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청송소방서장] 불은 한순간에 발생하여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남깁니다. 특히 아파트와 같은 공동 주택에서의 화재는 불길보다 연기확산으로 인한 인명피해가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이때 방화문을 닫는 단순한 행동이 연소확대와 인명피해를 줄이는데 큰 차이를 만듭니다. 방화문은 화재 발생 시 불길과 연기의 확산을 지연시켜 대피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확보하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방화문을 항상 열어두거나 물건으로 고정하는 경우가 많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청송소방서에서는 방화문 닫기 안전 문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방화문은 반드시 닫는다”는 습관을 생활화한다면 대형 인명피해를 막을 수 있습니다. 소방청이 최근 5년간 아파트 화재 통계를 분석한 결과 인명피해 요인 중‘대피 도중 연기흡입’으로 인한 피해가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공동주택에 화재가 발생하였다면 무조건적인 대피보다는“살펴서 대피”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공동주택 연소 확대 특성상 대부분의 화재가 발화층 이내로 국한됨에 따라 무리한 피난 대신 자기 집에서 대기를 하는 것이 올바른 피난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화재로부터 안전한 사회는 소방시설이나 첨단 장비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작은 실천이 모여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의 작은 실천이 안전을 지키는 큰 힘이 될 수 있도록 청송소방서는 각종 재난 및 화재 현장에서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합니다.
[주낙영 경주시장 프로필 사진] 다음달 경주에서 APEC 정상회의가 열립니다. 개최 사실은 널리 알려졌지만, 정작 주제(theme)를 아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올해 APEC이 내세운 화두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지속가능한 내일(Building a Sustainable Tomorrow)’입니다. 이는 단순한 구호가 아닙니다. 지금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위기 상황을 반영합니다. 기후변화, 에너지 위기, 국제안보 위기 등 인류의 미래가 지속가능하지 않음에 대한 경고입니다. 더욱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되어 온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자국이익 중심의 보호무역주의에 의해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러한 때 APEC 정상회의가 경주에서 열립니다. 그간 APEC의 주제는 뚜렷한 추세를 보이며 변화해 왔습니다. 2014년 중국 베이징에서는 ‘아시아·태평양 파트너십을 통한 미래 형성’을 제시했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가 채 가시지 않았던 시기, 협력을 통해 안정과 성장을 추구하자는 공감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듬해 2015년 필리핀 마닐라에서는 ‘포용적 경제를 구축해 더 나은 세계로’를 주제로, 성장의 성과를 공평하게 나누자는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경제발전이 소수에게만 집중돼서는 안 된다는 성찰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습니다. 2016년 페루 리마는 ‘질적 성장과 인간 개발’을 내세웠습니다. 단순히 양적 지표가 아니라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성장이 중요하다는 관점을 제시한 것입니다. 2017년 베트남 다낭은 ‘새로운 역동성 창출, 함께하는 미래’를 통해 활기찬 경제공동체를 꿈꿨습니다.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국경이 닫히고 교류가 단절되는 상황에서, 말레이시아는 온라인 회의를 통해 ‘공동 번영의 회복력 있는 미래를 향한 인적 잠재력 최적화’를 제시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뉴질랜드는 ‘함께 참여하고, 함께 일하며, 함께 성장하자’라는 간결한 표현으로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 두 차례 회의는 위기의 순간에도 협력과 연대가 답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팬데믹 이후 APEC은 미래를 향한 새로운 과제를 고민했습니다. 2022년 태국 방콕은 ‘개방, 연결, 균형’이라는 세 단어로 공급망 위기와 기후변화를 동시에 짚었습니다. 202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는 ‘모두를 위한 회복력 있고 지속 가능한 미래 만들기’를 내세워 경제와 환경을 아우르는 지속가능성의 비전을 제시했고, 지난해 페루 리마는 ‘역량 강화, 포용, 성장’을 통해 다시 사람 중심 성장을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지난 10년의 주제를 이어놓고 보면 흐름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성장과 활력이 중심이었다면, 점차 포용과 회복력, 그리고 지속가능성으로 이동해왔습니다. ‘더 크게, 더 빨리’에서 ‘더 함께, 더 오래’로 무게중심이 옮겨간 것입니다. 팬데믹이라는 전례 없는 위기를 거치며 세계가 진정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깨달은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종착점에 선 것이 바로 다음달 경주에서 열리는 2025 APEC 정상회의입니다. 주제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지속가능한 내일 : 연결, 혁신, 번영’입니다.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실천으로 옮기겠다는 결의가 담겨 있습니다. 경주는 이 메시지와 어울리는 도시입니다. 신라 천년의 역사를 통해 수많은 전쟁과 위기를 견뎌낸 회복의 기억을 품고 있고, 지금은 원자력과 미래차 산업을 통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회복력, 현재의 포용, 미래의 지속 가능성이 공존하는 도시, 그 무대가 바로 경주입니다. 지난 10년간의 흐름이 이제 경주에서 하나로 모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비롯해 세계 열강의 정상들이 인류의 미래를 위해 서로 손잡고 화해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갈등과 대결에서 화해와 협력의 장으로 나아가는 감동의 드라마가 경주에서 쓰이길 희망합니다.
