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적한 호수에 필자] 진보라는 말은 작금에 공공연히 사용되는 말이며 아니면 좌파라고도 한다. 지금은 우파 <국수적>, 좌파 <급진적>로 나뉘어 서로가 정도라는 일반적인 수사로 현재 사용되고 있으며 좌우 갈등으로 인한 사회현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사실 공산당은 뿔 달린 괴물처럼 금기시되던 말이 현재는 리버럴주위 <자유주의> 시대 앞에 고민하는 사람쯤으로 허용의 폭이 매우 넓어졌다고 생각 하지만 이번언론매체를 보면서 한국사회도 자생간첩이 생겼다는 뉴스에 경악할 노릇이다. 물론 우리의 정신 공간이 성숙을 의미할 수도 있고 또한 다양성의 사회를 뜻할 수도 있겠지만 자생 간첩만은 이해가 안 된다. 엄연히 남북 대치 상황과 정전협정 상황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지금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며 자유경제 바탕으로 이루어 나가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북한에 경도되어 소리치는 좌파들의 목소리는 여전하기에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1960년에 나타난 소위 민중문학의 잔치가 한창이 던바 21세기 들어서 이제는 노골적으로 창궐하는 자생간첩이라 니기가 막힐 노릇이다. 어느 정치가는 21세기에 대한민국에 무슨 간첩이 있겠냐며 하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사실민중문학의 당위성으로 오도된 이 현실을 보면 민주화, 민중, 통일, 민족, 요즘엔 중도 등의 현란한 변화가 과연 오늘날 정당성이 담보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아니올시다.이다 애매모호한 문학은 이제는 아니다.라는 말을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5년을 보았으면서도 사상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반쪽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다는 사실에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깝다. 가장 극심한 시절은 김대중, 노무현을 거처 문재인 정권에 와서는 그들의 민족문학이라는 금과옥조의 간판조차 명칭을 변경하고 백낙청, 황석영 등에 의하여 최고조를 달렸다. 더구나 백낙청은 2009년 3월 도하 신문에 “우리의 목표는 한반도의 평화, 통일은 수단일 뿐”이라는 표제하에 “분단으로 이득을 보는 세력 남한에도 북한에도 있어 건전중도세력 형성되어야”를 주장하는 면모를 보였다. 문화 정신이 줏대가 없는 정책에 화해, 통일인지는 모르나 기막히게 그들의 또 다른 잔치가 되었다. 우리의 문학이나 문화는 좌파 시대나 우파시대를 지나도 이들의 활동무대였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은 정신이 나간 청맹과니의 신세처럼 보인다. 현재도 북한은 우리를 적이라 하며 미사일을 쏘아대고 툭하면 핵으로 위협하는 실정에 있다. 좌파들이 어떤 숨겨진 의도가 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일이다. 수 백만명의 동포가 굶어 죽어가도 핵을 만들고 미사일을 발사하고 꽃다운 젊은이들이 꽃제비로 팔려가는 슬픈 북한의 실상을 보면서도 북한의 지령을 받고 간첩 활동을 하다니 참으로 이율배반이고 끼리끼리 만나 외국에서 북한과 접선을 하고 있다니 하루빨리 검거하여 바른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곧추서야 할 것이다. 이런 것은 개인 돌출이라 볼 수 없으며 조직적으로 암약하고 있다고 봐야겠다. 물론 좌파 문학에 심취한 지식인들도 시대에 따라 우후죽순으로 자생되었지만 경도된 문학은 한계가 있다. 대부분 선량한 작가들과는 달리 다른가 치의 이념은 기준 <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으로 가서 작가를 해야지 왜 우리 사회를 멍들게 하고 혼란을 주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진보의 작가는 이문열의 소설을 폄훼하여 거론하지만 이런 말은 확실히 잘못된 아집의 발언이다. 그렇다면 비난하는 자의 시는 잘된 작품인지 묻고 싶다. 특히 문학과 예술은 볼셰비키혁명에 의한 지도적 전위들이 이끄는 급진적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복무해야 한다는 문학론. 변증법적 유물론에 입각한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 문학론으로, 한국 문학에서는 1930년대 초 카프 문학 운동의 이론가였던 임화, 안막 등이 주창하였던 바 해방 이후 대한민국 많은 지식인들이 볼셰비키혁명에 의하여 중국, 러시아로 유학하여 경도된 문학으로 사상의 정신이 바퀸 문제도 있지만 참으로 근대사 역사를 보면 너무나도 슬픈 역사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1세기도 안되어 세계 10위라는 금자탑을 세웠던 것은 지도자들의 혁혁한 공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 와중에 독재, 민주화라는 문을 넘어 지금 같은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기적이 아니고는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한때는 필자도 민주주의 가치를 위해 거리로 나선 적도 있지만 막스주의, 레닌주의니 하며 그때만 해도 경도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긴 끼리끼리 모여 단파방송을 몰래 듣는 친구도 있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남북이 대치된 사회이니 그러려니 할 수도 있겠지만 민주화란 이름으로 경도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시인이나 작가들이 생산하는 작품은 그 나름의 개성과 표정을 가진 살아있는 얼굴들임을 알아야 하겠지만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부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물론 문학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문학은 문학적 가치로 인정을 받아야 함에도 아직도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 사회적 혼란과 문학을 이용하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2. 자식을 먼저 보내는 참렬(慘烈)의 창작』 죽음이란 참으로 참담한 슬픔이다. 그것도 자식의 타계를 앞서 겪어야 하는 어버이의 헤아리기는 그 당사자가 아니라면 필설로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정지용의 『유리창』이나 허난설헌의 『곡자』 같은 작품은 자식을 보내는 비참한 심정이 가슴을 적신다. 황금찬의 『목련꽃』은 참열이 묻어있는 시이다라고 하겠다. “하나 예를 들어보자.” 집 앞에/목련 두 구루가 서 있다./키가 좀 크고 가지가 적은 나무는/백목련/키가 좀 작고/가지가 많은 나무는 자목련이다./해마다/목련 철이 되면/도제가 와서/목련꽃 시를 쓴다면서/반나절씩/꽃나무 밑에 섰다가 가곤 했다./금년에는 꽃이 다 지고 말아도/시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울고 있었다./내가 아니고/꽃나무들이다./눈물도 울음소리도 없이 우는/목련꽃나무/시인이 간 그 나라에도/목련꽃이 피어 있겠지//내게 그 소식/전해달라/시인아. <황금찬 『목련꽃』> 중에서 시인 황도제- 자식의 죽음이 주는 통증을 감추면서 시를 쓴 것이다. 이는 절제의 미학이 되겠지만, 이를 감내하기 위해 안으로 흐르는 눈물의 추억이 고스란히 보인다. 이미 가슴에는 흘러넘치는 아픔과 슬픔이 노 시인의 마음을 의탁하는 목련꽃의 “눈물도 울음소리도 없이” 시나브로 떨어지는 꽃잎의 날림 앞에서 처절한 정경이 보이는 듯하다. 그때가 2010년쯤 인가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용인신갈그때 당시에 같은 00 아파트에 살고 있었기에 더욱 생각이 난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정상으로 떠나지 않았지만 떠나간 시인은 소식을 보내는 방법이 없을지라도 사랑으로 지켜본 자식에 대한 연민은 “내게 그 소식/전해달라./ 시인아.”의 절규에는 허공에 씁쓸한 메아리 되어 귓전에 울리면서 가슴으로 파고드는 피 울음인 것을, 어찌 위로할 수 있겠는가? 행사 때 이거나, 문사원 대학에서 강의와 축사를 하면서도 황금찬 시인은 일절 입을 굳게 다물고 내색을 하지 않았다. 황금찬 시인은 이천 문사원 대학에서 강의도 듣고 스승이라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님을 밝혀둔다. 인간의 호기심은 늘 미지의 공간을 위해 모험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앞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대답이라는 것은 씁쓸한 비유 앞에 홀로 서게 된다. 시는 이러한 이치를 에둘러 스스로를 말하는 독백의 길에 나설 때, 시의 깊이는 함축되는 것이다. 인간이 새가 되거나 꽃이 되거나 결국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방법일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엠비규어티 <모호하다>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날아가는 새들이/그리운가 보다./닿지 못하는 하늘이기에/ 되돌아왔다./하늘을 날다/되돌아와서는 /지치어/나뭇가지에 앉아/두리번거리는/새들이 저마다 어찌할 바를 모른다. 지치고/지친 나머지 인간은 길을 떠나 만들고 또 되돌아오는 일로 일생을 가늠하는 것이다. 설사 멀리 떠난다 해도 결국 종말에는 되돌아오는 여정에서 나그네라는 운명을 감내하는 것이 고작이다. “새도 인간으로 환치하면 무한으로 길을 떠났다. 결국 ‘날갯짓하다 지쳐서 확인하면 고작 <나뭇가지에 앉아> 두리번거리는 일- 지치고 지친 새가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하는 데에는 새도 동물이라 가만히 지켜보면 그 나름의 행동을 보면 나타난다. 