주에 끝없이 여행하는 실 바람이 되고만다. <자귀나무> 중 시는 사물의 비유에서 변형(deformaton)의 기법인 것이다. 물론 비유와 상징 혹은 역설 등 모든 기교를 다하여 사물의 본질에 이른바 몰개성의 이론을 더하면서 의미의 확장을 꾀한다. 가장 핵심어가 시인의 시적 의도와 맥을 같이 하는 이유- ’ ‘어릴 적 돌담 길” “아이들 소란” “초가집” “골목들” 들이 다가오는 소란스런 영상의 중심은 도시가 아니라 시골의 돌담 풍경이 있는 골목이다. 그 공간을 돌아보니 “한참을 신비 속에 길 잃고 헤매다/사랑으로 사랑으로 살아왔음을 알았을 때”로 현재의 공간이 화면으로 펼쳐진다. 정신의 고향을 찾아가는 것은 모든 동물이 갖는 특징이다. 회귀(回歸)의식과 더불어 자아의 중심을 거기에 놓고 의식의 넓이를 확대하는 것이 곧 삶의 공식이라면 사람은 항상 원점에서 지향을 갖는 것이 정신으로 압축된다. “자귀나무”는 어디에나 핀다. 다시 말하면 공간을 배타적으로 받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평균률로 나누어 위치를 정하지만 자귀의 이미지는 도시나 시골을 불문하고 같은 계절에 꽃이 피고 향기를 발산한다. 그러나 시인은 수평적인 공간에서 자귀나무를 꺼내어 고향에 절절함에 자신의 사고와 추억을 의탁하는 고백이 선행된다. 일종의 상상의 승화라는 뜻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잘 아는 것은 정확하게 또는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잘 알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에메모호한 것을 표현하면 결국 실패의 문패를 달게 되는 위험 때문에 경험했던 것 혹은 익숙한 것이 맨 앞으로 나오는 표정이 곧 시의 주재료가 된 것. 이런 요소가 전체 맥락을 지배하는 요소가 되는 이유일 것이다. 마음대로 다가와 온통 흔들어 놓고는 말도 없이 떠나가 터진 심장 끌어안고 이렇듯 애만 태운다. 혹여 다시 만날까? 꿈길로 찾아갔지만 그 모습 볼 수 없어 행여 다시 찾아 올까? 그 길에 무성히 피어납니다. <들꽃> 중- 흔한 것은 때론 그리운 것이다. 아무 이름도 없는 풀꽃일지라도 언젠가는 반가운 이름으로 찾아오는 이유는 오래전에 기억으로 묻어 있는 인연일 것이다. 더구나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 들어 있는 요소들이 기억의 층을 뚫고 나올 때 시간의 벌판에는 이미 과거라는 이름으로 문패를 바꾸어 달았을지라도 함께 있던 정서가 춤을 추게 된다. 어린 날등의 추억이 말이다. 자연미는 자족성과 자발성의 특성이 있지만 예술은 이와 달리 노력이라는 담론을 개입하여야 성립된다. 자연미를 노래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에 애정의 결과- 이는 인간의 손이 개입하지 않을 때 가장 순수성을 나타내는 것처럼 예술성은 자연과의 대립이 아니라 공존과 조화에서 미적 순수성은 더욱 고양되는 경지를 방문하기 때문에 시인은 자연 속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따스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연을 요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재료로 시인의 감수성이 하나로 통합되는 질서의 구축을 용해하는 작품이 윤길상의 자연관이자 놀이가 되는 것 같다. 3. 작가의 상표<작품> 시는 시인 정신의 바로미터라면 한 편의 시에 대한 분석은 항상 치밀한 뇌수(腦髓)의 조력을 받아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시는 종합적인 정서의 흐름을 느끼는 일에 더욱 깊이를 느낄 수 있다면 윤길상의 시는 산뜻한 명칭을 감지할 수 있는 조짐이 넉넉하다. 물론 곰삭은 깊이와는 다르지만 정서 균형의 안도감과 언어 운용의 진지성, 더불어 사물을 바라보는 균형 감각이나 언어 탄력의 요리 솜씨는 더욱 많은 진전을 가질 수 있는 바탕을 갖고 있는 시인이다. 앞으로 윤시인만의 상표를 부착한 독특한 시가 생산될 것이라 기대하면서 논지를 내려 놓는다. 2023. 04. 21. 대중문화평론가/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이승섭시인 [그대들은 시의 맛을 아는가?] [대중문화평론가의 베스트셀러 책 1] [주산 벚꽃길2]
by 수원본부장 손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