[홍건석 작가] 김장철, 김장을 할 때 내 고향 전라도에서는 거의 멸치젓갈로 김치를 담았었다. 그런데 서울 올라와 수 십년을 살면서 서울 사람 입맛으로 바뀌었다. 주위 사람들이 새우젓갈로 김치를 담는 바람에 김치의 입맛이 새우젓으로 변한 것이다. 고향을 떠나온 후로 일년에 한두 번씩 꼬박꼬박 고향을 찾았으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고향 생각은 더 많이 나는데 가는 기회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나마 코로나바이러스로 외출을 자제하다보니 고향 생각이 더 했다. 2020년 코로나 19가 심하게 번질 무렵 지도와 임자도 간에 연륙교가 개통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필자는 한때 고향 사랑하는 단체와 ‘서남해안포럼’ 에 참여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서남권 특별법에 관심을 갖고 지켜봤기 때문이다. 고향 갈 때마다 비교가 되었다. 타 도는 순간순간 바뀌는데 고향은 언제나 낙후된 그대로였다. 그래서 서남권 특별법에 매달리기 기도했다. 배를 타고 임자도를 가보았던 때가 까마득했다. 언제 고향에 들리면 임자도 연륙교를 가보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그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때마침 2022년 11월 전남도청 행사에 참석차 목포에 내려갔다가 회장직을 맡은 후배 채모 기자가 “모처럼 고향에 내려왔으니 임자도 인근 관광이나 하고 쉬었다 가자고 제의했다.” 한걸음에 임자도 연륙교를 건너 대광해수욕장을 찾았다. 옛날과는 딴 판으로 매끄럽게 관광지 전경이 바뀌어 있어 반가웠다. 채기자는 이왕에 임자도에 왔으니 전장포에 들려 새우젓이나 사가자고 했다. 가는 길목마다 대파밭이 즐비했다. 대파밭을 따라 전장포를 처음으로 가보았다. 드럼통에 비닐을 씌운 크고 작은 새우젓갈통이 즐비했다. 선착장을 들러보니 새우조각상이 눈에 띄었다. 사진이 전문인 후배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새우 조각상 옆에 서보라고 해서 모처럼 포즈를 취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조각상 바닥에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전장포 아리랑” 이라는 시였다. 가만히 읽어보니 이곳 앞바다에서 보이는 조그만 섬들이 있었는데 그 시에 “각이도 송이도 지나 안마도” 라는 말이 나와 아마 이 섬들의 이름을 말하고 있구나 생각했다. 이 섬들을 모두 “앉은뱅이”라고 하고 있었다. 섬 모양이 바닷물에 잠긴 모습이 앉은뱅이 같아서 그랬을 거라고. 그런데 왜 하필이면 장애를 갖은 부정적인 말로 표현했을까 의문이 생겼고, “산마이 그물” 이라는 일본어 시구를 발견하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일본어와 전장포 아리랑,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다. 나는 시에 대해 잘 모르지만 새우 이야기는 없고 전장포 앞바다에 보이는 섬들을 앉은뱅이라고 하는 시, 전장포 새우젓갈이 맛이 있다고 알려졌지만 이 글을 읽고 새우젓갈의 명성에 타격을 입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후배가 어거지로 사서준 새우젓갈로 작년 감장을 해서 맛있게 먹고 있다. 새우젓갈 판매점의 명함도 일부러 챙겨왔다. 올 김장철에도 전장포 새우젓을 주문하여 김장을 담을 생각이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수 방류로 꺼림칙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고향 사람들의 경제생활이 다소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전장포 새우젓으로 김장 할 작정이다. [해바라기]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관식(시인, 문학평론가)] 광주시. 전남도, 지방국토관리청 관할 영산강 유역, 그리고 전장포 등 도내 곳곳에 현재 활동하고 있는 향토시인들의 시들로 새겨놓아 우려를 낳고 있다. 이들 시비들이 하나같이 시적인 완성도가 미흡하거나 관광명소와 부합되지 않는 시들어서 우리 고장의 품격은 물론 향토문인들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있다. 특히 예부터 영산강은 정자를 중심으로 고려시대 최지몽, 정가신, 전주정, 윤보를 비롯하여 조선시대 송순, 정철, 양산보, 신숙주. 기대승, 김인후, 임제, 나위소, 초의선사. 등 기라성 같은 선비들이 장지문학을 꽃피워 왔다. 그 결과, 호남이 선비의 고장이며. 예향으로 널리 일려졌다. 그런데 이런 선비들의 시가 적재적소의 관광명소에 새겨져야 마땅함에도 현재 활동하는 시인들의 조잡한 시들로 채워져 예향 호남의 전통을 되살릴 수 있도록 시비의 교체가 시급한 실정이다. 영산강 석관정의 경우, 석관귀범의 뒷면에 일제 감점기 시대의 목화 재배 문화와 영산강 범람을 피가 흐른다고 부정적으로 왜곡하고 있는 등 영산강 1경, 죽산보, 승천보 등에 졸속한 현역 향토시인의 시비를 새겨놓아 빈축을 사고 았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새우가 가장 많이 잡히는 고장인 임자도 전장포의 경우, 새우잡이의 명소의 이미지에 걸맞는 시가 시비로 새워져야 함에도 새우조각상 아래 “전장포 아리랑”이라는 시비는 새우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엉뚱하게도 전장포 앞바다의 섬 지명과 이 섬을 앉은뱅이로 비하하고, 덕장을 멸치만 잡히는 것으로 잘못 진술했는가 하면. “신마이 그물”이라는 일본어까지 시어로 사용하는 등 주민들의 생활모습을 부정적인 이미지로 부각시켜놓고 있는 등 도내 곳곳의 시비의 전면적인 교체로 예향 호남의 이미지를 되살려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연일 언론에서 교사의 ‘극단 선택’이 보도되고 있다. 불과 50여 일 전에도 24세 된 새내기 교사가 극단 선택을 했는데, 이번에는 대전의 A 교사가 제자들과 자기의 두 자녀를 두고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왜 죽음을 선택했는가? A 교사는 40대 초반으로 초등교사였다. 학교에서 4년간 학부모로부터 악성 민원에 시달리면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1학년을 담임했을 때 학생 4명이 문제 행동을 일으켰다. 수업 중 소리를 지르거나 급식실에서 드러눕기도 했다. 그중 한 학생이 다른 학생의 뺨을 때렸다. 이러한 문제 행동을 보고 A 교사는 제재와 지도를 했으나 여의찮아 보이자 교장실로 보냈다. 다음날 학생의 부모가 교장실로 찾아와서 우리 아이에게 망신을 주었다는 이유로 담임교사에게 여러 차례 사과를 요구한 사실이 있었다. A 교사가 담임으로서 학생을 바르게 지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일이 학부모의 사과 요구는 교권의 침해 정도를 넘고 있다. 학부모는 오히려 가정에서 지도를 잘못해서 미안하다고 해야 할 일이다. 요즈음 학부모는 하나뿐인 자기 자녀가 어느 사람에게도 꾸지람 듣는 것을 싫어한다. 바람직한 꾸지람은 학생의 성장 도구가 될 수 있는데도 안타깝다. 한 언론사는 가해 학생 부모가 A 교사에게 한 말을 보도했다.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교사의 존엄성은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만약 내가 이 말을 들었다면, 그 학부모와 멱살을 잡고 한바탕 싸움이 있었을 것 같다. 학부모 간에도 갈등은 존재한다. 한 학부모는 가해 학생의 부모에게 ‘악질’이라는 표현을 써 가면서 울분을 토하고 있다. A 교사는 가해 학생의 부모와 한 동네 살았다. 가해 학생 부모는 교사와 마주치기 싫다면서 4년 후 A 교사가 학교를 떠날 때까지 만나도 인사를 안 하고, - 2 - “야, 너 이리 와 봐.” 시비까지 걸었다니 인간의 탈을 쓰고는 못 할 행동이다. 해도 해도 가해 학생 부모는 너무 한 것 같다. 