그것이 인간아니 시인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안목이다.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촉을 가지고 있는 샘이 아닌가? 이것은 시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행동 촉, 상상할 수 없는 창작의 부산물이기도 하다. 개인적 촉으로 사물과 동물을 바라보고 창작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시인들만의 촉을 발휘한다 할 수 있겠다. 시인은 상상의 나래를 얼마나 펼칠 수 있고 그 사물과 행동들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는 순전히 개개인의 능력이고 창작이라 볼 수 있다. 어떤 시인은 외롭다 할 수 있겠고 또 다른 시인은 여유와 낭만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보는 각도, 창조하는 기교에 따라 모두 다를 수 있기에 시인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허무라 할 수도 있고, 도로(徒勞)라 말을 할 수도 있지만, 지친 상태 앞에 무기력해지는 자화상의 발견일 것이다. 그러나 길을 떠나는 연습이지만 제자리로 돌아와 자기 앞에 설 때, 비로소 삶의 깊이는 성숙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도 새들은 하늘로 비상하는 꿈을 가질 때, 새의 운명은 아름다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삶의 모습 또한 저마다의 자리를 소유하고 빛나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함축과 응축의 소산이라 여기며 에필로그 한다. 2025.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의 저서] [필자의 칼럼집] [필자의 저서]
[서장 한창완] 공동주택 화재로 인한 인명피해가 증가하는 가운데, 연기 흡입에 의한 질식 사고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이에 각 소방서에서는 화재 시 질식 사고를 예방하고, 인명피해를 줄이기 위해 '방화문 닫기' 문화 확산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지난 1월 경기도 성남에서 발생한 화재는 연기와 유독가스가 잘 확산되지 않아 중상자 없이 경미한 인명피해로 마무리될 수 있었는데, 이는 방화문이 닫혀있고 스프링클러 시스템이 정상 작동되어 연기 확산을 효과적으로 방지한 직접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경북소방본부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24년 주거시설 화재 724건 중 공동주택 화재는 175건(24.2%)을 차지하고 인명피해는 연기흡입으로 인한 질식사고가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어, 이는 연기확산을 막는 방화문의 중요성은 물론, 평상시 화재 예방을 위한 소방시설 점검 및 안전수칙 준수 등이 강조됨을 시사한다. 방화문은 단순한 출입문이 아니라, 생명을 지키는 방어선으로 작용한다. 대형 건축물, 계단실형 아파트의 경우 계단실의 굴뚝효과로 인해 유독가스가 다른 층으로 빠르게 확산하고, 이는 연기흡입으로 인한 대형 인명피해로 이어질 우려가 있기에 방화문을 닫음으로써 화재 연소 범위를 차단하고, 사람들이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방화문 닫기를 일상화하는 것은 단순한 화재 예방 활동을 넘어, 공동주택 주민들의 안전한 생활 환경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며,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정기적인 유지보수가 필요할 것이다. -경산소방서장 한창완
[[기고문] 경산소방서 예방안전과장 이성곤] 최근 몇 년 동안 주택화재로 인한 피해가 증가하면서, 안전한 주거 환경 조성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화재는 생명과 재산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가족과 이웃에게 큰 상처를 남길 수 있는 심각한 사고로 특히, 화기의 사용이 많은 설 명절에는 화재예방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가정에서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안전 수칙과 대책을 준수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먼저, 주택 내에는 화재 경보기와 소화기를 설치해야 한다. 화재 경보기는 화재 발생 시 조기 경보를 제공하여 대피에 도움을 주며, 소화기는 화재 진압에 필수적인 장비로, 적절한 위치에 비치되어야 한다. 전기와 가스 사용 시에도 안전을 고려해야 한다. 오래된 전기 콘센트나 소모된 전선은 화재 발생 위험이 크므로 주기적인 점검과 교체가 필요하다. 가스 사용 시에는 가스 누출을 감지할 수 있는 경보기를 설치하고, 가스 사용 후에는 반드시 밸브를 닫아야 한다. 대피 계획 수립도 중요한 요소이다. 가족 구성원들이 화재 발생 시 어디로 대피해야 하는지를 미리 알고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가족들과 함께 대피 계획을 수립하고 주기적으로 연습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이웃과의 협력을 통해 대피 공간과 방법을 공유하는 것도 중요하다. 안전한 사용 습관을 갖는 것도 화재 예방에 있어서 중요하다. 주택 내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고, 가열기구를 사용할 때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한, 화재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는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주택화재는 예방 가능한 사고이다. 안전 수칙을 준수하고 대책을 마련하여 우리 가정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함께 안전한 생활 환경을 만들어 가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우리 모두가 안전하고 편안한 주거 환경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을 위한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신라 문무대왕 김법민은 외삼촌인 김유신(흥무대왕)과 함께 삼국통일을 완수했다. 경북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앞바다에는 바위섬, 네 면에 수로가 나 있는 문무대왕 수중릉이 있다. 봉길리 앞바다 조약돌 위에 앉아 저 멀리서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니 문무대왕의 위업을 떠 올리게 한다. 김법민은 626년에 태종무열대왕과 문명왕후 사이에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25세 때는 진덕여왕의 명으로 비단에 수놓은 오언 율시의 「태평송」을 당나라 고종에게 바치는 일을 담당했다. 「태평송」은 주변 국가를 모두 복속시켜 위세를 떨친 당나라의 위대한 문무의 힘과 통치력을 예찬한 내용이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노린 신라의 야심적인 외교의 시다. 당나라 고종은 태평송에 만족해하고 김법민을 태부경(太府卿)으로 임명해 돌려보냈다. 태부경은 당나라의 태부시(太府寺)의 장관으로서 황제의 재화와 보물의 수장을 관장했다. 아버지인 태종무열대왕은 왕자들의 관등을 높이고 29세인 김법민을 태자로 삼았다. 태자가 된 지 6년째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당나라 내주(萊州)에서 내려온 소정방 군사를 아버지의 명으로 덕물도(덕적도)에서 맞이하는 역할을 했다. 660년 7월 13일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으로 진격하자 의자왕은 측근을 거느리고 밤에 웅진성으로 달아나고,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과 대좌평 천복(千福) 등이 나와 항복했다. 김법민은 부여융을 꿇어앉히고 지난날 의자왕이 신라의 대야성 전투에서 자기 누이를 억울하게 죽인 것을 꾸짖은 것으로 보아 동기간 인정이 듬뿍 느껴진다. 661년 6월에 태종무열대왕이 세상을 떠나자, 김법민은 36세의 나이로 신라 제30대 왕위에 올랐다. 당나라에서 숙위하고 있던 동생 김인문(金仁問)과 유돈(儒敦) 등이 돌아와, “소정방이 수군과 육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므로 문무왕께서도 군사를 일으켜 호응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이에 문무왕은 7월 17일에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20여 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소정방 군사에 호응하기 위해 출발했다. 8월에 문무왕이 장수들과 함께 현재 경기 이천시로 비정하는 시이곡정(始飴谷停)에 도착했을 때 백제의 잔당들이 현재 대전 대덕구 계족산성으로 비정하는 옹산성(甕山城)에 모여 길을 막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무왕은 군사들을 보내 전멸시켰다. 10월에는 당나라 황제의 사신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왕경으로 돌아갔다. 황제의 조칙은 아버지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했고, 여러 빛깔의 비단 5백 단(段)을 증여받았다. 김유신 대장군은 군사들을 쉬게 하고 시이곡정에 기다리고 있었는데 당나라 유덕민(劉德敏)이 칙지를 가지고 왔다. 평양으로 군량을 수송하라는 명령이었다. 명령을 들은 문무왕은 662년 1월에 김유신과 김인문 등 아홉 명의 장군에게 명해 수레 2천여 대에 쌀 4천 석과 조 2만 2천여 석을 싣고 평양으로 가도록 명했다. 