성인(聖人)이나 군자(君子)의 정신이 아니고서는 A 교사가 어떻게 온전한 정신으로 생활할 수 있었겠는가? 또한 가해 학생 부모는 A 교사를 아동학대죄로 고소까지 했으나 무혐의 처분이 되었다. 무혐의 처분을 받아도 교사는 빈약한 둥지로 돌아가게 된다. A 교사는 이듬해부터 담임도 못 맡고 교과 담임으로 근무했다. 가해 학생의 체육 성적을 ‘노력을 요함’이라 기록했다는 이유로 가해 학생 부모는 자기 자녀가 미워서 그렇게 성적을 주었다고, 학교와 교육청에 계속 민원을 넣었다. 얼마 전 서울 서이초 교사 자살 사건도 악성 민원에 시달린 결과이다. A 교사는 서이초 교사의 49재 추모일에 분향까지 했다. 동료 교사의 말에 의하면, A 교사가 서이초 교사 추모 분향을 하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이 다시 스트레스가 되어 너무나 괴로워했다고 한다. A 교사가 분향하면서 자기의 억울함과 우울증이 폭발해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현행 아동복지법 제5조에서 ‘아동의 보호자는 아동에게 신체적 고통이나 폭언 등의 정신적 고통을 가하여서는 아니 된다.’라는 항목(項目)이 있다. 이 법은 아이가 행복하고 건강하게 자라는 데 필요한 복지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즉 18세 미만의 아동이 행복한 생활과 인권을 보장받는 법이다. 문제는 아동복지법을 위반하면 아동학대처벌법에 의해 벌을 받게 되므로 악용하는 학부모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도 교사들은 학부모의 악성 민원에 의해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어느 한 교사의 말이다. “요즈음은 아이들끼리 싸워도 말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보고 있어야 한다.” 정말 심각한 교실 현장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싸움을 말리는 과정에서 학생의 몸에 손을 대면 신체 접촉의 죄, 가만히 두면 싸움을 보고 방임한 죄로 신고당하기 일쑤이다. 교사들은 진퇴양난으로 하루하루가 지옥이고 살얼음판 위에 서 있다고 한다. 교사는 학교 출근이 즐겁고 학생들과 눈 맞추고 학생들을 사랑으로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 요즈음은 대부분 가정이 핵가족화가 되어 부부와 자녀로 구성되어 있다. 옛날 모양으로 웃어른과 함께 식사할 시간도 없다. 밥상머리에서 올바른 행실을 지도받고 자랄 기회가 사라졌다. - 3 - 학교 당국은 교사가 학부모로부터 민원의 대상으로 고소까지 되어 경찰에서 무혐의 처분이 되었으면 교사 보호차원에서 해당 학부모를 교사 모욕죄로 고소라도 해야 할 일이다. 학교 당국의 무성의한 처사도 재고되어야 한다. 교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가해 학생 부모의 신원이 알려져 분노에 찬 시민들이 응징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사회는 정의(正義) 쪽에 서 있다. 아동복지법이 시행한 후로 학생을 지도해야 할 교사가 학부모의 악성 민원으로 현재까지 60여 명이 목숨을 끊었다. 교사들에게는 교실이 고통스럽고 두려운 곳이 되어가고 있다. 더 이상 교권을 짓밟는 행위로 죽음을 택하는 교사가 없어야 한다. 교사나 학생 모두 인권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동안 교사의 체벌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래서 학생의 인권을 보장한다는 측면에서 학생 체벌 금지가 이루어졌다. 문제의 발단은 학생 인권을 교사의 인권보다 우위에 놓고 있으니 교권이 추락하고 악성 민원이 발생하는 데 있다. 열심히 학생 지도에 전념하는 교사에게 지금도 끊임없이 제기되는 악성 민원은 교사의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게 한다. 교사가 붙잡을 튼튼한 동아줄은 없고, 썩은 동아줄을 잡고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다. 결국 죽음의 문턱에 들어서야 이 사회는 관심의 눈길을 보낸다. 인재를 키우는 교사는 우리의 미래이다. 죽음을 선택한 교사의 소식은 우리의 미래를 멈추게 한다. 교사의 죽음은 구성원 모두의 책임이다. 더 이상 유명을 달리한 교사에게 ‘미안하다’, ‘편히 잠드소서‘라는 후렴구가 없기를 기대해 본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관식(시인, 문학평론가)] 영산강은 우리나라 4대강으로 호남의 삶의 터전으로 우리 지역의 자랑스러운 자연유산이다. 백제시대 왕인박사가 영산강의 지류인 영암 구림의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주었는가 하면,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 전환기인 신라말 고려 초에 왕건이 영산강을 본거지로 고려를 세우는데 기초를 다졌고, 완사천에서 장화왕후와 인연을 맺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영산강 강변에 선비들이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학문을 토론하고 시회를 열며 풍류를 즐겼다. 영산강변에만 정자가 923개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누정은 395개다. 그 중 나주지역은 영산강의 중류에 위치하고 있는 관계로 165개가 남아있으며, 이런 명소의 정자마다 그 당시 시인들의 시가 목판에 새겨져 남아있다. 영산강변의 정자 문화는 신숙주, 기대승, 김인후, 임제, 송강 정철, 면앙정 송순, 소쇄원의 양산보, 나위소 등 수많은 학자와 시인들을 배출해낸 산실이었다. 이런 전통 문화를 관계기관의 무지로 영산강 명소 보존 사업을 시행하면서 혹시나 단절시키고 왜곡시켜놓았는지 만약 그렇다면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영산강변에는 이제는 사라진 나루터와 수려한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명소로 8경이 있다. 제1경은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는 영산석조, 제2경은 몽탄노적(夢灘盧笛) 느러지와 한호 임연이 세운 식영정, 제3경은 1530년 함평이씨 석관(石串)이진충이건립했다는석관귀범(石串歸帆)의 나루터와 석관정과 건너편의 금강정, 제4경은 죽산보로 인근 강변에 사암나루가 있었고, 퇴계 선생과 ‘사단칠정론’을 논했던 조선시대 대학자 고봉 기대승을 비롯해서 면앙정 송순, 사암 박 순, 석천 임억령 등 인근 선비들의 출입이 잦았던 다시의 장춘정(藏春亭), 기묘사화로 조광조와 뜻을 같이한 나주 출신 선비들 11인이 고향으로 돌아와 영산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지은 금사정(錦社亭), 제5경 금성상운으로 나주평야와 영산포 등대, 윤선도와 교분이 두터웠고,강호구가(江湖九歌)를 지은 나위소가 고향인 택촌에 세운 수운정(岫雲亭), 제6경으로 승촌보, 제7경 광주 풍영정, 제8경은 담양 대나무 숲이 명소로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이런 명소에 그에 걸 맞는 옛 선비들의 시비가 세워져 그분들의 숨결을 느끼게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영산강변의 명소 곳곳에 현존하는 향토시인들의 시들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마 향토 시인들을 널리 알리기 위한 취지이었으리라 추측되지만 아직 생존한 시인의 시는 문학사적으로도 아직 검증이 되지 않는 상태이다. 그런데도 향토 시인들의 시비가 세워졌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예부터 조상들은 살아있을 때 자신이나 남의 업적을 평가하거나 비석을 세우는 일을 꺼려했다. 그것은 살아있을 때 인물의 평가가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며, 자칫 비난의 대상될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버젓이 영산강의 명소 곳곳에는 국민의 형세로 현존하거나 최근에 살았던 향토시인들의 시들을 시비에 새겨 놓은 것은 전통의 단절을 초래하지나 않았나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영산강 명소를 찾는 사람들에게 영산강의 명소에 걸 맞는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해보았다. 영산강변의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시회를 열며 풍류를 즐기던 누정문학을 산실되었던 명소에 그 옛날 선비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그분들의 시를 시비로 감상하도록 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한 생각이다. 영산강 명소뿐만 아니라 호남은 물론 우리나라 곳곳에도 문학사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현재 생존하고 있는 문인의 시를 돌에 새겨놓은 일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자신의 시를 시비에 새겨 대대로 알리고 싶은 욕심 때문에 빚어진 일이거나 당시 시비를 세운 관계기관의 독단적인 문화행정으로 빚어진 일이건 우리고장의 이미지를 널리 알리겠다는 목적은 같을 것이다. 영산강 명소는 영산강 문화를 대표하는 인물의 시가 시비로 건립되어야 한다. 혹시라도 도민의 혈세로 이런 무모한 시비를 돌에 새겨진 명소가 있다면 우리 고장 영산강 명소를 찾은 이들이 석연치 않는 느낌을 갖거나, 기분을 언짢아져서는 안 될 것이다. 즐겁게 명소의 경치를 감상하고 우리 고장의 선비들의 얼을 본받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영산강변은 예부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들이 많이 배출한 곳이다. 명소를 찾는 분들이 옛 선비들의 풍류문화를 함께 공유하고 그분들의 숨길을 느껴볼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기 아니겠는가? 영산강 명소에 시비가 세워진 곳의 시비를 다음과 같이 고체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드린다. 제1경에 있는 시비는 무안 출생의 초의선사의 시나 식영정의 한호 임연의 시로, 제3경에 석관귀범(石串歸帆)의 뒷면에는 임제 선생의 시로, 죽산보에 있는 시비는 나위소의 강호구가, 장춘정을 세운 유춘정의 시나 금사정 11인의 선비의 시로, 승촌보에 있는 현존인물의 시는 신숙주 선생의 시비를 교체했으면 좋겠다. 강의 지류 도랑에 미꾸라지. 피라미. 빠가사리나 블루길, 베스 같은 외래어종이 현재 살고 있다고 해서 영산강의 생태계를 대표어중이라고 내세워서야 쓰겠는가? 영산강의 대표어종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영산강의 전설까지 낳은 잉어가 아니겠는가?, 하루 빨리 영산강 누정문화의 산실이 되어온 정자를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옛 선비들의 풍류문화를 시공을 초월하여 함께 느낄 수 있도록 그분들의 시를 시비로 교체되길 바랄 뿐이다. ===김관식 프로필=== 전남 나주 공산 출생 광주교육대학, 조선대 대학원, 한국교원대 대학원, 한국방송대 대학원 졸업, 숭실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 수료 1976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입상, 『자유문학』신인상 시 당선(1998년) 낸 책으로 동시집 『토끼 발자국』(1983) 외18권. 시집 『가루의 힘』(2014) 외19권, 문학평론집 『한국현대시의 성찰과 전망』 외9권, 문학창작이론서 『현대시 창작방법과 실제』 . 『서정시 이렇게 쓰면 쉽게 쓸 수 있다』 외 다수. 백교문학상 대상, 김우종문학상 문학평론 부문 본상 수상, 황조근정 훈장, 문예창작 문학상 대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회원, 국제펜 한국본부 이사, 한국문학협회 자문위원,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서초문인협회 이사, 양천문인협회 자문위원, 한국산림문학회 회원, 한국좋은동시 재능기부사업회 책임자 나주문인협회 초대회장 역임, 계간 『한국시』, 『지필문학』 신인심사위원 역임, 계간 『시와 늪』 주필 및 신인심사위원장 역임 사단법인 『한국문학협회』 자문위원, 계간 『창작산맥』 운영이사. 계간 『서정문학』 운영위원, 계간 『한글문학』 자문위원, 계간 『문예창작』 편집위원, 계간 『백제문학』, 『남도문학』, 『가온문학』, 『나눔문학』, 『신문예』 신인심사위원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전쟁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의 요인은 영토 확장, 자원 획득, 이념 차이 등이 있을 수 있다. 어떠한 요인이 평화적으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할 때 전쟁이 일어난다. 인간의 욕심은 무한정인 것 같다. 신라와 백제는 영토 확장 싸움이 계속되었다. 서기 648년 이후 김유신 장군의 리더십을 보자. 김유신 장군이 55세(649년)가 되었다. 음력 8월에 백제 은상(殷相) 장군이 신라의 석토성 등 7개 성을 공격했다. 김유신 장군은 죽지(竹旨), 진춘(陳春), 천존(天存) 장군 등과 함께 방어했지만 물리치지 못했다. 충청남도 천안 지역에 있는 도살성(道薩城) 아래 김유신 장군 군사들은 진을 쳤다. 김유신 장군은, “오늘 틀림없이 백제 사람이 와서 정탐할 것이니, 너희들은 짐짓 모르는체하고 함부로 누구냐고 묻지 말라!” 하고는 사람을 시켜 진영 사이를 돌며 말하게 하기를 “견고히 지키면서 움직이지 마라! 내일 원군이 오기를 기다려서 결전하리라!” 라고 했다. [김유신 장군의 환산벌 전투 모습] 백제 첩자는 이를 듣고 은상 장군에게 보고하니, 은상 장군은 원군이 있는 줄 알고 두려워했다. 이때 김유신 장군 등은 진격해 적들을 모두 무찔렀다. 김유신 장군이 서라벌로 돌아오는 길에 백제의 좌평 정복(正福)과 병졸 1천 명이 항복해 오니 모두 풀어 주고 각자 마음대로 가도록 했다. 이후 5년 동안은 백제나 고구려와의 전쟁은 없었다. 김유신 장군이 60세(654년)이다. 신라 군대의 통수부라는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음력 3월 신라 진덕여왕이 붕어했다. 후사가 없으니, 김유신은 화백회의 의장인 알천(閼川)과 의논하여 태종무열왕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유신 장군이 61세(655년)가 되었는데 음력 정월에 고구려, 백제, 말갈이 군사를 연합해 신라의 북쪽 33개 성을 빼앗았다. 태종무열왕은 당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니, 음력 3월에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 군사들을 물리쳤다. 음력 9월에 김유신 장군은 영동에 있는 백제 도비천성(刀比川城)을 공격해 승리했다. 김유신 장군은 대각간(大角干)이 되었다. 신라의 16관등 중 각간은 최고 관등인데 김유신 장군에게 관등을 더 높여줄 단계가 없어서 각간 앞 글자에 ‘대’를 붙였다. 백제는 임금과 신하들이 사치와 안일에 빠져 나라의 일을 보살피지 않았다. 백성들은 노하고 재앙과 괴변이 여러 차례 나타났다. 이틈을 탄 김유신 장군은 백제 정벌 계획을 서두르게 되었다. 