소정방은 군량을 얻자 날씨가 몹시 춥고 얼어붙을 지경이라서 곧 싸움을 그만두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이듬해 4월에는 당나라가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문무왕을 계림대도독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이미 당나라는 신라를 자기의 부용국으로 삼았고 이후에 침략할 뜻이 있었다. 665년 8월에는 당나라 칙사 유인원, 웅진도독 부여융, 문무왕이 웅진의 취리산(就利山)에서 맹약을 했다. 문무왕과 부여융은 백마의 피를 입에 발라 다시는 싸우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신라와 백제가 영원한 우방으로서 형제처럼 화친하겠다고 한 약속이었다. 666년, 41세가 되었다. 4월에 문무왕은 고구려를 치기 위해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했다. 그러자 7월에 당나라 고종은 신라군이 평양에 모이도록 했다. 이듬해 8월에 문무왕은 대각간 김유신 등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한성정(漢城停)에 도착해 당나라 이적(李勣)의 군대를 기다렸다. 두 달 후 이적이 평양성 북쪽 200리에 도착해 대나마 강심(江深)을 시켜 문무왕에게 군사 동원 기일을 독촉하자, 문무왕이 현재 황해도 수안인 장새(獐塞)에 도착했을 때 이적(영공)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문무왕의 군사도 돌아왔다. 이적이 왜 돌아갔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당나라에서는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668년 6월 12일 유인궤가 황제의 칙지를 받들고, 숙위하던 김유신의 장남 김삼광과 함께 현재 경기 화성군 남양면 지역인 당항진에 도착했다. 나당연합군이 9월 21일 평양성을 에워싸자, 고구려 보장왕은 찬란한 역사를 뒤로하고 항복했다. 문무왕은 외모가 뛰어났으며 총명하여 지략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재위 기간 중 큰 업적이 있고 난 후 에는 군사들에게 음주의 시간을 준 것으로 보아 신라 때도 군사들에게 음주는 금지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길조라 생각하는 흰 까치, 흰 매를 지방에서 바쳤다니 신라시대부터 희귀 새가 있었다. 부인들에게도 중국식 의복을 입도록 했고, 당나라 음악도 배우게 한 것은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마음대로 재물과 토지를 절에 시주하는 것을 금했다. 이 조치는 사원 등의 지나친 토지 모음을 제한하고, 귀족들의 사유재산이나 토지에 대한 국가권력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또한 669년 2월 21일 새벽 이전까지 죄를 범하여 감옥에 갇혀 있는 이들을 죄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모두 풀어준 것은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살 기회를 부여했다. 문무왕은 리더십을 발휘하고 배포가 큰 정치를 실현했다고 본다. 문무왕은 21년간 재위하다가 681년 7월 1일, 56세(당시 문무대왕비문)로 세상을 떠나니 시호를 문무(文武)라 했다. 문무왕은 평상시에 지의법사에게 자기가 죽은 후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불법을 숭상하고 나라를 수호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또한 임종 10일 후 서역(인도)의 법칙에 따라 불로 태워 장사 지내고 장례 절차를 검약하게 하라고 했다. 그래서 여러 신하가 문무왕의 유언대로 동해 어구의 큰 돌 위에 장사 지냈다. 2001년 KBS 문무대왕 수중릉 조사 때 대왕암의 십자형 수로와 대왕암 안쪽을 인공적으로 깎아서 다듬은 흔적까지 발견했다. 그러나 부장품은 없었다. 바닷물이 동쪽 수로로 들어와 서쪽 수로로 잘 빠져나가도록 만들었다. 문무왕의 유골을 뿌린 대왕암을 성지로 만들고자 외양을 다듬었다고 한다. 문무대왕은 왕자로 탄생해 태자로 책봉을 받았고, 태자 시절에도 나라를 위해 전쟁터에서 큰 공을 세웠다. 왕이 된 후로도 삼국통일을 완수하기 위해 직접 전장을 누볐다. 멀리서 밀려오는 파도가 조용해지니 수중릉이 더 눈앞으로 다가온다. [문무대왕암 수중릉 내부(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이성(異性)에 대한 문화가 변화하고 있다. 남성 위주의 우월주의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사라지고 이성에 대한 가치관도 평등주의로 바뀌고 있다. 현대 사회는 육아도 같이, 가사도 같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남녀 구분 없이 담당한다. 이성 간의 접촉 행위도 장소에 구애되지 않고 개방적이다. 신라시대 때는 양성평등이 잘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제2대 남해 차차웅의 여동생 아로 공주가 혁거세 거서간 시조 묘의 제사장을 맡아서 제사를 주관했다. 그리고 나라를 위해 조직한 청소년 단체의 우두머리를 여성으로 하여 원화(源花)라 불렀다. 원화인 준정(俊貞)이 같은 원화인 남모(南毛)를 죽인 후로는 화랑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남성이 우두머리가 되었다. 신라에는 여성 왕인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으로 세 사람이나 있었다.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남성 우월과 남존여비 사상으로 남녀를 엄격히 구별했다. 남녀는 일찍부터 분리되어 하는 역할이 달랐다. 남자는 주로 바깥일이고, 여자는 집안일이었다. 또한 ‘남녀칠세부동석’으로 남자와 여자는 일곱 살 때부터 한자리에 같이 앉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왔다. 성인이 되어도 부부가 거처하는 방은 사랑채와 안채를 따로 두어 함부로 드나들지 못했다.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 남녀를 평등한 위치에서 보고자 한다. 생활 장소의 구분도 없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육체적으로 남성과 구분되는 여성은 여성이라는 자아 정체감으로 순종한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육체의 문도 순결이 지상목표로 인식되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어쩌다가 육체의 순결을 잃었다 하더라도 정신적인 순결을 잃지 않았다면 괜찮다는 관념이 지배적이다. 오래전 캐나다에서 생활할 때의 일이다. 동네 축구장에서 학생들의 친선 축구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축구장은 숲속에 있었고 온통 잔디밭이었다. 숲속 분위기마저 쾌적하고 시원했다. 관람 벤치에서 잠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영화 같은 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치열하게 싸우는 축구 경기가 마음을 흥분시킨 탓일까, 벤치에 앉아 있는 젊은 남녀가 부둥켜안고 키스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시선을 돌리고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경기 도중 틈틈이 고개가 저절로 그들에게로 돌아갔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두 사람의 키스는 간헐적으로 계속되고 있었다. 심리학자 프로이트의 심리성적 발달 단계로 보아 생식기에 해당하는 나이로 보였다. 그들은 성욕이 한창 왕성한 시기이다. 나의 유교적 이성 문화 관념에서는 신기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외국인의 자유로운 이성 개방 문화에 호기심을 느끼며 축구 경기를 계속 보았다. 이긴 팀이 진 팀에게 아주 정답게 인사를 하고 포옹도 한다. 키스하던 남녀도 경기가 끝나자 언제 키스했느냐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남녀의 표정에는 행복감이 넘쳐 보였다. 그들의 행위는 단순히 쾌락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보이지 않고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개체가 서로 존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도 언제부터인가 자유스러운 키스 문화가 상륙했다. 가로수 밑, 시원한 그늘, 구석진 곳, 버스정류장 등에서 남녀가 포옹하고 키스하는 장면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누구도 관심 없다는 듯이 지나친다. 그들을 보는 나의 시선도 한층 부드러워진다. 오히려 정다워 보인다. 언제부터 내가 이토록 이성에 대하여 관대해졌는지 모를 일이다. 남과 여의 평등사상이 가슴속에 녹아 있는 탓일까? 노출된 장소에서 행해지는 남녀 간의 키스도, 포옹도 때에 따라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같다. 캐나다의 이혼문화도 이성 간의 인격을 존중하고 있었다. 이혼한 지 얼마 안 된 가정에 홈스테이한 친구의 경험담은 이성에 대한 내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이 가정에는 혼인 안 한 딸만 셋이 있었다. 큰딸은 재혼 안 한 아버지와 함께 살고, 둘째와 셋째 딸은 초등학생이라서 재혼한 어머니와 함께 사는 가정이었다. 친구는 아버지와 큰딸이 사는 가정에 홈스테이하고 있었다. 이혼한 부인이 재혼해 사는 가정과 친구의 홈스테이 가정과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았다. 매주 주말이면 어머니와 함께 사는 두 딸은 토요일 오전 아버지 집에 와서 일요일 저녁에 가고, 큰딸은 토요일 오전 재혼한 어머니 집으로 가서 생활하다가 일요일 저녁에 오는 상황이었다. 현재 한국에도 이혼한 가정이 많다. 자녀가 있다면 양육은 부부가 공동 책임을 지고 자녀가 바람직하게 자랄 수 있도록 도와 주는 환경이 기대된다. 이혼한 가정의 남과 여의 평등은 남편이 이혼한 부인에게 남성이라는 우월성을 떠나야 평등이 이루어지리라는 생각을 한다. 