음력 10월에 김유신 장군은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 지소(智炤)와 혼인했다. 또 5년이 흘렀다. 김유신 장군은 66세(660년) 음력 1월에 신라의 최고 벼슬인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삼국통일 전쟁 과정에서 신라를 이끄는 중추적 구실을 하게 된다. 음력 3월에 중국 당나라 고종은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당나라에서 숙위하고 있는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을 부 대총관으로 삼아서 수군과 육군 13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했다. 태종무열왕은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아서 장수와 군사를 거느리고 응원하게 했다. 신구도와 우이도의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하지 않아 고증이 더 필요하다. 소정방 군사는 지금의 중국 산둥성 항구도시인 내주(萊州)에서 출발해 왔다. 소정방이 이끄는 병선의 길이가 천리라니 짐작이 잘 안 간다. 음력 5월 26일에 태종무열왕은 유신, 진주, 천존 장군 등을 거느리고 음력 6월 18일 경기도 광주인 남천정에 도착했다. 음력 6월 21일에 태자 김법민(후에 문무왕)을 덕물도에 보내 소정방을 맞이하게 했다. 소정방은 김법민에게 음력 7월 10일 백제 사비성 남쪽에 도착해 백제의 성을 무찌르자고 약속했다. 김법민은 태종무열왕에게 보고하니, 무열왕은 김유신을 대장군, 김품일, 김흠순을 장군으로 임명하여 병력 5만으로 출발하게 했다. 무열왕은 경북 상주시 모동에 있는 금돌성(今突城)에 머물렀다. 음력 7월 9일 김유신 장군 등이 현재 논산 지역에 있는 황산벌로 진군해 갔다. 백제 계백 장군의 5천 결사대가 먼저 도착해 세 곳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김유신 장군도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불리하고 군사들은 힘이 다했다. 김흠순 장군은 아들 반굴을 불러서, “신하 된 이에게는 충성보다 귀중한 것이 없고, 자식의 도리로는 효도만 한 것이 없다. 이 위기를 당해 목숨을 바친다면 충성과 효도가 함께 온전히 갖추어지리라.” “삼가 분부 말씀 받들겠습니다.” 하고는 곧장 적진으로 들어가 싸우다가 장렬하게 사망했다. 김품일 장군도 16세인 아들 관창을 불러 놓고 여러 장수에게 “뜻과 기백이 제법 용맹하니 오늘 싸움에서 3군의 모범이 될 수 있으리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관창도 즉시 적진으로 들어가 싸웠으나 사로잡혀 계백 장군에게 끌려갔다. 계백 장군은 어려서 살려 보냈다. 관창은 다시 적진을 행해 돌진해 갔으나 계백이 관창을 붙잡아 참하여 말 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3군에서는 이 모습을 보고 격정이 솟구쳐 죽음을 각오하고 진격했다. 계백은 이 전투에서 사망했고 백제 군사가 패했다. 김유신 장군 군사는 황산벌 전투가 너무나 치열한 나머지 음력 7월 10일 소정방 군사와 만나기로 한 백제 사비성 남쪽에 늦게 도착했다. 소정방은 김유신 장군이 늦게 왔다 하여 신라 독군(督軍) 김문영(金文穎)을 군문(軍門)에서 목을 베려 하자, 김유신 장군은 소정방 장군이 황산벌의 전투를 보지 않은 터에 무고하게 치욕을 당할 수 없다 하고,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벌인 뒤에 백제를 쳐부수리라 했다. 도끼를 들고 군문 앞에 서니, 소정방이 김문영의 죄를 풀어 주었다. 신라와 당나라 군사는 사비성을 함락시켰고 백제 의자왕은 당나라로 끌려갔다. 리더는 공동체의 운명을 책임진 사람이다. 지도자는 리더십(leadership)이 있어야 한다. 리더십은 능력이나 통솔력으로 본다.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목표 달성을 위해 개인이나 집단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김유신 장군의 리더십을 본받고 싶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우리는 일출과 일몰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동양인들은 일출을 좋아하고, 서양인들은 일몰을 좋아한다고 한다. 음양(陰陽) 이론에서도 일출은 양이고, 일몰은 음으로 해석한다. 동양은 양이고 서양은 음인가. 젊은 시절에는 동료들과 함께 새해 일출 보러 가기를 즐겼다.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뜬다는 구룡포 호미곶이었다. 전날 도착한 호미곶 주변 식당에는 일출 구경 온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그곳의 대게와 물회 맛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이튿날 새해 첫날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바라보는 순간, 함성을 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만히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사람도 많았다. 어떤 이는 양팔을 벌려 높이 들어, “와! 대단하다.” “와! 희망이 보인다.” [달성군 사문진 일몰] 나 역시 가슴 깊은 곳에서 감동이 휘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얼굴을 들어 태양을 보니, 눈앞에 신비로운 색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빌었다. 새해 일출에서 태양의 큰 기운을 받았는지 그즈음의 나는 가정생활도, 직장 생활도 순조로웠다. 새해 아침에 희망차게 솟구쳐 떠 오른 태양의 정기가 나의 생을 응원해 주는 것 같았다. 그 후로도 새해가 되면 나는 습관처럼 일출을 찾았다. 나이가 드니 젊은 시절에 무심히 지나쳤던 일몰을 주목하게 되었다. 일몰을 본 경험 중에는 하와이 오아후섬 서쪽 야자수 가득한 와이키키 해변이 제일 기억에 남아 있다. 하와이대학에 어학연수를 갔을 때였다. 하루 연수가 끝나면 주로 와이키키 해변이나 쇼핑몰로 달려갔다. 그날도 수업을 마치고 와이키키 해변으로 갔다.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와이키키 해변은 반짝이는 모래사장에다 바닷물은 에메랄드 빛깔이었다. 해안에는 온통 화려한 고층 호텔이 서로가 자태를 뽐내고 있어 매우 아름다웠다. 일몰 시간이 되니, 해변 모래사장에는 연인끼리 또는 부부인 듯 보이는 남녀 쌍쌍이 어깨동무하여 앉아 있거나 서서 수평선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바닷가 바위 위에서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는 펭귄처럼 보였다. ‘서양 사람들은 참으로 일몰을 사랑하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지나니 하늘은 황금빛에서 회색으로 변했다. 바닷물도 에메랄드색에서 검푸른색이 되다가 점점 어두워져 갔다. 이 어둠은 다시 일출로 이어질까. 우리네 인생도 화려한 일출에서 서서히 어두워지는 일몰이 되었다가 다시 일출로 변하여 다른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면 후회 없는 삶을 살아 볼 수 있을 텐데……. 귀국하여 아내와 함께 달성군 사문진을 찾았을 때도 내 마음속에는 와이키키 해변에서 본 일몰의 감동이 남아 있었다. 사문진은 낙동강변에서 떨어지는 해를 통째로 볼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일몰의 시간이 되자 강물에 비친 노을은 용광로와 같이 불타는 느낌이고, 하늘의 노을은 한 폭의 수채화였다. 자연이 주는 선물 가운데 이런 아름다움도 있단 말인가. 일몰을 보면서 아내는 엉뚱하게도, “여보! 40세 때 찍은 가족사진에는 당신이 뽀송뽀송한 청년이었는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네.” 자기는 어떤가. 나를 애태우게 하던 고운 얼굴은 오간 데 없고 눈가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하지 않는가. 나는 지난날 동료들과 술 마시고 늦게 귀가하고, 내 생활에 빠져서 아내에게 무심했던 일들이 떠올라 마음이 짠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 마음도 모르는 아내는, “노을 좀 봐. 진짜 멋지다!” 강변에서 바라본 일몰의 광경은 장관이었다. 서쪽 하늘과 강이 서서히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내 마음도 오렌지의 향기를 뿜어내는 것처럼 설레다가 서서히 붉은 노을의 여운만이 남아 안타까웠다. 자연의 섭리인 일출과 일몰은 개인의 성향과 시기에 따라 느낌이 다른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은 어차피 자연의 순리(順理)에 따라야 하고, 신이 계획한 섭리(攝理)를 지킬 수밖에 없다. 일출과 일몰의 조화도 자연이 빚어낸 산물이 아닌가. 나는 슬그머니 아내의 손을 잡았다. 뿌리치지는 않으나 얼굴을 보니 불그레 물들어 있다. 석양 때문이겠지만 괜스레 울컥하여 야윈 어깨를 가만히 안아본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신라는 외세에 의해 서기 642년까지 많은 성을 빼앗겼다. 서기 643년 가을 9월에 외세를 막기 위해 사신을 중국 당나라에 보내 군사 파견을 요청했으나 도움이 없었다. 김유신 장군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사력을 길렀다. 오늘은 8월 초순이다. 기온도 높지 않고 답사하기에 알맞은 날씨이다. 현재 경산시 압량읍과 진량읍에 있는 그 당시 연병장에 가 보았다. 현재 경산시에는 서기 102년(신라 파사 이사금 23년), 신라에 멸망한 압독(押督) 또는 압량(押梁) 소국이 있었다. 신라에 소속된 압량에는 김유신 장군이 48세(서기 642년) 때, 겨울에 압량주(押梁州) 군주로 왔다. 압량에는 그 당시 외세를 막아내고 나아가 삼국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전초 기지이자 군사를 모아 심신을 연마하고 무술을 훈련하던 군사 훈련장이 보존되어 있다. 김유신 장군이 군사들을 모아 훈련한 연병장은 3개소가 있다. 2개소는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읍 압량리와 내리에 있고, 1개소는 경산시 진량읍 선화리에 있다. 각기 비슷한 형태를 이룬 소규모의 연병장들로 남아 있다. 이들을 경산병영유적(慶山兵營遺蹟)이라 한다. 이 유적은 서기 1971년 국가 사적 218호인 압량유적으로 지정되었다가 서기 2011년 경산병영유적으로 변경되었다. 제1 연병장은 압량읍 압량리 179번지에 있다. 압량읍 시가지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고 자동차로 10분이면 닿는다. 연병장을 멀리서 보니 야트막한 야산처럼 보인다. 가까이 들어서니 높은 언덕 위에 잔디로 조성한 연병장이 커다란 운동장처럼 보인다. [제1 연병장 군사 훈련 모형도, 출처: 경산시립박물관 제2전시실 촬영: 서기 2019.8.2.(금)1] 이 연병장은 넓이가 13,924㎡(약 4,200평)이고, 높이가 7m이며, 지름이 90m이고 둘레가 약 300m이다. 동남쪽에는 높이가 약 10m 되는 토루(土壘)가 있는데 지름은 약 11m이다. 이 토루에서 김유신 장군이 군사들을 직접 지휘했다는 생각에 직접 토루에 올라가 보았다. 아래로 보이는 느낌은 내가 장군이 된 것처럼 큰 소리로 고함을 질러 보았다. 듣고 있는 군사들이 한 동작 같이 움직여 준다. 제2 연병장은 압량리에 있는 제1 연병장으로부터 약 1.5km 떨어진 압량읍 내리 389번지에 있다. 거의 바로 옆에 있는 느낌이 든다. 가는 길도 자동찻길이라서 쉽게 도착된다. 연병장 입구에는 안내판이 있어서 감사하다. 제1 연병장과 비슷하다. 역시 잔디로 조성했다. 관리가 잘되고 있는 느낌이다. 이 연병장의 면적은 15,987㎡(약 4,840평)로 제1 연병장 보다는 약간 더 넓다. 연병장의 정상 부분은 자연적인 형태이며 토축으로 지름 80m, 둘레 270m의 광장을 마련했다. 광장의 동남쪽에 높이가 약 9m이고 지름이 13m가량의 토루를 쌓았으나 동남 부분이 크게 파괴되어 토루의 모습을 잃고 있다. 이 연병장은 둘레가 제1 연병장과 비슷하다. 토루의 파손으로 토루에 올라갈 수가 없어서 연병장을 한 바퀴 돌았다. 땀이 흐른다. 땀을 식히기 위해 연병장 가장자리에 있는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서 그 당시 군사들이 나라를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로 똘똘 뭉친 모습이 떠오른다. 제3 연병장은 내리 제2 연병장으로부터 약 3km 떨어진 진량읍 선화리 948번지에 있다. 자동차로 약 10분 정도 달렸다. 연병장에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답답하다. 연병장에는 온통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면적은 11,263㎡(약 3,410평)로 세 군데 중 제일 작다. 연병장 말단부에서 높이 10m 정도의 토축으로 지름 80m가량 원형 광장을 구축했다. 토루는 연병장 중앙 북쪽에 치우쳐 있고 높이 2m, 윗면 지름 13m 정도이다. 연병장에 소나무가 많이 있으나 후에 심은 것이다. 제3 연병장을 한 바퀴 돌면서 보병과 기마병은 주로 어느 연병장에서 각각 훈련했는지 궁금했다. 경산병영유적이 있는 곳을 다른 표현으로 두룩산이라 부른다. 두룩산이라는 말은 두리산으로 두리두리한 산, 즉 둥근 산의 지형에서 온 말로 고어(古語)로 두리산(豆里山=圓山)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세 군데 연병장은 서로 1.2km~3.2km 떨어져 삼각형의 배치 모양을 하고 있다. 모두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다. 자연 구릉 위에 흙을 쌓아 올려서 마치 성(城)처럼 보이지만 성으로 보기에는 규모가 작으며, 윗면이 평탄한 광장으로 되어있다. 광장은 군사들이 무술을 익히고 심신을 연마하던 장소였다. 경산시 압량면 부적리에는 마위지라는 연못이 있다. 마위지는 신라 김유신 장군이 압량주 군주로 있을 때 훈련한 기마들에 물을 먹이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축조한 저수지이다. 이곳 일대의 아낙들은 저녁때가 되면 온종일 훈련에 지친 말을 이 못으로 몰고 나와 귀를 씻는다. 아낙들은 말에게, “전쟁터에 들어서면 적군의 화살과 창칼을 민첩하게 피해 달라.” 는 주문과 함께 남편과 아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했다고 전한다. 이후 이곳을 마이지(馬耳池)라 칭하기도 했고, 마을 지명 또한, ‘지아비가 적진으로 출정한다.’ 라는 뜻을 담은 지아비 부(夫)에 나아갈 적(適)을 써서 부적리라 전한다. 경산시는 서기 2014년 신화랑 풍류 체험 벨트 조성사업으로 마위지를 경산 마위지 근린공원으로 조성했다. [마이지 동쪽에 세운 무명 용사상 촬영: 서기 2020.10.1.(목)2] 유비무환이다. 모든 일에는 준비를 잘하면 성과를 낼 수 있다. 세 군데 연병장의 군사들 훈련 소리가 귀를 때린다. 그 소리가 나라를 지켰다. 내가 태어난 진량읍에 김유신 장군의 연병장이 있었다니 가슴 뿌듯함을 느낀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누구에게나 첫사랑이 있었을 것 같다. 나는 중학교 시절 여자 음악 선생님을 사모한 적이 있었다. 