캐나다의 이혼한 남편은 자기가 싫으면 얼마든지 다른 남자와 재혼해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응원해 주는 모습이다. 친구와 나는 캐나다의 이혼한 가정에 관해 종종 토론을 벌이곤 했다. 아무래도 내가 남과 여를 바라보는 가치관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자랄 때부터 남성 위주의 우월감이 있었다. 남녀는 평등하니 서로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함에도 나는 그렇지 못했다. 이성에 대해 기울어진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비로소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우월주의를 버리기로 했다. 요즈음은 이성의 활동이 모두가 평등하다는 생각으로 생활하고 있다. 오늘날 과학과 의학의 발전은 여성들이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할 기회가 많아졌다. 그러나 여성이 사회에서 대등한 남과 여로 바로 서기 위해서는 남녀가 평등하다는 인식과 함께 국가적으로 남녀평등 정책이 더 강화될 때, 여성들도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바로 설 수 있다. 나는 오늘도 살아가는 모든 영역에서 남과 여가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누리는 날을 꿈꾼다.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필자]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오 작가] 조삼모사라는 고사성어는 현대에 이르러 변덕이 심하다는 의미로 쓰이는데, 여기에 착안하여 조보모진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조보모진은 아침에 보수였다가 저녁에는 진보로 그 사상이 바뀐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초스피드 시대에 걸맞은 사상개념이다. 그만큼 현대사회에서는 초고속 유연성을 요구하고 유연한 사고와 사상을 소유하는 사람이 크게 주목받는 시대인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상을 보수와 진보로만 바라본다면 이를 두고 흔히 양극화 사고라고도 하는 이분법적 사고이다. 서로 완전히 반대되고 상호배타적인 두 가지 대안만 고려되는 사고방식으로 흰색이냐 검은색이냐 등 이분법적으로 형성하는 범주적 세계관을 제공한다. 한 가지 공통점은 바로 권위주의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전부 아니면 전무인 사고가 사회에 만연되어 있을 때의 위험성을 살펴보자. ▲첫째, 사회가 극심한 양극화 현상에 빠진다. 서로 자신들의 주장을 재고하지 않으므로 틀리더라도 팔을 비틀어 접근 방식을 달리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나라는 2010년 소득 불평등이 OECD 국가 중 최하의 수준이 되었고 더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고용, 사회 계급 간 격차로 위화감이 커졌는데 여기에다가 양극화 현상이 더해져 사회적 위기감이 극에 달하였다. 오로지 자기 진영만 위해 싸우고 상대 진영은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좌절감에 빠져 큰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어느 사람이 두 가지 선택만 인식하게 되면 그것이 절대적인 완벽함이든, 재앙이든 둘 중의 하나로 나타나게 된다. 만사가 그러하듯 결과는 과정이 빚어낸다고 보면 끊임없는 좌절의 상태로 또는 완벽한 성공의 상태로 살아가다가 최종결과가 나오는 것인데 중요한 게 그 과정이다. 전혀 유연성이 없이 곧은 한 길로만 고집했을 경우 그 결과는 참담해진다. 아니 큰 실패라는 성과표를 받게 된다. ▲셋째, 포플리즘의 리스크를 간과한다. 포플리즘은 흔히 정치인이 즐겨 사용하는 대중에 대한 인기영합주의로 정치적 목적이 강하다. 재원 마련이나 지속성에 대한 고민 없이 과격한 정책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이분법적 사고를 대입해 보면 자기 진영의 포플리즘은 마치 하늘을 찌를 듯 위대하게 보이지만 상대 진영의 포플리즘은 땅속으로 처박듯이 무시해 버린다. 즉 대중심리에 빠져 내포된 리스크를 인식하지 못한 채 이 사회는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분법적 사고의 위험성을 살펴보았는데 여기서 탈출하는 방법이 있을까? 세상을 살다 보면 누가 보아도 수많은 길과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이분법적 사고에 묶여 두 가지만 한정하는 오류를 범한다. 어느 누가 “나는 여당이 싫지는 않다”라는 말을 ‘그러면 여당을 좋아하는 것이구나’로 단정 짓는 게 이분법적 사고이다. 결국 이러한 사고는 복잡한 것을 단순화하고 선입견을 유발해 문제해결을 방해한다. 이렇듯 유익하지 않은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하는 길은 제일 먼저 선입견과 편견을 버려야 한다. 그리하면 좀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볼 수 있다. 그다음은 인정하고 포용하는 자세이다. 복잡성을 인정하고 상대의 다양한 시각을 포용한다면 자기 자신이 한없이 유연해진다. 마지막으로 창의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개척한다는 각오로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 인생을 더불어 행복하게 영위하려는 기치를 내뿜어야 하는 것이다. 이분법적 사고에서 탈출하면 곧바로 조보모진으로 이어진다. 탈출과 동시에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맛보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바로 조보모진이 얼마나 중요하고 훌륭한 처세술인지 깨닫는다. 높은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바라보라. 물줄기는 처음에 힘차게 쏟아져 내려오다가 큰 바위를 만나 빙그르르 돌아서 흐르지만, 물량도 줄고 속도도 줄었다. 계속하여 아래로 내려오는 길목에서 나뭇가지, 돌덩어리, 인간이 해 놓은 장애물 등 갖가지 암초에 부딪히고 넓은 물길이 갑자기 좁아져 물량과 속도가 현저히 급감하게 된다. 그동안 많이 유실되었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은 물은 똑바른 길로 내려오다가 굽이굽이 돌아내려 온다. 그렇게 여러 곳에서 내려온 물은 어느 한 곳에서 만나더니 어느덧 시냇물이 되어 따스한 햇볕을 받고 유유한 자태로 덩실덩실 춤을 추며 나래를 편다. 여기까지 당도한 물! 얼마나 위대한 여정인가? 아직 종착지는 아닐지라도 높은 계곡에서 출발하여 시냇물이 된 이 물이야말로 진정한 조보모진의 실천자가 아니겠는가? 조보모진의 실천을 위해 자기의 사상 나이를 계산해 보면 좋다. 사상 나이를 셈해 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먼저 자기 자신이 평소 지향하고 생각한 관점, 판단, 사상을 예로 들어 경우의 수를 살펴보고 보수와 진보 중 어느 쪽에 가까운가, 아니면 언제든 혼용인가를 판단하여 더 많이 치우친 쪽으로 결정지으면 된다. 세대별 분류를 해 보면, 조보모진, 즉 아침에 보수였다가 저녁에 진보로 바뀌면 30대 이하이다. 오보를 내진, 즉 오늘은 보수였다가 내일 진보로 바뀌면 40대이고 중도파, 즉 보수도 좋고 진보도 좋다면 50대이다. 소신파, 즉 나는 보수다, 진보다 확신에 차 있는 사람은 60대이고 골수파, 즉 깊이 빠져 자기 진영만 인정하는 사람은 70대 이상이다. 사상 나이는 생물학적 나이와 무관하다. 내가 아는 지인 중 한 분은 70대인데 사상 자체가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모두 다 섭렵하신다. 이런 분은 분명 50대 이하이다. ‘얼쑤! 통쾌한 세상’이란 책을 보면 우리나라가 명실공히 세계 10대국 선진국에 들기 위해서는 보수니, 진보니 용어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고 나와 있다.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답답하면 그런 주장이 나오겠는가? 인심 좋고 살기 좋은 우리나라가 유독 정치 분야만 극도의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미래의 먹거리 창출과는 아무 도움이 안 되는 보수다 진보다 이런 사상싸움과 패거리 싸움만 일삼으니 그 누가 실망하지 않겠는가? 진정한 세계 선진국 10대국 안에 들기 위한 길은 하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위정자 중 60대 이상은 한 명도 빠짐없이 퇴출당하여야 한다. 여기서 나이는 사상 나이이다. 그리고 그분들에게 우리나라 정치를 싸움판으로 둔갑하여 이 지경으로까지 침몰시킨 죄를 물어 두 번 다시 얼굴을 내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이 나라의 위정자들은 20대~50대로 이뤄진 최상의 조합으로 탄탄한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이들은 무슨 일이든지 합리적으로 해결책을 도출한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기득권 세력들이 하루아침에 신진세력에게 자리를 물러주는 게 쉽지 않아 보이지만 우리 사회가 새로운 사상운동이 활발해지고 국민투표가 강력한 무기로 표출되면 지금부터 3년 안에 실현되리라 믿는다. 그러기 위해선 아무래도 조보모진의 열풍이 강하게 불어야 할 것 같다. 한반도가 조보모진의 열풍에 휩싸이게 되면 그 파급력은 대단할 것이다. 국민의 뼛속까지 시리게 만든 보수와 진보 간, 눈만 뜨면 싸우는 행태가 사라지고 만나기만 하면 언제 싸웠던 적이 있었나? 하면서 서로 칭찬을 못 해 안달이 나고 상대가 내놓은 제안에 대해 손뼉을 쳐가며 찬성하는가 하면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고 웃음소리가 국회의사당 천정을 무너뜨릴 정도로 크게 들린다. 이런 분위기가 사회적 분위기로 옮아 붙어 국가의 운영이 최적의 상태로 된다. 어느덧 전 세계 국가 중 국제적 영향력 행사 5위 안에 들게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위정자들을 모두 사상 나이 50대 이하로 교체하고 싶은데 그들의 나이를 어떻게 알 수 있나? 