김유신 장군은 15세 때 천관녀(天官女)와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신라 진평왕 31년, 609년 봄이었다. 서라벌 북천(北川) 변의 버들가지에도 물이 올라 푸르르기 시작했다. 서라벌 근처의 복숭아밭에는 도화(桃花)가 만발하고, 노란색이 선명한 깃털을 가진 꾀꼬리의 지저귀는 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계절이었다. 이 화창한 계절에 도화 사잇길로 말을 타고 가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기품 있어 보이고 귀공자 타입이었다. 매일 화랑들을 만나 무예를 닦으러 가는 중이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한 여인이 있었다. [김유신 장군과 천관녀도] 한 여인은 이인로(서기 1152년~1220년)의 『파한집破閑集』에 천한 집인 예가(隷家)의 여자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귀족 출신은 아닌 것 같다. 그 후의 기록으로 기생이라는 표현도 있으나, 기생은 더군다나 아니고 신라의 여사제(女司祭)로서 처녀였다. 여사제는 하늘에 제사를 모시는데 주관하는 사람이다. 유럽에서도 제사를 주관하는 여자는 처녀로서 제사 후에는 왕과 하룻밤을 지내는 경우가 있었다. 여사제는 자기 집 앞으로 말을 타고 가는 김유신 화랑을 사모하게 됐다. 하루는 무술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여사제가 김유신 화랑에게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내고는 집 안으로 사라졌다. 이상하게 여긴 나머지 집 밖에 말을 세우고, 누구인지 궁금하여 담 너머로 바라보았다. 여사제는 김유신 화랑을 보면서 미소를 띠며 상냥스럽게, “누구십니까?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김유신 화랑은 아무 대답 없이 그대로 바라보기만 했다. 여사제가 계속해서 들어오라는 말에 안으로 들어가니, “서라벌 장안에 김 왕손(王孫) 유신공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사제의 머리와 몸에서는 향기가 나고, 앉으라고 권하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 여사제 앞의 탁자 위에는 불교 경전과 당나라 시인의 시집이 놓여 있고, 벽에는 가야금이 바라보고 있었다. 김유신 화랑의 눈에는 여사제가 고상한 취미를 가졌고, 모든 번뇌를 해탈한 처녀로 맑게 보였다. 그제야, 김유신 화랑은 다소 안심이 되었다. 여사제의 몸종이 술상을 가지고 오는데, 몸종도 여사제와 다름없이 깨끗한 차림이었다. 몸종은 김유신 화랑 앞에 술상을 놓고는 예를 갖추어 인사한 후 나갔다. 여사제는 정중히 절을 하고서 술을 권하면서, “세상에 영웅호걸도 많다지만 김 왕손 같으신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천관(天官)이라고도 하고, 선랑(仙娘)이라고도 합니다.” 김유신 화랑은 아직도 말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천관녀는 술을 계속 권하면서, “화랑 오계에 술을 먹지 말라는 계율은 없으니 한잔하십시오.” 이윽고 김유신 화랑은 한잔 마시면서 집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웃고는 천관녀에게도 술을 한잔 권했다. 몇 잔의 술이 오갔고, 김유신 화랑은 천관녀에게 가야금 타기를 권했다. 가야금 소리에 마음을 풀고 다시 술을 마셨다. 많은 시간이 흘러 황혼이 되었다. 김유신 화랑이 집으로 가려고 하자, 천관녀는 다시 술을 권하면서 춤이 나오고 노래도 나왔다. 김유신 화랑도 흥겨워서 같이 춤과 노래가 나왔다. 그 당시 화랑들이 부르던 노래는 도령가(徒領歌)나 사내기물악(思內奇物樂) 등으로 알려져 있으나 가사가 전해지지 않아 무척 아쉽다. 이제 김유신 화랑이 일어나려 하자, 천관녀는 취한 눈에 김유신 화랑의 소매를 잡았다. 천관녀는 선랑이라 했다. 선랑은 서낭당에서 제사를 주재하는 여사제로서 세속의 인연이 허락되지 않은 위치인데 김유신 화랑을 엄청나게 사모한 것 같다. 이 사실을 안 김유신 화랑의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 꾸짖었다. “나는 네가 장차 큰인물이 되기를 갈망했는데 천관녀의 집에 출입이나 하니 어찌 장래를 바랄 수 있겠는가?” 김유신 화랑은 뜰 아래에서 머리를 숙이고, “다시는 출입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번 일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 후로는 천관녀의 집 근방에도 가지 않았고, 집에서 병서(兵書)를 읽고 낭도들과 화랑정신을 길렀다. 부모의 말씀을 따라 자기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천륜(天倫)을 따랐다. 그해 가을 어느 날 서라벌에 화랑들이 모였다. 이들은 말달리기, 활쏘기, 검술, 가무 등을 했다. 모두가 몸이 건강하고 미남자로서 무예에 능하고 의협심이 강한 화랑들이었다. 머지않아 백제, 고구려를 통일할 기세들이었다. 김유신 화랑은 행사를 마치고 다른 화랑들과 음주한 것이 몹시 취했다. 집으로 가기 위해 말 등에 앉아 눈을 감은 채로 말이 가는 대로 있었다. 말이 갑자기 멈추기에 정신을 차려보니 천관녀의 집 앞이었다. 천관녀는 김유신 화랑을 보자 기쁘기도 했지만, 발길을 끊은 데 대하여 원망스러워 눈물 흘리며 나아가 맞이했다. 그 순간 어머니와의 약속이 생각나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김유신 화랑은 말에서 내려 허리에 차고 있던 칼로 두 입술을 깨물고 애마(愛馬)의 목을 베고 안장을 버린 채 집으로 돌아갔다. 김유신 화랑은 천관녀가 평생 자기를 사모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천관녀가 살던 곳에 절을 지어 천관사(天官寺)라 불렀다. 천관사는 김유신 화랑이 살던 재매정에서 남천(南川) 건너 바로 눈앞에 보이는 거리에 있다. 김유신 장군은 애마를 죽인 자리를 ‘참마항(斬馬巷)'이라 했다. 이후 사람들은, “김유신의 삼국 통일 위업은 참마항에서 시작됐다.” 라고 이야기했다. 천관사는 서기 2000년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 되었다. 서기 2021년 10월 천관사 복원 공사장에 갔더니 경주시청에서 팔각석탑 복원 설치 공사가 한창이다. 천관사가 복원되고 있는 안내판의 중앙에는 ‘김유신 장군과 천관녀도’의 그림에 말은 목이 베어 넘어져 있고 천관녀는 놀라고 있다. 남자는 첫사랑을 못 잊는다는데 김유신 장군의 마음에도 첫사랑을 간직했을지는 모를 일이다. 김유신 장군의 각오가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것 같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누구에게나 첫사랑이 있었을 것 같다. 나는 중학교 시절 여자 음악 선생님을 사모한 적이 있었다. 김유신 장군은 15세 때 천관녀(天官女)와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신라 진평왕 31년, 609년 봄이었다. 서라벌 북천(北川) 변의 버들가지에도 물이 올라 푸르르기 시작했다. 서라벌 근처의 복숭아밭에는 도화(桃花)가 만발하고, 노란색이 선명한 깃털을 가진 꾀꼬리의 지저귀는 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계절이었다. [▲김유신 장군과 천관녀도, 촬영: 2021.10.22.(금) 경주 통일전에서,작품: 서기 1977년 오승우 작가] 이 화창한 계절에 도화 사잇길로 말을 타고 가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기품 있어 보이고 귀공자 타입이었다. 매일 화랑들을 만나 무예를 닦으러 가는 중이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한 여인이 있었다. 