라는 의문이 든다. 이것도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조보모진이 사회의 유행어가 되고 위정자들의 교체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면 발 빠른 언론사에서 회심의 정보를 발표한다. 현재 정치지도자, 미래의 정치를 꿈꾸는 자, 각 분야의 대표자 등 사회 각 층의 인사들에 대해 사상 나이를 분석하여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킨다. 이런 정보를 보고 판단하는 것은 투표권을 가진 국민의 몫이다. 이제 지금 당장 시급한 일이 무엇인지 자명해진다. 우리는 모두 자고 나면 보수다 진보다 싸우는 대신 조보모진을 외치며 하루일과를 시작하고 조보모진을 숭상하고 우러러보며 실천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다. [*작품 2권 : 21세기를 이끄는 사람 끌려가는 사람, 얼쑤! 통쾌한 세상]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신라 태종무열대왕인 김춘추는 흥무대왕인 김유신이 있었기에 왕이 되고 백제를 멸할 수 있었다. 경주 통일전에 봉안된 태종무열대왕의 표준영정 앞에서 그가 활약한 모습을 떠올린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에서 김춘추를 보았다. 김춘추의 아버지는 김용춘(金龍春)이고, 김용춘은 제25대 진지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신라 진평왕의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 김춘추의 첫 부인은 보라궁주(寶羅宮主)로 딸 고타소를 낳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다음 부인은 김유신의 둘째 누이 문희로 문명부인(文明夫人)이다. 문명부인의 아들은 김법민(金法敏), 김인문(金仁問), 김문왕(金文王), 김노차(金老且), 김인태(金仁泰), 김지경(金智鏡), 김개원(金愷元)이고 딸 김지소(金智炤)을 낳았다. 김유신의 첫째 누이 보희는 김춘추의 후궁인 영창부인이다. 영창부인의 아들(서자)은 김지원(金知元), 김개지문(金皆知文)이다. 또 다른 서자(庶子)로 김차득(金車得), 김마득(金馬得)이 있고 서녀(庶女)는 5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춘추의 딸로 알려진 요석공주는 어머니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김춘추는 김유신이 풍월주일 때 부제(副弟)로 있었으나 보종과 염장에게 양보하고 나중에 풍월주가 되었다. 그는 풍채가 아름답고 빼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세상을 잘 다스리고자 하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 백제의 영특한 왕으로 알려진 의자왕은 재위 2년째인 642년에 윤충(允忠)을 시켜 신라의 대야성을 점령하게 했다. 당시 대야성 군주는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金品釋)이었고, 그의 부인은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였다. 윤충은 김품석이 항복했는데도 부부를 죽여 사비성으로 보냈다. 이 사실을 들은 김춘추는 충격을 받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온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사람이 앞을 지나가도 깨닫지 못했다고 하니 딸의 내외를 잃은 슬픔은 부모라면 누구나 공감하고 가슴 아픈 일이다. 이러한 일로 김춘추는 고구려에 가서 군사를 요청하니, 고구려 보장왕은 김춘추에게“죽령은 본래 고구려 땅이니 죽령 서북쪽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어 주겠다.”라고 하자, 김춘추는 “임금의 명을 받고 왔는데 사신을 위협하고 겁박하니 그 밖의 사항은 모르겠나이다.” 라고 했다. 보장왕은 김춘추의 말이 불손하다고 오히려 별관에 감금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선덕여왕은 김유신에게 명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달려가게 했다. 김유신의 군사가 고구려 남쪽 국경에 들어서자, 보장왕이 이 소식을 듣고 김춘추를 돌려보냈다. 그 후 김유신은 압량주 군주로 임명받아 군사의 힘을 길렀다. 647년 1월 선덕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진덕여왕이 왕위에 올랐다. 648년 김유신은 힘을 기른 압량주 군사로 백제에 빼앗긴 대야성을 도로 찾았다. 김유신은 사람을 시켜 백제 어느 장군에게 제의했다. “대야성 군주였던 김품석과 그의 부인 김 씨의 유해가 너희 나라 감옥에 묻혀 있다. 지금 너희 나라 비장 8명이 잡혀 땅바닥을 기면서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 여우나 표범도 죽을 때가 되면 머리를 제 살던 언덕으로 향하는 뜻을 생각해서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있다. 이제 너희가 죽은 두 사람의 유골을 보내어 살아 있는 8명의 목숨과 바꾸는 것이 어떻겠느냐?” 의자왕은 중상(仲常) 좌평으로부터 김유신의 말을 전해 듣고 김품석 부부의 유골을 파내 나무함에 넣어 보냈다. 이것을 본 김유신은,“잎사귀 하나가 떨어진들 무성한 수풀에 아무런 영향이 없고, 티글 하나 더한다 한들 태산에 아무런 보탬이 없도다.”하면서 곧 8명을 살려 보냈다. 654년 3월 진덕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김유신과 여러 신하가 2관등인 이찬 알천(閼川)에게 섭정을 청했으나, 알천이 굳게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고 이렇다 할 만한 덕행도 없다. 오늘날 덕망이 춘추공 만큼 높은 사람이 없다. 실제로 세상을 잘 다스려 백성을 구제할 영웅호걸이라 할 만하다.” 마침내 춘추공을 받들어 왕으로 삼으니, 세 번이나 사양하다가 부득이 왕위에 올랐다.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지 2년, 655년 봄에 고구려와 백제 및 말갈의 연합군에 의해 신라는 북쪽 영토를 빼앗겼다. 그러나 3월에 당나라 도독 정명진(程名振)과 좌우위 중랑장 소정방(蘇定方)의 도움으로 고구려를 물리쳤다. 10월에 왕의 딸 김지소(金智炤)를 김유신에게 시집보냈다. 김춘추가 왕이 된 지 7년, 660년 3월에 당나라 고종이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 김인문을 부대총관(副大摠管)으로 삼아 수군과 육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했다. 무열왕에게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돕게 했다. 5월에 무열왕은 김유신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라벌을 떠났다. 6월에 현재 경기 이천시에 있었던 군단인 남천정(南川停)에 이르렀다. 소정방은 현재 산둥성 내주(萊州)에서 출발하니 많은 배들이 천리에 꼬리를 달았다. 태자 김법민이 덕물도로 가서 소정방을 맞이했다. 소정방은 7월 10일 사비성 남쪽에 도착해 무열왕의 군사와 합해 사비성을 무찌르겠다고 했다. 태자가 돌아와 소정방의 군대가 매우 성대하고 세력이 강하다고 하자 무열왕은 기쁨에 차서 김유신 대장군, 김품일과 김흠순 장군 등에게 명해 정예 5만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했다. 무열왕은 현재 경북 상주시 백화산 고성으로 비정하는 금돌성(今突城)에 머물렀다. 백제 의자왕은 사비성에서 웅진성으로 피해 있었으나 7월 18일 웅진성에서 나와 나당연합군에 항복했다. 무열왕은 의자왕의 항복 소식을 듣고 금돌성에서 사비성으로 와서 군관인 천복(天福)을 시켜 당나라에 소식을 전했다. 무열왕은 백제가 멸하자 661년 5월에 압독주를 대야(합천)로 옮기고, 6관등인 아찬 종정(宗貞)을 도독으로 삼았다. 6월에는 현재 익산시 지역에 있었던 대관사(大官寺)의 우물물이 피가 되고, 현재 익산시 금마면 지역인 금마군(金馬郡)에서는 땅에서 피가 흘러 너비가 5보나 되더니, 무열왕은 603년에 탄생하여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 지냈다. 묘호를 올려 태종(太宗)이라 했다. 태종무열대왕이 없어서도, 흥무대왕이 없어서도 삼국통일이 되었겠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두 사람이 의좋게 생활하면서 서로가 욕심부리지 않고, 오직 나라를 위해 한평생 몸 바쳤다. 온화하고 위엄있는 태종무열대왕의 영정을 바라보니 그의 호국정신에 고개가 숙어진다. [태종무열대왕 표준영정 경주 통일전]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김흠순(金欽純)은 김유신(흥무대왕)의 아우이다. 그는 자녀를 많이 두었고 가정적인 성품을 가진 장군이다. 화랑으로서 풍월주가 되었고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의 생애는 여러 사서(史書)에서 볼 수 있다. 김흠순의 혼인 이야기를 보자. 그는 화랑의 네 번째 지위인 전방화랑이 되자, 지위 높은 화랑들에게 인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때마침 정자 안에서 여가를 보내고 있는 ‘보리’ 풍월주에게 인사했다. 그때 보리 풍월주의 딸 보단낭주(菩丹娘主)가 남동생과 함께 정자 아래 연못가에 놀고 있었다. 김흠순은 보단의 아름다운 자태가 신선 같아 보였다. 그는 첫눈에 마음이 끌려 보단에게 흠모하는 눈빛으로 한참 동안 보다가 갔다. 며칠 후 보리 풍월주를 배알(拜謁)하고는 사위가 되기를 청했다. 보리 풍월주는 김흠순의 의기(意氣)를 장하게 여겨, “남자가 조심해야 할 것은 여색이다. 네가 내 딸을 사랑하면서 더 극진히 사랑하는 첩을 많이 두지 않는다면 사위가 될 수 있다.” 김흠순은 그리하겠다고 맹세하므로 보리 풍월주가 보단을 김흠순에게 시집보냈다. 김흠순은 보단의 재주와 미색이 뛰어나고, 정숙한 덕을 잘 갖추었기 때문에 기쁨에 넘쳤다. 정사(政事)도 보단의 의견을 많이 듣고 참조했다. 아들만 일곱을 낳았는데 부모를 닮아서 모두 영민하고 용감했다. 김흠순은 늘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나라에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내조의 덕이라 말했다. 그는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집에 들러서 보단하고 말을 나누고 다시 떠났다. 형인 김유신과는 대조적이다. 김유신은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자기 집 앞을 지나면서까지 나라에 충성했다. 김흠순은 나랏일로 외지에 있을 때가 많았다. 보단은 원망하지 않고 집에서 무사하도록 기도했다. 그러다가 김흠순이 돌아오면 온 집안이 시끌벅적하고 화기애애한 잔치 분위기였다. 660년, 63세 때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할 때 김흠순은 장군 품일(品日)과 함께 대장군 김유신을 도와 백제 계백(階伯) 장군의 5천 결사대와 7월 9일 황산(黃山)벌에서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신라군은 네 번 싸워 모두 패했다. 이때 김흠순은 화랑인 아들 반굴을 불러 적진으로 홀로 들어가 싸우도록 명했다. 반굴은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적진에서 싸우다가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를 본 신라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 계백의 결사대를 물리치고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김흠순이 65세~66세 때는 660년 백제 멸망 후 잔당들이 부흥 운동을 일으키자 다른 장군들과 함께 모두 토벌했다. 71세 때인 668년에 고구려를 정벌할 때 관등이 각간(角干)에 올라 있었다. 김흠순은 각간 김인문(金仁問) 등과 함께 군단의 지휘관인 대당총관(大幢摠管)이 되어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그는 항상 김유신을 도왔다. 이때 김유신 장군은 대당대총관으로 본국에 머물러 있었다. 신라는 고구려 정벌 이후, 백제의 토지와 유민을 취하므로 당나라 고종이 격노했다. 그러나 당나라와 애초 약정에 의하면 신라가 백제 고토의 전부를 차지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잘못은 당나라에 있었다. 그런데도 문무왕은 669년 각간 김흠순과 파진찬(波珍飡) 양도(良圖)를 당나라에 보내 사죄하도록 했다. 당나라에서는 두 사람을 감옥에 가두었다. 그 후 당나라는 신라가 사죄함을 생각해서 이듬해 김흠순은 서라벌로 보내고, 양도는 억류당해 감옥에서 죽었다. 사신을 억류하고 죽도록 한 당나라는 신라와 전쟁을 선포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신라는 670년에 당나라 오골성을 선제공격하므로 7년간의 나당전쟁이 있었으나 신라의 승리로 끝났다. 김흠순은 젊어서 술을 좋아했다. 항상 보단부인이 손수 술을 담가 다락 위에 저장해 두었다가 내주곤 했다. 어느 날 김흠순이 술을 찾자, 보단이 다락에 올라가 한참 동안 내려오지 않았다. 김흠순은 이상하게 여긴 후 다락에 올라가 보니 큰 뱀이 술독에 빠져 있었고, 보단은 놀라서 넘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김흠순이 보단을 업고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왔다. 그 후로는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보리 풍월주가 김흠순의 술 이야기를 듣고는 아내 사랑하는 마음이 대단하니 가히 딸 둘을 줄 만하다고 하여 보단의 동생 이단(利丹)도 김흠순에게 시집보냈다. 이단은 3녀 2남을 두었다. 자매가 한 남편을 섬기는데 서로가 투기하는 일 없이 화목하게 지냈다. 김흠순은 재물이 부족하면 항상 ‘염장’ 풍월주에게 구했다. 염장은 김흠순의 인품을 보고 딸들을 김흠순의 아들들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 보단은, “염장은 여색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내니 가풍이 손상될까 걱정됩니다.” 김흠순은 여색을 좋아함은 남자의 본성이니, 나 또한 보단이 아니었다면 마땅히 염장처럼 되었을 것이라 했다. 셋째 아들 반굴 외에는 모두 염장의 딸과 혼인했다. 김흠순의 아들 중 넷째 원수(元帥), 여섯째 원선(元宣), 아홉째 원훈(元訓)은 모두 중시(中侍)가 되었다. 중시는 오늘날 국무총리 지위와 같다. 김흠순 장군은 여러 번 전쟁을 겪었으나 패한 적이 없었다. 군사들을 자식처럼 사랑했다. 680년 2월 보단부인과 함께 천상계로 올라가니 수(壽)가 83세였다. 그때 보단부인은 남편보다 두 살 아래였다. 자손(子孫)이 백 명에 이르고 조문하는 사람이 만 명을 헤아렸다니 흠모하지 않을 수 없다. [▲경주 통일전 경내에 있는 화랑정]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김서현은 신라에서 공을 세운 장군이다. 김서현의 아버지는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양왕의 둘째 왕자 김무력 장군이고 아들은 김유신 장군이다. 장군은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살았다. 금관가야 후예로서 신라를 위해 목숨 바친 김서현과 그의 부인 만명을 양산 취서사에 있는 영정각에서 만났다. 김서현은 그의 아들 김유신(흥무대왕)의 비석에 보면 아버지는 소판 김소연(金逍衍)이라고 했다. 소연(逍衍)이 그의 자(字)인지, 아니면 서현(舒玄)이 고친 이름인지 알 수 없다. 『삼국사기』 「김유신 상」 편에 따르면, 김서현은 길에서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을 보자 첫눈에 반했다. 숙흘종은 신라 제24대 진흥왕의 동생이다. 그 후 김서현이 현재 충북 진천군인 만노군(萬弩郡) 태수(太守)로 가게 되었다. 만명이 함께 떠나려 하자 숙흘종은 비로소 김서현과 딸이 사귄 것을 알았다. 숙흘종은 만명을 별채에 가두어 사람을 시켜 지키게 했다. 그러나 갑자기 별채의 문에 벼락이 떨어져 구멍이 뚫렸다. 지키는 사람들은 깜짝 놀라 흩어졌다. 만명으로 봐서는 기회였다. 만명은 그 구멍으로 황급히 빠져나가 김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달아났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김서현과 만명의 사랑 이야기를 볼 때, 두 사람은 용감했다. 운명이 아니었던가 싶다. 신라 왕실의 숙흘종이 자기 딸과 김서현의 혼인을 반대한 이유는 김서현이 진골의 신분이기는 해도 가야계였기 때문이다. 김서현도 신라는 골품제 간 혼인이므로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서는 신라계 진골과 혼인할 수 없었기에 길거리에서 만명을 유혹한 것으로 보인다. 『화랑세기』 의하면, 김서현은 화랑에 들어가 화랑 조직의 네 번째 지위인 전방화랑을 거쳐, 세 번째 지위인 우방대화랑이 되었다. 이후 28세 때인 591년에는 풍월주(국선 화랑) 바로 아래 지위인 부제(副弟)가 되었다. 부제는 대체로 풍월주의 지위를 계승한다. 그러나 김서현은 풍월주가 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풍월주는 되지 못한 것으로 짐작이 간다. 만명의 어머니인 만호부인은 김서현의 어머니인 아양 공주와 사이가 좋지 않아 만명이 김서현과 관계 맺는 것을 싫어했다. 특히 김서현과는 계통이 달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 결과 화랑 조직에 영향력을 가진 만호부인은 김서현을 부제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집안 간의 좋지 않은 관계로 자녀가 피해를 보거나 혼인을 못 하는 경우는 예나 지금이나 대동소이하다. 김서현은 신라 진흥왕이 설치한 현재 경남 합천의 대량주 도독이 되어 백제 방어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그 후 대량주 도독은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金品釋)이 등장한다. 그는 대량주를 642년 백제에 빼앗기면서 부인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648년 김유신 장군에 의해 대량주를 탈환하면서 김품석 부부의 유해도 찾았다. 김품석이 대량주 도독이 되기 전 어느 시점에 김서현은 현재 경남 양산의 양주 총관이 된 것으로 파악 된다. 언제 총관이 되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양산 총관일 때 여러 차례 백제가 신라를 기습적으로 공격하자 그 기세를 꺾어 영토를 침범하지 못하게 했다. 이에 따라 신라 변방의 백성은 농사와 양잠의 일을 편안히 하였다고 『삼국사기』 에 기록하고 있다. 629년 김서현이 66세가 되었을 때 신라 제26대 진평왕은 김용춘과 함께 대장군으로 명하여 현재 충북 청주 지역에 있는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게 했다. 수많은 고구려 군사를 참살하고 성을 함락하는 전과를 올린 후 김서현은 역사 기록에서 보이지 않는다. 낭비성 전투에서 신라 제25대 진지왕계를 대표하던 김용춘과 가락계를 대표하던 김서현이 대장군으로서 함께 참가한 사실은 두 가문의 정치적 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양자가 친교를 맺어 두 가문이 결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군사적으로 확고한 입지를 다지게 되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밑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양산 취서사(鷲棲祠)와 울산 은월사(隱月祠)에는 김무력 장군과 김서현 장군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취서사에는 김서현과 만명부인의 영정을 봉안한 영정각이 취서사 바로 옆에 있다. 바라보아 왼편에 대도독 김서현지상(大都督金舒玄之像)이 있고, 오른편에 소판부인 만명지상(蘇判夫人萬明之像)이 있다. 취서사와 은월사에는 후손들이 매년 음력 9월에 제향을 올린다. 취서사 영정각에 있는 김서현과 만명부인 영정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한다. 영정의 크기는 부부 각각 가로 56.1cm, 세로 78.3cm이다. 이 영정은 원래 경상남도 양산시 신기리 신기북정고분군중 제10호분인 양산 부부총 인근에 있는 존영각(尊影閣)에 보존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사당이 훼손되었고, 한 무속인이 이들 영정을 수습하였다. 