한 여인은 이인로(서기 1152년~1220년)의 『파한집破閑集』에 천한 집인 예가(隷家)의 여자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귀족 출신은 아닌 것 같다. 그 후의 기록으로 기생이라는 표현도 있으나, 기생은 더군다나 아니고 신라의 여사제(女司祭)로서 처녀였다. 여사제는 하늘에 제사를 모시는데 주관하는 사람이다. 유럽에서도 제사를 주관하는 여자는 처녀로서 제사 후에는 왕과 하룻밤을 지내는 경우가 있었다. 여사제는 자기 집 앞으로 말을 타고 가는 김유신 화랑을 사모하게 됐다. 하루는 무술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여사제가 김유신 화랑에게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내고는 집 안으로 사라졌다. 이상하게 여긴 나머지 집 밖에 말을 세우고, 누구인지 궁금하여 담 너머로 바라보았다. 여사제는 김유신 화랑을 보면서 미소를 띠며 상냥스럽게, “누구십니까?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김유신 화랑은 아무 대답 없이 그대로 바라보기만 했다. 여사제가 계속해서 들어오라는 말에 안으로 들어가니, “서라벌 장안에 김 왕손(王孫) 유신공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사제의 머리와 몸에서는 향기가 나고, 앉으라고 권하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 여사제 앞의 탁자 위에는 불교 경전과 당나라 시인의 시집이 놓여 있고, 벽에는 가야금이 바라보고 있었다. 김유신 화랑의 눈에는 여사제가 고상한 취미를 가졌고, 모든 번뇌를 해탈한 처녀로 맑게 보였다. 그제야, 김유신 화랑은 다소 안심이 되었다. 여사제의 몸종이 술상을 가지고 오는데, 몸종도 여사제와 다름없이 깨끗한 차림이었다. 몸종은 김유신 화랑 앞에 술상을 놓고는 예를 갖추어 인사한 후 나갔다. 여사제는 정중히 절을 하고서 술을 권하면서, “세상에 영웅호걸도 많다지만 김 왕손 같으신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천관(天官)이라고도 하고, 선랑(仙娘)이라고도 합니다.” 김유신 화랑은 아직도 말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천관녀는 술을 계속 권하면서, “화랑 오계에 술을 먹지 말라는 계율은 없으니 한잔하십시오.” 이윽고 김유신 화랑은 한잔 마시면서 집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웃고는 천관녀에게도 술을 한잔 권했다. 몇 잔의 술이 오갔고, 김유신 화랑은 천관녀에게 가야금 타기를 권했다. 가야금 소리에 마음을 풀고 다시 술을 마셨다. 많은 시간이 흘러 황혼이 되었다. 김유신 화랑이 집으로 가려고 하자, 천관녀는 다시 술을 권하면서 춤이 나오고 노래도 나왔다. 김유신 화랑도 흥겨워서 같이 춤과 노래가 나왔다. 그 당시 화랑들이 부르던 노래는 도령가(徒領歌)나 사내기물악(思內奇物樂) 등으로 알려져 있으나 가사가 전해지지 않아 무척 아쉽다. 이제 김유신 화랑이 일어나려 하자, 천관녀는 취한 눈에 김유신 화랑의 소매를 잡았다. 천관녀는 선랑이라 했다. 선랑은 서낭당에서 제사를 주재하는 여사제로서 세속의 인연이 허락되지 않은 위치인데 김유신 화랑을 엄청나게 사모한 것 같다. 이 사실을 안 김유신 화랑의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 꾸짖었다. “나는 네가 장차 큰인물이 되기를 갈망했는데 천관녀의 집에 출입이나 하니 어찌 장래를 바랄 수 있겠는가?” 김유신 화랑은 뜰 아래에서 머리를 숙이고, “다시는 출입을 하지 않겠습니다. 이번 일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 후로는 천관녀의 집 근방에도 가지 않았고, 집에서 병서(兵書)를 읽고 낭도들과 화랑정신을 길렀다. 부모의 말씀을 따라 자기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천륜(天倫)을 따랐다. 그해 가을 어느 날 서라벌에 화랑들이 모였다. 이들은 말달리기, 활쏘기, 검술, 가무 등을 했다. 모두가 몸이 건강하고 미남자로서 무예에 능하고 의협심이 강한 화랑들이었다. 머지않아 백제, 고구려를 통일할 기세들이었다. 김유신 화랑은 행사를 마치고 다른 화랑들과 음주한 것이 몹시 취했다. 집으로 가기 위해 말 등에 앉아 눈을 감은 채로 말이 가는 대로 있었다. 말이 갑자기 멈추기에 정신을 차려보니 천관녀의 집 앞이었다. 천관녀는 김유신 화랑을 보자 기쁘기도 했지만, 발길을 끊은 데 대하여 원망스러워 눈물 흘리며 나아가 맞이했다. 그 순간 어머니와의 약속이 생각나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김유신 화랑은 말에서 내려 허리에 차고 있던 칼로 두 입술을 깨물고 애마(愛馬)의 목을 베고 안장을 버린 채 집으로 돌아갔다. 김유신 화랑은 천관녀가 평생 자기를 사모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천관녀가 살던 곳에 절을 지어 천관사(天官寺)라 불렀다. 천관사는 김유신 화랑이 살던 재매정에서 남천(南川) 건너 바로 눈앞에 보이는 거리에 있다. 김유신 장군은 애마를 죽인 자리를 ‘참마항(斬馬巷)'이라 했다. 이후 사람들은, “김유신의 삼국 통일 위업은 참마항에서 시작됐다.” 라고 이야기했다. 천관사는 서기 2000년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해 발굴조사 되었다. 서기 2021년 10월 천관사 복원 공사장에 갔더니 경주시청에서 팔각석탑 복원 설치 공사가 한창이다. 천관사가 복원되고 있는 안내판의 중앙에는 ‘김유신 장군과 천관녀도’의 그림에 말은 목이 베어 넘어져 있고 천관녀는 놀라고 있다. 남자는 첫사랑을 못 잊는다는데 김유신 장군의 마음에도 첫사랑을 간직했을지는 모를 일이다. 김유신 장군의 각오가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것 같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안도걸(전 기획재정부 차관) 프로필 사진] 안도걸경제연구소(전.기획재정부 차관)는 한라백두평화통일연대 남유정 대표와 만나 ‘광주 탈북 새터민들의 자립 지원과 경제적 시너지 효과’에 대한 정책 간담회를 가졌다. 안 이사장은 광주에 정착한 4~500명의 탈북 새터민들의 생활상을 경청하고 새터민들의 온전한 정착과 경제적 시너지 창출을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도걸 경제연구소] 또한, “공감을 바탕으로 한 일관적인 통일 정책을 위해서는 지역 사회에서부터 작은 통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면서 “광주 탈북 새터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고민하는 것은 지자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통일 정책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탈북 새터민의 성공신화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남북의 시너지가 발생하는 지점을 포착할 수 있으며, 이 작업을 통해 남북 경제 시너지 창출의 로드맵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한편, 안 이사장은 광주 내 탈북 새터민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뿐만 아니라 광주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소수자를 포용할 수 있는 정책 구상에도 힘을 쏟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by 수원본부장 손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