그 후 가락양산시총친회에서 회수하여 진품은 양산시립박물관에 보관하고 사본을 취서사 영정각에 봉안했다. 김서현의 관등은 3관등인 소판(蘇判)을 거쳐 1관등인 각간(角干)까지 이르렀다. 관직은 만노군 태수를 거쳐 대량주 도독이었다. 특별 관직으로 대량주 백성의 사정을 살펴서 어루만져 위로하는 것을 총괄하는 안무대량주 제군사(按撫大梁州諸軍事)가 되었다. 그 후 양주 총관을 거쳐 66세에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다. 김서현은 564년에 출생했고 사망은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현재 김서현의 무덤은 양산시 북정리고분군에 있는 부부총으로 추정하며, 1963년 사적 93호로 지정되었다. 김서현 장군은 가야계와 신라계라는 틈바구니 속에서 30세 경에 혼인했다. 595년에 만명부인은 만노군에서 김유신을 낳았다. 만노군은 지금의 진천군이다. 그 후로 만명부인은 2남 흠순, 1녀 보희, 2녀 문희, 3녀 정희를 낳았다. 김서현 부부는 김유신과 김흠순 장군, 문명왕후 등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웠다. 신라 변방에서 나라를 위해서 큰 공도 세웠다. 부부는 서로가 사랑하면서 힘을 합칠 때 큰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서현 장군과 만명부인이 있는 영정각 문을 살며시 닫는다. [김서현 장군과 만명 부인 영정(촬영 2018. 8. 20)]
by 수원본부장 손옥자[- 경산소방서 중앙119안전센터 소방장 박진형 -] 12월 20일 오전 8시경 구급 출동 벨 소리가 119안전센터 전체에 울려 퍼졌다. 어머니께서 두통을 호소한다는 신고였고 구급대원들은 신속하게 현장으로 출동하였다. 환자를 마주하니 어눌한 말투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고 호소하며 좌측으로 자꾸 기울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구급대원들은 신속하게 환자 상태를 평가 후 뇌졸중을 의심하였고 곧장 환자는 치료가 가능한 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환자는 각종 검사 후 뇌졸중 진단이 내려진 즉시 혈관을 뚫는 응급수술이 진행되었다. 119 신고로부터 딱 1시간 만에 수술실로 들어간 것이다. 다행히 환자는 얼마 후 뇌졸중 후유증 없이 건강하게 퇴원하였고 현재도 건강하게 일상생활을 누리고 있다. 이처럼 뇌졸중은 본인 또는 가족, 지인들의 뇌졸중 의심 증상 바로 알기와 즉시 119 신고로 신속히 병원으로 이송된다면 뇌 손상 및 후유증 없이 건강하게 다시 일상생활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증상을 경험하고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좀 더 심해지면 병원 가야지’하는 생각으로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후유증을 남기거나 최악의 상황에서는 생명까지 위험해지는 상황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최악의 상황을 막고자 뇌졸중이 무엇인지, 뇌졸중의 증상은 어떤 것이 있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아보고자 한다. 뇌졸중을 포함한 뇌혈관 질환은 우리나라 사망원인 중 5위에 해당할 만큼 생명을 위협하는 중증 응급질환이다. 뇌졸중은 뇌혈관이 막히는 뇌경색과 뇌혈관이 터져 출혈이 발생하는 뇌출혈로 구분되며, 고혈압, 당뇨병, 이상지질혈증, 흡연, 과체중, 가족력 등이 주요 위험 요인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뇌졸중은 겨울철에 많이 발생하는데 그 이유는 겨울철 기온이 낮아 뇌혈관이 수축하고 좁은 혈관으로 혈액이 흐르다 보니 혈압이 높아지며 약해진 혈관이 터지거나 막혀버려 뇌출혈 또는 뇌경색이 발생하는 것이다. 뇌졸중의 골든타임은 증상 발현으로부터 3~4시간 이내라고 하지만 증상이 의심되면 1분 1초라도 빨리 응급 재관류 치료가 가능한 병원으로 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처럼 의심 증상의 빠른 인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뇌졸중을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두 가지 의심 증상 판단법을 소개한다. 첫째, 한국형 뇌졸중 의심 증상 판단법 ‘이웃·손·발·시선’ - 이웃 : “이~” 하고 웃을 수 있나요? 마비된 얼굴은 찡그리지 못합니다. - 손 : 두 손을 앞으로 뻗을 수 있나요? 마비된 팔은 아래로 떨어지거나 힘이 없습니다. - 발 : 발음이 명확한가요? 갑자기 어눌한 말투를 보이거나, 알아듣기 힘든 말을 합니다. - 시선 : 시선이 한쪽으로 쏠리나요? 양쪽 눈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지 확인합니다. 둘째, 글로벌 뇌졸중 의심 증상 판단법 ‘FAST’ - F (Face) : 웃었을 때 얼굴의 좌우 모양이 다른가요? - A (Arm) : 한쪽 팔‧다리의 힘이 약하거나 처지나요? - S (Speech) : 발음이 어눌하고 대화를 잘 이어가지 못하나요? - T (Time to act) : 위 증상 중 한 가지라도 의심되면 즉시 119에 신고 또는 병원에 방문하세요. 위와 같은 증상들이 발생한다면 꼭 기억해야 할 3가지 행동 수칙이 있다. 첫째, 뇌졸중이 의심된다면 스스로 진단하려 하지 마세요. 둘째, 뇌졸중이 의심되면 증상 호전을 기다리지 마세요. 셋째, 즉시 119에 신고하여 병원 진료를 받으세요. 경산소방서(서장 박기형)에서는 보건소 및 지역응급의료기관과 함께 지역응급의료협의체를 구성하고 뇌졸중 환자 및 급성 응급환자의 원활한 이송 및 진료를 위해 지속해서 협의하고 있으며 뇌졸중 응급치료가 가능한 병원을 상시 파악하여 골든타임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경산소방서 중앙119안전센터 소방장 박진형 - [2022년 사망원인 통계(출처-통계청)]
by 이승섭 연합취재본부[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성인(聖人)들의 나라를 위한 모습은 여러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돌아가신 신라 문무대왕과 김유신 장군은 나라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동해 조그마한 섬에 대나무를 보내어 피리를 만들어 불게 했다. 피리 소리를 들으면 나라의 우환이 없어졌다. 그 내용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만파식적」 조에 전해지고 있다. 신라는 왜병의 침략을 자주 받았다. 제31대 문무대왕은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신라를 침범하는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사찰을 짓기 시작했다. 사찰을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아들 신문왕이 682년 완성하여 감은사(感恩寺)라 했다. 문무대왕은 평소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말했다. “짐은 죽은 뒤에 호국하는 큰 용이 되어 불법을 높이 받들며 나라를 지키고 싶소.” 또한 유언으로는 왜적을 막을 테니 동해 어구의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내달라고 했다. 장사 지낸 곳은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으로 문무대왕수중릉이라 한다. 신문왕이 용의 모습을 본 곳은 감은사와 같이 완성한 이견대(利見臺)이고 동남쪽으로 직선거리 약 700m에 문무대왕수중릉이 보인다. 신문왕은 해룡이 감은사에 들어와 돌아다니다 갈 수 있도록 대웅전의 층계 밑에 동쪽을 향해 구멍을 뚫었다. 감은사는 현재 3층 석탑 두 개가 동서로 마주 보고, 널따란 터만 남아 있다. 682년 5월 1일에 4등급 파진찬 박숙청(朴夙淸)이 갑자기 신문왕께 아뢰었다. “동해 한복판에 작은 산 하나가 파도에 따라 감은사 쪽으로 밀려왔다 밀려 나갔다 합니다.” 신문왕이 이상히 여겨 천문관측과 점성을 담당한 일관(日官) 김춘질에게 명해 점을 치도록 했다. 일관이 아뢰길, “돌아가신 문무대왕께서 바다의 큰 용이 되어 삼한을 보호하고, 또 김유신이 천상계의 아들로서 우리나라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으므로 두 성인의 덕을 합쳐 성(城)을 지킬 보배를 내리시려 하오니, 폐하께서 해변에 나가시면 반드시 값을 매길 수 없는 큰 보배를 얻을 것입니다.” 신문왕은 기뻐하며, 5월 7일 ‘이견대’로 나가 그 산을 보고 사신을 보내 살펴보게 했다. “산의 모양새는 거북이의 머리 같은데 그 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어, 낮에는 둘이 되고 밤이면 하나로 합쳐집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신문왕은 그날 감은사에서 밤을 지냈다. 다음 날 정오에 대나무가 합쳐 하나가 되고, 천지가 진동하고 폭풍우가 치며 어두워져 7일 만인 16일에야 바람이 멈추고 파도가 가라앉았다. 신문왕이 바다에 배를 띄워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玉帶)를 바치므로 왕은 영접하며 자리에 앉아 말했다. “이 산과 대나무가 갈렸다 합쳤다 하는 것이 무슨 까닭인가?” “비유하건대 한 손으로 치는 손뼉은 소리가 없고 두 손으로 치는 손뼉이 소리가 나듯이 이 대나무도 합쳐진 후에야 소리가 나게 됩니다. 성왕(聖王)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징조입니다. 이 대나무를 가져다가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님께서는 바다의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천신이 되어 두 성인이 같은 뜻으로 값을 정할 수 없는 큰 보배를 제가 바치도록 한 것입니다.” 신문왕은 기뻐 놀라서 오색의 비단과 금옥(金玉)으로 보답하는 제사를 지냈다. 그 후 칙사(勅使)를 시켜 대나무를 베어서 바다를 떠나니 산과 용이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신문왕은 그날 또 감은사에서 밤을 지내고 17일 기림사(祇林寺)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행차를 쉬며 오찬을 들고 있었다. 이때 태자 이공(理恭)이 대궐을 지키고 있다가 소문을 듣고 말(馬)로 달려와 하례하고서 자세히 살펴보고 아뢰었다. “이 옥대의 여러 쪽의 장식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살아있는 용입니다.” “네가 어찌 아느냐?” “장식 하나를 떼어서 물에 넣어 보십시오.” 왼편 두 번째 장식을 떼어서 시냇물에 담그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곳은 못이 되었으므로 용연(龍淵)이라 했다. 신문왕은 환궁하여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고(天尊庫)에 소중히 보관했다. 천존고는 신라 때, 나라의 보물을 간직해 두던 창고이다. 이 피리를 불면, 적군도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 비가 오고, 장마 때는 비가 그치며, 바람이 멎고, 파도가 잔잔해졌다. 그래서 만 개의 파도가 있지만, 피리를 불면 조용해진다는 뜻으로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하고 국보로 삼았다고 한다. 만파식적은 692년, 효소왕(孝昭王) 원년에 분실했다. 찾는 과정에서 692년에 국선 화랑이 된 부례랑(夫禮郞)이 국경 근처에 놀이 갔다가 말갈족에게 사로잡혔다. 부례랑은 잡혀간 곳에서 목동을 하고 있었다. 이듬해 갑자기 단정한 스님이 피리를 들고 부례랑에게 나타나 피리를 타고 기적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만파식적도 다시 찾게 되어 격을 높여 이름을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으로 고쳤다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만만파파식적은 악기이지만 단군신화에 나오는 풍백, 우사, 운사의 천부인(天符印)과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통치의 중요한 수단과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신묘한 효능을 가진 금척(金尺) 등과 같이 건국할 때마다 나타난 신성한 물건과 비슷한 성격으로 생각한다. 만만파파식적에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이후, 혼란스러운 시절이 빨리 지나가고 평화가 오기를 바라는 신문왕과 신라 사람들의 염원이 들어 있기도 하다. 백제와 고구려 유민의 민심을 통합해 강력한 왕권을 상징할 수 있는 신물(神物)로도 추측할 수도 있다. 나라의 안정을 꾀하려 했던 호국 사상도 보인다. 삼국통일의 완성을 본 김유신 장군과 문무대왕은 천신과 해룡으로 등장하여 신라의 번영을 위하고 있다. 작금의 한국 정치를 볼 때 김유신 장군과 문무대왕의 정신을 본받아 나라의 힘을 한곳에 모을 때가 된 것 같다. [검은색 신라시대 만만파파적 추정 노란색 조선시대 제작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by 수원본부장 손옥자[김성문 (사)가야연구원장] 돌아가신 조상은 후예(後裔)를 사랑한다. 후예가 조상을 기리고 훌륭한 점을 거울삼아 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경우는 흔한 일이다. 꿈속에서 만난 조상이 후예를 위해 가르침을 준다는 이야기는 가끔 듣는다. 조상이 후예를 위해 애쓴 경우를 보자. 꿈은 나의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현재 상황의 문제 해결을 위해 다양한 의미가 담길 수 있다. 물론 개인적인 경험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지만, 꿈속에 담긴 의미를 탐색해 보고 메시지를 삶에 적용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한 번은 꿈속에서 돌아가신 어머니가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나타나 나에게 선물을 주셨다. 꿈이 깬 후 어머니로부터 어떠한 선물을 받았는지는 기억이 없었다. 그 물건이 확실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기분이 좋았다. 꿈에 부모님을 만나면 행운이 따른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서 평소에 관심이 없는 로또복권 열 장을 샀다. 로또복권은 한 장에 수억 원 이상이 걸려 있어서 희망을 품고 일주일을 즐겁게 생활했다. 당첨 발표가 있었다. 한 장도 당첨되지 않았다. 조금 서운한 마음이 앞섰다. 그러나 부모님의 환한 모습과 돌아가셔도 나에게 선물을 주시는 모습에 일주일 내내 복권의 당첨 기대감과 함께 컨디션 좋게 생활했다. 부모님은 내가 컨디션이 안 좋은 모습을 보시고 기력을 주신 것일까? 생활에 활력을 찾을 수 있었다. 한편, 조상이 후예의 죄 없는 죽임을 당한 경우를 참다못해 무덤에서 회오리바람을 타고 나와, 자기보다 더 윗분 조상에게 하소연한 경우가 있었다. 신라 제36대 혜공왕 시절, 779년 4월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김유신 장군 무덤에서 일어났다. 회오리바람 속에 한 사람이 준마를 타고 있었다. 모습이 장군과 같았다. 또한 갑주를 입고 무기를 든 40여 명의 군사가 뒤를 따라 신라 제13대 미추 이사금 능으로 들어갔다. 미추 이사금은 신라에서 김씨 왕으로는 처음이다. 김유신 장군은 가야계 김씨이나 신라계 김씨와는 동성(同姓)이다. 그래서 최초의 김씨 왕인 미추 이사금에게 가서 하소연한 듯하다. 잠시 후에 능 속에서 우는 소리 혹은 호소하는 듯한 소리가 크게 들렸다. “신은 평생에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혼백이 되어 나라를 지키며 재앙을 없애고, 환란을 구제하는 마음을 잠시도 가볍게 하거나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술년, 770년에 신의 자손이 죄도 없는데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는 군신들이 저의 공훈을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신은 다른 곳으로 멀리 가서 다시는 힘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허락하여 주십시오.” “오직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한단 말이오. 공은 전과 같이 노력해 주시오.” 김유신 장군이 세 번 청했으나 미추 이사금은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들어주지 않은 청이지만 회오리바람은 하는 수없이 이내 돌아갔다. 혜공왕이 회오리바람의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바로 상대등 김경신(金敬信)을 김유신 장군의 무덤에 보냈다. 김경신은 사죄하고, 혜공왕이 김유신 장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을 취선사(鷲仙寺)에 내렸다는 소식을 전했다. 취선사는 경주에 있었던 절로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이 절은 김유신 장군이 평양을 토벌한 후 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이라 한다. 신라시대 30결은 오늘날 약 14만 평이다. 거대한 땅을 가진 취선사가 보존되지 않았다니 후예들이 조상을 기리는 정신이 부족했는지 아니면 다른 세력에 의해 소멸하였는지는 모를 일이다. 김유신 장군은 전장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적군을 물리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또 적군이 신라를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왕은 다시 전장으로 갈 것을 명했다. 집 앞을 지나 저 멀리서 하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여 마시면서, “우리 집 물은 여전히 옛날 맛 그대로구나!” “대장군께서 이러하신데 우리가 어찌 골육과 이별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겠는가!” 모든 병사의 사기가 충천하여 곧장 적진으로 나아가 적군을 물리치게 되었다. 이토록 나라를 위해 한평생 몸 바쳐 왔는데, 후예가 죄없이 죽임을 당한 것을 알고 조용히 있었다면 김유신 장군이 아니었을 것 같다. 죄없이 죽임을 당한 후예는 혜공왕 6년, 770년 8월에 대아찬 김융(金融)이 반역하다가 처형당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김융으로 추측한다. 김융의 반란 동기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김유신 장군의 아들 윤중(允中)이 성덕왕 때 일반귀족들로부터 따돌림당했던 것으로 보아 김융의 반역도 그러한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미추 이사금의 혼령이 아니었더라면 김유신 장군의 노여움을 막지 못했다. 신라 사람들은 미추 이사금의 덕을 기리며 제사 지내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추 이사금 능의 서열을 오릉(五陵)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 불렀다고 『삼국유사』 「미추왕과 죽엽군」 조에 전하고 있다. 김유신 장군은 국가와 후예를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지금까지도 김유신 장군(흥무대왕)을 기리는 사당은 전국에 10개소가 넘는다. 인간으로서 미덕과 가치를 쉽게 외면하려는 요즈음 조상의 산소 돌보기도 게을리하는 경우의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나를 있게 한 근원이 조상이다. 조상을 기린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 돌아가신 조상이지만 후예를 사랑하는 마음은 꿈속이든 설화로 전해지든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지금도 조상의 혼령님은 어디에선가 환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을 것 같다. [경주 대릉원 미추 이사금 능(촬영 2018. 12. 23)]
by 수원본부장 손옥자